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밤마다 침대 위에 누워 함께 침몰했다 모래가 씻긴 애인의 얼굴은 해변으로 떠밀려 온 시신과 닮았다“
슬픔을 갉아먹고 자라난 청춘의 언어들 ‘언제나 개미지옥’인 사랑과 이별의 해부학
걷는사람 시인선 73번째 작품으로 원보람 시인의 『라이터 불에 서로의 영혼을 그을리며』가 출간되었다. 원보람은 201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현실을 정직하게 읽을 줄 알며 언어와 표현법 뒤에 숨지 않았다”는 평을 받았다. 평이한 시어 속에 긴장의 풀잎이 날카로운 원보람의 시는 잔혹동화 같은 면모로, 고요함 가운데 비판적인 시선을 담아낸다. ‘라이터 불에 서로의 영혼을 그을리며’라는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듯 시인은 사랑의 고통과 위험성을 전면적으로 드러낸다. “고통으로 진화하는 감정은 밤의 취향/우리는 언제쯤 안전할 수 있을까요/(…)/교회 앞에 버려진 아기와 마른 꽃들이/하나의 식구를 이루는 옥탑에서/나는 가끔 창문을 열고/지상에서 손을 흔드는 이웃들에게/모든 세간을 쏟아 버리고 싶었습니다”(「옥탑의 비밀」)라는 문장처럼 고통을 주는 주체에 대해 증언하는 작품이 많다. 그러나 원보람은 원망하는 태도보다는 슬픔을 직시하는 태도를 유지한다. “매번 다른 면이 나오는 주사위를 던져서/엉망으로 훼손된 진심을/한 칸씩 옮기는 방식으로”(「진심 게임」) 그는 차라리 ‘패배’를 자처한다. 나뿐 아니라 누구나 서로에게 그을릴 수 있다는 마음 상태를 지닌다. 시집에는 청춘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험한 사랑과 상처가 솔직하고도 처연하게 그려진 시편들이 눈길을 끈다. “날짜를 세는 일은 나의 새로운 습관이에요 (…) 날짜를 세다가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말았습니다 도무지 일상이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날이 오면 정말 이별입니까 잘 먹고 잘 살고 안녕히 모두 안녕히 하나의 이벤트가 끝납니다 나는 여전히 빈손입니다”(「타협」)와 같이 이별을 형상화하는 대목들이 선연하다. ‘이벤트’처럼 끝나 버리는 사랑이라니, 그런 처지에서도 ‘타협’하는 태도를 취해야만 하는 세상살이의 냉정한 이치를 이 젊은 시인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려낸다. 이것이 인생이라고. 시인은 또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싸구려 폭죽이 터졌다 잘린 부위에서 그림자가 다시 자라났다 안개가 내 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청춘 콜라주」)라는 문장처럼 과거를 회상하게 하는 주체를 언급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과거의 감정을 반복하며 되새기는 건지도 모른다. 이처럼 원보람 시인이 형성한 시세계는 깨져 버린 감정의 잔해들로 이루어져 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관계가 남긴 여독이 사라질 때까지/몸이 아프다//마지막으로 손을 뻗어 보기 위해/절벽으로 가는 마음을/이제야 겨우 알 것 같다”(「관계의 여독」)라는 표현은 처연하며, 고통 가운데에서 성장할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대신 해 주는 것만 같다. 누구나 자기만의 몫으로 감당해내야 될 숙제가 있다. 외롭게 버티는 순간들이 모여 오늘의 나, 삼십 대의 원보람이 존재한다. 그리하여 청춘의 지리멸렬한 방황 끝에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간 바다에서//홀로 파도치는 마음//하얀 거품으로 부셔질 때마다//혼자 더 세게 혼자가 된다”(「한낮의 열기가 식어 가는 해변에서」)는 태도를 그는 장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발 더 디딜 수 있는 용기를 내어 보는 것이다. 강지혜 시인은 추천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상처를 믿지 않고 고통의 감각만을 느낀다면, 애초에 상처가 없던 것처럼 상처를 지울 수 있다. 불행을 믿지 않고 이질감만을 느낀다면 불행을 삭제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감각은 순수한 것, 감각은 용기 있는 것. 순수와 용기에서는 가능성이 태어난다. 그러한 가능성으로 원보람은 쓴다.”고. 수많은 고통과 고뇌 속에서도 결코 훼손될 수 없는 감각과 정신이 여기에 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일찍이 배우고 터득했지만, 단단하게 그리고 용기 있게 그 사실을 직시하며 내일의 가능성을 믿는 일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보람은 자신의 감각을 믿으며, ‘마술’보다 더 마술 같은 다음을 향한다. 흘러가는 관계 속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이 시집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