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에 시작된 헤겔 『정신현상학』의 우리말 번역이 2년여의 세월이 경과한 지금 그 완역본 간행에 이르렀다. 그간 이 큰 과제를 완수하기까지 끊임없는 정신적 긴장과 창조적 깨우침의 나날을 지새워야만 했던 역자에게 음양으로 성원과 편달을 아끼지 않았던 여러 독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의 삶과 오늘의 세계를 투철한 인간적 시각과 본원적인 역사적 조명 속에서 탐구하고자 하는 많은 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움의 뜻을 전하고자 한다.
만약 『정신현상학』이 무성한 가지와 풍요로운 열매를 지닌 옹근 나무의 뻗어나는 힘에 비유될 수 있다면, 지금 여기에 선보이는 『대논리학』은 나무의 뿌리로부터 그 봉오리에 이르기까지 오직 한 줄기로 이어진 응집된 마디와 결절들의 간단없는 발양을 보이는 것이라고 하겠다. 밀려오는 노도와 같이, 그러나 혹은 잔잔히 스며들어 오는 시냇물의 가냘픈 외줄기 흐름과도 같이 우리의 예지와 지적 충동을 북돋우면서 가장 깊은 곳에 잠겨 있는 자기의 내면과 뭇 존재의 근원을 하나로 응어리지게 하는 이렇듯 위력적인 정신과 사유의 논리야말로 진실로 인간다움의 자기 본질을 스스로 우리에게 확증시켜 주는 사상과 현실의 통일적 구심점, 바로 이것의 서술에 다름 아니다. 가장 가까이 와 닿아야만 할 구체성이 또한 이에 못지않게 지극히 먼 곳에 있는 안개 속에 가리어진 듯한 추상으로 ‘가현假現’될 수도 있듯이, 우리는 이제 이 한 권의 책 속에서 온통 추상으로 메워진 듯한 상태에서나마 냉혹한 생멸계生滅界의 무상함을 되씹게 해주는 논리의 무한한 침투력과 구체적인 추동력이 시공을 절絶하는 현재의 참뜻을 되새기게 해 줌을 본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날 동서와 고금의 구별이 없이 극에서 극으로 확산, 파급되어 가는 변증법 사상의 실체를 마주 대하게 된다.
바로 지난 1981년은 헤겔 서거 150주기이면서 동시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간된 지 꼭 200주년이 되는 해이어서 독일에서는 ‘칸트냐, 헤겔이냐?’를 주제로 한 대규모 국제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기회에 역자가 펠릭스 마이너 출판사의 마이너 사장과 독일 정부 산하의 대외문화 전담기관인 인터나쵸네스(Internationes) 측과 자리를 같이 하면서 바로 이 전 3부(존재론, 본질론, 개념론)로 된 대작의 한국어판 출간 작업에 착수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본서를 번역, 출판하는 데에 직접적 계기가 되어 준 이상 당사자들과, 이 일에 직접, 간접으로 협조를 아끼지 않은 헨리히(D. Henrich) 교수, 푀겔러(O. Poggeler) 교수를 비롯한 그 밖의 많은 분들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본서 제2부에 해당하는 「본질론」을 첫 번째로 출간하게 된 것은 철학 분야만이 아닌 사회과학 전 분야를 의식한 데서 취해진 것이었음 을 밝혀 두면서, 앞으로 「개념론」, 「존재론」의 순으로 출간될 예정임을 부언하고자 한다. 이밖에 독어 원문의 인용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고 보이는 여러 곳에서는, 예컨대 헤겔 유고 속의 ‘Seyn’이 ‘Sein’으로, ‘Thatigkeit’는 ‘Tatigkeit’로 표기되었음을 일러둔다.
무엇보다 이 한 권의 책이 그토록 착종된 우리나라 학문, 사상계로 하여금 미몽과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어찌하여 바로 이 ‘벗어남’이 그다지도 힘겨운 작업이어야만 하는가를 깨우치는 데 일조하게 된다면 역자로서는 이를 더 없는 보람으로 여길 것이며, 아무쪼록 이 땅에 정신적 갱생의 빛이 밝아 오기를 기대해 보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