한자와 중국 경전 속에 숨겨진 비밀,
도그마에 빠져 새로움을 억압하는 시대를 향한 반성
대학 강단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작가의 첫 소설로서, 중국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18세기 프랑스인 신부의 삶과 열정이 이 작품을 쓰게 했다. 한자와 중국 경전 속에 숨어 있는 비밀을 조선 사회에 전하고자 하는 사람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그 비밀을 묻어 버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음모가 소설을 이끌어 간다. 이 작품은 잘 만들어진 한 편의 역사추리소설이지만, 진영논리와 도그마에 갇혀 자신의 생각을 절대시하는 시대에 대한 반성으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1. 《서경》의 오형(五刑)을 소재로 한, 조선판 《장미의 이름》!
경종 1년(1721년) 여름, 한 스승 밑에서 역경을 배우던 네 친구가 있었다. 그중 연행 길에 오른 두 친구가 프랑스인 신부를 만나 낯선 책을 한 권 받아 온다. 그 책은 《역경》의 내용을 새롭게 해석한 것으로, 그 내용이 유포되어 알려진다면 성리학 이외의 학문을 사문난적, 이단사교로 몰아가던 조선 사회에 파장을 몰고 올 내용이었다. 책 출간을 의뢰받은 책 거간꾼은 코가 베이고 가슴에는 열십자가 새겨진 모습으로 살해를 당하고, 경전을 인쇄하고 반포하는 교서관 관원은 손목과 발꿈치가 잘린 채로, 함께 공부하던 네 친구 중 한 명은 이마에 ‘邪’(사) 자가 새겨진 주검으로 발견된다. 사건을 추적하는 포청 종사관은 책의 내용을 알고 있거나 필사한 사람이 죽어 나간다는 것과 세 번의 살인은 모두 《서경》의 오형(五刑)의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밝혀내는데…….
2.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 들어온 한 권의 책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는 경제학자가 쓴 첫 소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치밀한 구성과 시대 연구, 조선시대를 그대로 옮겨온 듯한 세부 묘사, 제각기 뚜렷한 개성을 가진 캐릭터의 심리 서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에 유입된 기이한 책 한권을 둘러싸고 사랑·음모·배신·복수 등이 뒤엉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작가는 이 소설의 집필을 위해 상당수의 조선 시대 관련 저서와 논문을 읽었고 역사적 사실성을 높이고자 한양도성의 고지도는 물론, 소설 배경이 되는 시기의 왕조실록을 날짜별로 참고하였다.
예수회 소속의 프레마르 신부(Joseph Henri De Premare, 1666-1736)는 한자와 중국 경전에 예수의 사역과 죽음, 부활이 예견되어 있다는 내용의 책 《중국고전 속의 기독교 교의》(Vestiges des Principaux Dogmes Chretiens Tires des Anciens Libres Chinois)를 저술한다. 이 책은 경전의 상징 이면에 감추어진 비유를 찾으려 하는 색은주의(索隱主義)적 작품 가운데 가장 정통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작가는 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였고, 그 주요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소설을 쓰게 되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는 유교문화권 전역에 신인(神人)을 통한 구속이 태고에 이미 예비되어 있었다는 경이와 신비를 표현하는, 세련된 한 편의 역사추리물이면서 동시에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새로운 생각을 억압하던 시대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가져올 충격, 그로 인해 목숨을 던지는 인물을 통해 진영논리, 도그마에 갇힌 우리 시대를 비추어 볼 거울을 마련한 작품이다.
[책 속으로]
술청 한 가운데는 도가(都家)에서 일을 마치고 나온 상고(商賈) 너댓이 술상에 둘러 앉아 왁자하게 떠들어댔다.
“허허 참, 봄에 모심을 때는 목비는커니와 피죽바람만 불어대더니, 이제 건들장마라도 시작된 건가? 이틀 전에도 자드락비가 퍼붓더니 오늘도 마찬가질세 그려. 윤유월이 끼어서인지 가을걷이가 늦어져서 다행이긴 하다만.”
