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냄새로 번지는 애틋한 그리움과 위로
1989년 민중시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김주대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그리움의 넓이가 출간되었다. 80년대 민중민족문학 진영의 촉망받는 젊은 시인이던 그는 첫 시집(도화동 사십계단, 청사)을 발표한 뒤로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2007년 꽃이 너를 지운다(천년의시작)를 펴내며 시작활동을 재개하였다. 네번째 시집 나쁜, 사랑을 하다(답게 2009) 이후 3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현실에 길들여진 채 살아가는 사십대 중년의 소시민적 삶을 담백한 어조로 노래한다. 평범한 일상 언어로 삶의 사소한 기척들을 포착해내는 자전적 시편들이 가슴 저린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우주는 지구를 저질러놓고/용암 같은 점액질의 시간을 흘려보냈다/육신을 만난 시간이 뼛속에 나이테를 새겨/뜨겁고 촘촘히 과거를 감아놓았다/나는 사건이다/깊은 숲 속 시간의 무거운 흐름 위로/어느날 튀어오른 물고기처럼/세상에 왔다/(…)/생은 시간을 역류하여 솟아오른 사건이다/아들이 나의 해결할 수 없는 벅찬 사건이듯이/모든 생은 스스로를 수습한다(시간의 사건 부분)
현실의 구체적인 풍경 속에서 삶의 진정성과 아름다운 가치를 찾아내는 김주대 시의 밑바탕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깔려 있다. 시인은 무엇보다도 밑바닥으로 내몰린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시인은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으면/목매달아 죽은 시신의 얼굴이 편안”(김진숙)한 자본주의사회의 그늘 속에서 “노동자의 헐벗은 이마에 붉은 띠가 묶일 때/불현듯 현기증에 시달리”(주체)기도 한다.
공원 나무탁자 위에 버려진 캔을/사내의 팔꿈치가/슬며시, 넘어지지 않게 밀어본다/묵직하다/옆 사람을 힐끗 쳐다본 사내는/낚아채듯 캔을 들어/먹이 문 길고양이처럼 재빨리 자리를 옮긴다/나무그늘 아래서 목을 뒤로 활짝 젖히고/시커멓게 열린 목구멍 안으로 캔을 기울이자/남은 음료가 질금질금 쏟아진다/울대뼈가 몇번 꿈틀거린 후/길게 내민 허연 혓바닥 위로/캔 속의 마지막 한 방울이 똑, 떨어진다(노숙 부분)
시장 입구에 버려진 사과를 “시커먼 운동화 발로 슬쩍슬쩍” 굴려 “구석으로 몰고”(노숙) 가 한 끼를 때우는 노숙자와 같은 궁핍한 삶은 시인에게 “상처 난 마음의 천장에 종유석처럼 매달린 울음”(동굴도롱뇽붙이)으로 다가온다. “시급 오천원짜리” 아르바이트를 하는 딸과 “아픈 막내”를 생각하면, “살기 싫어도 살아 있어야” 하는 “애비”로서 “눈두덩에 눈물 같은 걸 올려놓지는 말아야 한다”고 다짐하지만 시인의 “몸에는 어느새 눈물 냄새가 번진다”(?먹먹한?). 그러나 “눈에서 나는 게 아니라/심장이나 발바닥 이런 데서 흐”(노래 되기)르는 그 눈물은 ‘먹먹한 삶’을 견뎌내는 힘이기도 하다.
아르바이트 끝나고 새벽에 들어오는 아이의/추운 발소리를 듣는 애비는 잠결에/귀로 운다(부녀 전문)
시인은 남루한 삶을 돌아보며 “목숨의 어두운 밑바닥 같은 걸 처음으로 보았던”(어디만큼 왔을라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특히 어머니의 결핍을 앓으며 성장했던 시인은 “흰머리 이고 저만큼 가신 당신을/서둘러 따라가 동무해주지 못”(엄마)한 비애감에 젖기도 한다.
외할머니 밑에서 자란 나에게 어머니는 늘 잠깐 다녀가는 아모레 화장품 냄새였다. 누나의 동동구루무를 하얀 종이 위에 쏟아놓고 냄새를 맡으며 어머니를 생각하다가 죽도록 맞은 적도 있었다. 하굣길 고개를 들면 먼 산 능선 위로 어머니의 얼굴이 낮달처럼 솟아오르곤 했다. (…) 어머니의 아모레 화장품 냄새가 지겨울 무렵 무작정 상경하여 재수생이 되었다. 그런데 객지의 어느 쓸쓸한 날 서울역 역사 지붕 위로 어머니의 얼굴이 달처럼 솟아오르는 게 다시 보였다. 어머니는 어머니, 어머니는 언제나 어머니(어머니 부분)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자라 가난한 아버지가 되어 “생의 또다른 고공에 매달려”(?김진숙?) 살아가는 시인은 자본주의 세상 앞에서 삶의 비애를 느낀다. 시인은 빈곤한 삶의 존재 가치를 새롭게 세우고자 과거로 거슬러올라간다. 그곳에서 마침내 ‘하늘’을 ‘나의 시작’으로 삼기에 이른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공포가/생을 전향시”(진화론)키리라는 믿음을 간직하며 시인은 생의 희망을 꿈꾼다. 그러한 시인의 바람이 있는 한 이 시집이 “어떤 가혹한 고비에서도 평범한 나날의 언어, 나날의 삶에 대해 선한 믿음을 잃지 않”고 삶의 참다운 가치를 찾아 “고달픈 날들을 건너고 있는 이 땅의 중년들”에게 “귀한 위로”(김사인, 추천사)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버지의 정자는 갈기를 달고 사자처럼 달렸다/나의 시작은/소용돌이치는 어머니의 열기 속으로/아버지가 맹렬히 뛰어들 때부터이다/아니, 나의 시작은/아버지가 어머니의
벌거벗은 곡선 위에서/꼬리뼈를 흔들며 정자를 태동시키던 때부터이다/아니, 정자 이전 수유기의 아버지가/할머니 유두에 입을 대던 그 따스했던 처음부터/할머니의 젖과, 젖을 돌게 한 펄펄 끓던 미역국부터/미역부터가 나의 시작이다/아니, 더 거슬러올라가 나는 물을 잡고 울던 해저/미역을 밀어올린 바다이기도 하지만/천둥과 시퍼런 폭우로/일렁이는 바다를 쏟아낸 하늘이 나의 진짜 시작이다(인내천(人乃天)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