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 한국사상선 제18권 『박은식·신규식: 시대의 아픔과 역사의 구원』은 격변기 구한말에 태어나 경술국치 이후에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한국’을 회복할 방안을 강구했던 두 사람의 삶과 사상을 엮어낸 책이다. 박은식과 신규식은 각각 『한국통사』와 『한국혼』이라는 탁월한 민족주의 역사서를 쓴 사상가이자 역사학자이며 독립운동가로서, 한반도의 역사를 제대로 전승하는 것이 곧 민족을 구원하는 토대가 됨을 역설했다. 최근 정치사나 사회사 연구에서 역사를 이끄는 힘으로서 ‘감정’에 주목하곤 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박은식과 신규식의 역사서가 공통적으로 아픔을 증언하고 있음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이 적어낸 통사(痛史)는 비단 나라를 잃은 슬픔을 격렬히 호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아픔을 교육·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현실의 여러 굴종을 이겨내는 기폭제로 승화시키고자 했던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역사이다. 박은식과 신규식 사상의 핵심, 아픔과 구원
박은식은 1859년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청년기에 그는 평안도에서 지내면서 서북 지역민들이 겪어온 뿌리 깊은 지역 차별을 날카롭게 인식했다. 그뿐 아니라 보통의 백성들이 겪는 굶주림 등의 계층 간 불평등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 같은 현실 앞에서 그는 고뇌에 빠진다. “지치(至治)란 무엇인가? 인정(仁政)이란 무엇인가? 인민의 참상을 해결할 방법은 유학 안에 있는가? 인민의 참상을 해결할 의지는 정부 안에 있는가?”(17면) 그는 교육만이 현실의 난국을 타개할 방안이라고 보았다. 우선 그는 자신이 공부해온 유학에서 해법을 찾아보았고, 『주역』의 겸괘(謙卦) 편에서 과거 선현들의 지혜를 확인하고는 자신의 호를 겸곡(謙谷)이라 짓는다. 박은식이 실천성을 강조한 양명학으로 기울어진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였다. 이때에도 그는 각각의 인간이 마치 종교인이 된 것처럼 한 개인을 넘어 전 사회의 아픔을 절절히 느꼈으면 하고 바랐다. 그에게 지식이란 “공감하고 행동하는 앎”(18면)이었다. 이 같은 공동체의 고통에 대한 대안으로 교육과 더불어 그가 내세운 것은 바로 ‘자강과 혁명’이다. 여기서 자강(自强)이란 ‘스스로 강자가 된다’라는 뜻이 아니라, ‘자조(自助)’ 즉 자신의 실력을 키워 스스로를 돕는 것을 넓게 의미한다. 또한 이때의 혁명이란 단지 국권의 회복만이 아니라 세계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한 혁명과도 같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미까지 담고 있다. 그는 『한국통사』에서 이 같은 ‘자강과 혁명’의 인물로 흥선대원군과 김옥균, 그리고 동학당을 손에 꼽으며, 각 인물·집단이 가진 현재적 의미와 한계를 되짚는다. 각자 시대사적 과제들을 짊어지고 있던 박은식과 신규식은 중국의 신해혁명 소식에 크게 감화를 받고 상하이로 향한다. 이후 상하이에서 활동하며 ‘어려운 시기를 함께 건너는 공동체’라는 뜻을 지닌 ‘동제사(同濟社)’라는 모임을 결성했고, 이 단체는 향후 독립운동에서 한중 연대 활동의 매개가 되었다. 박은식은 한국과 중국 간의 연대가 단시간 내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맺어온 관계 아래에 풍부히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또한 한중 연대 의식은 그 자체로 머물고 정지하는 개념이 아니라 더 나아가 세계주의에 도달해야 하는 유기적 힘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한국과 중국 간 연대의 극적인 장면으로는 “1921년 상해 통합임시정부 국무총리대리 신규식과 광동 호법정부 대총통 쑨원 사이의 만남”(23면)을 꼽을 수 있다. 그해에 신규식은 쑨원을 방문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과 당시 미·영·중·일 등이 참여하는 태평양회의에 한국과 중국이 공동으로 대응할 것을 요청했다. 신규식은 1880년 태어나 대한제국의 청년 장교로 경력을 시작했다. 을사늑약 후에 음독자결을 시도할 정도로 독립에 대한 열의가 높았다. 박은식과 마찬가지로 1911년 중국 신해혁명에 감화를 받고 상하이로 이주해 쑹자오런, 황씽, 천치메이 등 중국 혁명지사들과 교류하고 박은식 등과 함께 동제사를 결성해 독립과 근대화에 대한 열정을 지닌 청년들을 규합했다. 그가 『한국혼』을 완성한 것은 35세 때인 1914년으로, 이 책은 ‘국가가 멸망한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절절히 호소하는 역사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