“누가 아니래나. 불가물에 강더위만 이어져 곡식 다 시르죽을 판에 반갑지. 진작 이리 쏟아졌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야.”
“그것 참, 가뭄도 가뭄이지만 바람이 무척 사납네 그려. 바람 때문에 곡식 다 말라 죽게 생겼으니 올해도 어김없이 흉년일세.”
“왜 아니겠는가? 유난히 바람이 심하네 그려. 궁궐의 정문마저 무너졌으니 말일세.”
“나도 보았네. 돈화문 동쪽 서까래가 무너졌더군. 이거 참 세상이 어수선하구먼. 큰 바람에 나무가 부러지고 집도 무너졌는데 팔도가 다 그렇다더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는지, 원.”
“그나저나 시전은 뭐 땅 파먹고 장사하나?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은 성화같이 재촉해 놓고 값은 제때에 주지 않으니 말일세. 그 때문에 파산한 이도 있다지 않은가? 아, 우리한테는 꼬박꼬박 세금 거둬가면서 세금도 안내고 장사하는 사상(私商)들을 제대로 막지도 못하니 말일세.”
“누가 아니래나? 도성밖에 마포, 서강, 용산, 송파에서 활개 치는 경강상인들 좀 보게나. 금난전권이 미치지 않는다고 미곡, 어염(魚鹽)은 물론이고 시목(柴木)이나 재목까지 도매로 팔지 않는가? 어물전, 염전, 시목전, 미전이 한강변을 따라 점점 많이 생겨나고 있지 않던가?”
“그 말도 말게. 도성밖은커니와 도성안의 칠패, 배우개(梨峴)만해도 사상들이 활개를 친지 벌써 언제 이야기인가?”
“앞으로 크게 장사하려면 경강상인과 동업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술이나 마시세.” (본문중에서)
바로 위 붓골(筆洞)의 초가에서는 파리 떼가 마당 한구석에 수북하게 모여 있었다. 밭을 매는 남편에게 갖다 주려고 자배기에 기승밥을 담아 머리에 이고 부엌을 나서던 아낙이 가까이 다가갔다. 파리 떼가 날아가니 사람의 발꿈치처럼 생긴 살덩어리가 드러났다. 아낙은 기함을 하고 자배기를 떨어뜨렸다. 붓골 바로 옆 생민골(生民洞)의 한 농가 돼지우리 안에서도 비슷한 살덩어리가 발견되었다. 붓골에서 활 한 바탕 거리의 오래된 은행나무 옆에는 폐포파립의 선비가 두 발꿈
치와 오른 손목이 잘린 채 죽어 있었다. 이 사건으로 포도청은 난리법석을 떨어야 했다. 그날 오후 좌포도청의 포도부장 남경식(南慶式)이 이양걸을 찾아왔다.
“피살자는 먹절골(墨寺洞) 사는 운관의 관원일세.”
“먹절골? 중들이 먹을 만들어 판다는 그 절이 있는 마을 말인가? 그곳은 좌포도청 소관이지 않나? 그리고 운관이면 교서관이란 말인가?”
“그러니 내가 기찰했지. 교서관 창준인데 체아직이고 이름은 최한길이네.”
포도부장과 종사관의 품계는 같은 종육품이었지만 종사관이 포도부장보다 직급은 높았다. 그러나 좌포청의 포도부장 남경식은 우포청의 종사관 이양걸과 오랜 지기였다.
“빈대이던가? 아니면 모기이던가?”
“남촌이니까 모기가 맞겠지만 이상하게도 그자의 옷깃이 길던걸.”
