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고 재미있고 따스한 젊은 시를 만나다!
2008년 창비신인시인상에 당선되어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섬세하고 따뜻한 서정적 감수성의 세계를 펼치며 기대되는 젊은 시인으로서 평단의 주목을 받아온 백상웅의 첫 시집 『거인을 보았다』가 출간되었다. 등단 당시 “인간세계의 갈등과 상처를 식물적인 상상력으로 봉합하고 치유”하며 “순수 우리말의 음색과 빛깔을 잘 살려 자연 서정의 세계를 독특하고 빼어나게 그려냈다”는 평을 받았던 시인은 세밀한 관찰력과 깊이있는 성찰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아픔을 기록한다. 아울러 친근한 언어와 부드러운 상상력으로 그 아픔을 따스히 어루만지는 데까지 나아가는 그의 시들은 우리가 시인의 이름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선택하는 백상웅의 시에는 상황을 관조하는 여유로움이 도드라진다. 사물에 대한 진지한 관찰과 풍부한 상상력을 결합시키며,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삶의 진실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이를테면 “평생 오른손으로만 일”하다가 “팔을 굽히지 못하게 되었을 때,/멀쩡한 반쪽으로 일을 다시 시작하”(「스위치」)며 “평생 전전긍긍 살았”(「아버지의 터널」)던 아버지나 “각목을 절구에 찧어서 질긴 실을 뽑아”내듯 ”딱딱하고 팍팍한“ 어머니의 삶을 연민과 동정으로 가득 찬 세계가 아니라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낸다.
옷을 만들어 시집을 왔다는/어머니의 말, 각목으로 알아듣고는/나는 옹이가 빠져 구멍이 난 저고리를/생각했다, 그땐 각목이 귀했을지도 몰라./옆집 창고에서 빌려왔을지도 몰라./각목을 절구에 찧어서 질긴 실을 뽑아냈을지도/몰라, 생각하면서 나무속을 기어다니는/딱딱하고 팍팍한 누에 한마리를 떠올렸다./각목을 광목으로 바로 알게 된 후에도/나는 누에가 각목 속에 터널을 뚫는다고/믿었다, 다리 부러진 의자가 되면서도/젖은 밭이랑에 박혀 서서히 삭아가면서도/때리는 놈의 손아귀에 붙잡혀서도/널따란 천을 짜고 싶어할 각목을 떠올렸다.(「각목」 부분)
80년대생 시인답게 그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가 두꺼운 현실의 벽과 맞닥뜨리며 느끼는 절망과 고독을 진지하게 사유한다. 시인은 2006년 최명희청년문학상을 시작으로 전국 대학생 무진기행 백일장 대상, 충주대 국원문학상, 대산대학문학상 등을 차지하며 정식 등단 이전부터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평단은 물론 시를 읽는 젊은 독자들 사이에서 이미 큰 관심을 모아온 데에는 이 세대의 뿌리 깊은 아픔에 주목하는 시인의 시선과, 저들의 어떤 보편적인 감수성이라 할 만한 지점에 가닿는 시어들의 둔중한 울림이 큰 역할을 한 듯하다. 그런 면에서 현란한 시적 테크닉이 새로운 시적 분위기를 주도했던 최근의 우리 시단에서 백상웅의 시는 확실히 독보적인 면이 있다.
방 한 칸의 옆구리를 터서 또다른 방을 만든 집에 세를 들었습니다. 그해 겨울 저는 양철지붕을 밟고 다니는 수상한 거인이 집 근처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거인은 구름을 뒤집어쓰고 어떤 날은 적막한 통장을 들여다보고는 창문에 성에를 가득 채워놓고 갔습니다. 아마도 하늘 가장자리에 묻어둔 쌀독이 텅 비어버린 날이었겠지요. 폭설이었습니다. 거인도 잠을 뒤척이는 것 같았습니다. (…) 검은 벌레들이 방구석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와 젖은 벽지를 뜯어 먹었습니다. 거인은 곰팡이 핀 벽에다 제 그림자를 걸어두고 또 어디에서 저의 낡은 기타 소리를 뜯어 먹고 있을까요?(「거인을 보았습니다」 부분)
백상웅의 시에서 ‘노동’은 가장 핵심적인 제재라 할 수 있다. 그는 아버지, 외삼촌, 화자 자신, 혹은 다른 누군가의 모습을 통해 ‘노동자의 삶’을 시화한다. 게다가 우리는 이것이 지난 시기의 ‘노동시’와는 결을 달리하여 새로운 감각으로 태어나는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노동을 하는 건 밥상에서 겨울을 나기 위한 것”(「밥상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하기에는」)이라고 말하는 시인은 노동의 아름다움을 허튼 감상에 치우치지 않고 독특한 상상력을 전개하며 객관적으로 보여준다.
