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존재들을 바라보는 이해와 긍정의 시선 “자연과 인간이 융화하고, 인간과 인간이 화해를 이루는 아름다운 절경” 느티나무는 그늘을 낳고 백일홍나무는 햇살을 낳는다./느티나무는 마을로 가고 백일홍나무는 무덤으로 간다./느티나무에서 백일홍나무까지 파란만장, 나비가 난다.(「생(生)」 전문)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그윽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삶의 의미를 포착해온 이정록 시인의 아홉번째 시집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이 출간되었다. 삶의 지혜와 해학이 넘치는 연작시집 어머니학교(열림원 2012)와 아버지학교(열림원 2013) 이후 3년 만에 펴내는 이 시집에서 시인은 “자연과 인간이 융화하고, 과거와 현재가 만나며, 인간과 인간이 화해를 이루는 아름다운 절경”(김상천 해설)의 세계를 펼치며 웅숭깊은 사유와 섬세한 관찰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여준다. 일상의 구체적인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질박한 언어가 살아 숨 쉬고 정밀한 묘사와 명료한 비유가 돋보이는 “슬프고 아름답고, 맑고 깨끗한 시들”(신경림, 추천사)이 깊은 울림 속에서 은은한 감동을 선사한다. 햇살동냥 하지 말라고/밭둑을 따라 한줄만 심었지./그런데도 해 지는 쪽으로/고갤 수그리는 해바라기가 있다네.//나는 꼭,/그 녀석을 종자로 삼는다네.//벗 그림자로/마음의 골짜기를 문지르는 까만 눈동자,/속눈썹이 젖어 있네.//머리통 여물 때면 어김없이/또다시 고개 돌려 발끝 내려다보는 놈이 생겨나지./그늘 막대가 가리키는 쪽을/나도 매일 바라본다네.//해마다 나는/석양으로 눈길 다진 그 녀석을/종자로 삼는다네.//돌아보는 놈이 되자고./굽어보는 종자가 되자고.(「해 지는 쪽으로」 전문) 이정록의 시는 “높은 곳에는 올라가보지 못한 바닥의 나날”(「바가지 권정생」) 같은 일상의 그늘진 소재를 다루면서도 따듯함이 깃들어 있다. 시인은 사물에 대한 깊은 이해와 긍정의 시선으로 사소한 존재들의 낮은 곳을 바라보며 인간과 자연, 사물과 사물이 교감을 이루는 조화로운 풍경 속에서 삶의 가치와 본질을 차분한 마음으로 성찰한다. 나아가 “순간순간이 연명”(「별」)인 삶은 죽음의 한 순간이며, “영혼을 부화시키는 일”(「영혼의 거처」)인 죽음은 생명의 한 고리일 뿐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러 시인은 “해 지는 쪽으로/고갤 수그리는”(「해 지는 쪽으로」) 여린 존재들에게 공감과 연민의 눈길을 보내며 “어둠을 몰고 가는 차창에 달라붙는 별빛”(「별」) 같은 “푸른 봄”(「세석평전」)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사바나 초원,/죽은 어미 옆에/송아지가 누워 있다.//송아지는 죽어 석양을 보고 있다./어미 혓바닥은 엉덩이 쪽을 가리키고 있다./암소의 자궁이 쩍 벌어져 있다./몸의 동쪽은 언제나 생식기다.//초원은 너무 넓어요./엄마 발과 제 발을 잇대어 방을 만드세요./여기 작은 방에 들어와 젖을 짜세요./제 부드러운 가죽도 드릴게요.//눈이 커다란 사내가/죽은 암소의 젖을 짠다./몸의 북쪽은 등짝이다./아기가 업힌 곳이다./마른 젖 보채던 아이가 울음을 멈춘다.//사람의 몸이 성전인 까닭은/기도의 시간을 남겨두었기 때문이다./눈물 젖은 두 손을 맞잡기 때문이다./몸의 남쪽은 손바닥이다.//울음소리가 없다./송아지도 어미 소도 눈물 짜지 않는다./붉은 눈망울만이 몸의 서쪽이다.(「몸의 서쪽」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