남 포교가 대답하자, 이양걸이 “그래?” 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당시 노론과 소론의 분쟁이 격렬했다. 숙종은 장씨를 희빈으로 맞아 경종을 낳았고 인현왕후의 무수리였던 숙원 최씨를 맞아 연잉군을 낳았는데,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받았고 연잉군은 노론의 지지를 받았다. 경종의 나이 열한 살 때 생모인 장희빈이 사사되자 심한 충격을 받아 그때부터 병약해졌고, 심지어 경종이 고자라는 소문까지 궁중에 퍼졌다. 소론의 세력을 등에 업은 경종이 즉위하자 소론은 노론을 척결하고자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왕위를 이을 세자를 정하는 건저 논의에서 노론과 소론은 극명하게 갈라섰다. 노론은 경종이 병이 있으니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할 것을 주장한 반면, 소론은 경종이 아직 젊으니 왕의 아들을 기다렸다가 세자를 삼아야 한다며 노론을 반박했는데, 당시 소론의 맹주는 유봉휘였다. 노론과 소론은 길에서 만나도 서로 모르는 척했으며, 노론은 소론을 모기라 불렀고 소론은 노론을 빈대라 불렀다. 옷깃도 서로 달랐는데, 노론은 옷깃을 길게 하였고 소론은 짧게 하였다. 경종 즉위 시에 영의정 김창집과 좌의정 이건명은 노론이었고 우의정 조태구는 소론이었다. 그러나 권력의 무게는 점차 소론으로 쏠리고 있던 터였다. (본문중에서)
“그런데 궁금한 게 있소. 그 서역에 나타났다던 야소가……, 그의 가르침이 어떻게 중국의 경전과 한자에 있을 수 있다는 게요?”
재서가 이 상황에서 그런 질문에 답하는 것이 힘에 부치는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야소는 희백래(希伯來, 히브리) 민족으로 여덕아국(如德亞國, 유대국)에서 약 1,700년 전에 태어났소……. 그런데 야소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그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여덕아의 예언자와 현인들에 의해 예견되었다고 했소……. 그 민족은 원래 아각포(雅各布, 야곱)란 조상이 낳은 열두 형제가 기원인데……, 아주 오래전에 열 형제의 후손들은 이색렬국(以色列國, 이스라엘)으로, 나머지 두 형제의 후손들은 여덕아국으로 나뉘게 되었소. 그런데 이색렬국은 야소가 태어나기 721년 전에 아서리아(?西利?, 앗시리아)라는 왕국에 의해 망하고 그 열 형제의 후손들은 동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소……. 희백래 민족의 일부는 야소 탄생 약 700년 전부터 중국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그 시기는 중국의 경전이 작성되기 전이오. 이들은 미새아(메시아)라 불리는 구원자의 도래를 알고 있었고, 마서(摩西, 모세)라는 그들의 조상이 만든 다섯 가지 경전(모세오경)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오. 중국의 경전과 고전, 공자의 주석서, 역사, 철학, 종교 등 모든 방면에 걸쳐 이들 희백래인들의 규범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들었소.” (본문중에서)
※ 주요 등장인물
이재서 : 몰락한 반가의 자손으로, 이목구비가 반듯하며 인정 많고 후덕한 인물. 연경에서 특이한 책을 한 권 가져온다.
조명한 : 북촌 반가의 서자 출신. 섬부한 학문에 집념을 갖춘 인물로 사고가 정연하고 쟁론을 좋아한다.
박승안 : 안동 출신의 양민. 총명호학하며 어렸을 때 겪은 곡경으로 말을 더듬는다.
박낙안 : 박승안의 형으로 장사에 수완이 있어 큰돈을 번다. 영특한 동생을 아낌없이 뒷바라지하는 인물.
황영석 : 역관이었던 부친의 권유로 역관이 되었으며 온유한 인상에 관찰력과 기억력이 뛰어나다. 재서와 함께 연행 길에 오른 인물.
이양걸 : 책 거간꾼이 살해당한 이후 박승안을 의심하며 사건을 추적하는 포청 종사관.
김인균 : 자는 일양(日揚), 호는 곡암(谷巖)으로 소설에서는 곡암 선생으로 불린다. 단정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환로에 환멸을 느껴 평생 후학 양성에만 헌신한다.
숙진 : 곡암 선생의 외동딸로 재서를 연모한다. 학문이 유여하며 아이의 순진함, 대갓집 마님 같은 고집이 어우러진 매력적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