내 친구 스물일곱살의 팔뚝에도 꽃이 벙글거려요./팔목에 힘을 줄 때마다 자목련꽃이 팽팽하게 열리죠./자색 화상 위에 푸른 실핏줄이 돋아나요./그걸 보고 여자들이 봄날처럼 떠나기만 했대요.//용접봉을 손아귀에 쥔 내 친구 스물일곱살./오늘은 철공소 마당에서 철목련을 매달아요./가지마다 목련꽃이 벌어져서 햇볕을 뿜어대죠.//꽃 핀 철문은 허공에 경첩을 달고 식어가고요,/밤에는 하늘에다 꽃잎을 붙이느라 잠도 못 자요.(「꽃 피는 철공소」 부분)
백상웅의 시에 그려지는 자연 역시 어김없이 노동하는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이를테면 봄의 끝 무렵, 꽃이 떨어지는 모습에서 비정규직의 무너져내리는 삶을 포착하는 식이다. 그러나 시인은 절망적인 현실 인식 정도에서 자신의 시를 멈추지 않는다. “쉬지 않는 용접 불꽃”(「봄의 계급」)처럼 “단단하게 빛나는 시간을 깎는”(「지문의 세공」) 노동의 불꽃이 지닌 불굴의 이미지를 되살려내며 노동이 자신의 권리를 온전히 되찾아 착취당하고 소외당하는 계급이 소멸되는 날을 꿈꾸는 것이다.
이번 생도 비정규직이다. 봄날 간다. 한 철 흥하다가 흩날린다. 꽃잎 몰려가는 골목 끝에는 4월이 이 세계를 빠져나가는 출구. 산수유와 매화도 거기에서 고된 노동을 끝낸다. 어저께도 그저께도 멀쩡했다. 순식간에 폭삭 무너져내린 이 세계를 이제는 어찌하리. 봄날 간다. (…) 봄날의 꽃들은 혁명처럼 피었으나 사랑만 하고, 수정(受精)만 하고 세상을 뜬다. 봄날 오고 이제 간다. 지난 세기에도 그리 갔다. 사랑만으로는 세계가 완성될 수 없으리. 철공소 앞 꽃잎 날린다. 그러나 쉬지 않는 용접 불꽃, 지직지직, 꽃잎 흩날린다.(「봄의 계급」부분)
시인은 “자의식과 현실의 거리를 조절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난 시인”으로서 “울퉁불퉁하고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말하거나 곤궁한 가족사를 이야기할 때에도” 시를 “재미있는 놀이”로 삼는다. 마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완전한 결합”을 모색하는(안도현, 추천사) 듯한 이 젊은 시인이 자신만의 시적 정체성을 지니고 펼쳐나갈 아름다운 시세계가 자못 기대된다.
내게 맏이냐고 물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아마도…… 맏아들인데,/여태 뭐 하고 살았느냐는 건가?/자네가 맏인가?/이 질문을 들을 때마다 무쇠팔을 가진 그레이트한 로봇을 떠올리게 되다니.//엊그제 용머리고개 대장간에 모종삽을 구하러 가서 알게 된 게지./대장장이 부자가 로봇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내게 남아 있다는 것./아버지에게 내가 물려받을 기술이 없다는 것.//대장장이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이어지는 담금질의 방식. 고물에 바람을 불어넣고, 화덕에 달궈서 망치질할 줄 아는, 근육에서 근육으로 철의 문명이 전달되는 이 모든 과정.(「맏인가?」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