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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꽃》은 철학도 이재이와 미술학도 윤소인이 반 고흐의 그림을 따라 여행하며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다.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가지만 두 사람에게 허락된 시간은 길지 않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순간에도 그들은 함께 그림을 보고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하며 남은 시간을 채워간다. 사랑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예술을 향한 열망과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무엇인가를 사랑한다는 것에 관한 소설이다. 그냥 사랑 이야기로만 본다면 이렇게 레트로하고 아날로그적인, 조금은 촌스러운 이야기도 드물 것 같다. 코믹하면서도 세련된 방식으로 사랑과 상실의 아픔을 건드리는 작품들이 얼마나 많은가. 5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굵직한 작품들을 여럿 써낸 거장이 생의 마지막 작품으로 내놓은 사랑 이야기라는 점을 빼고 본다면, 솔직히 아쉬운 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이 소설을 단순한 사랑 이야기로만 읽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화가를 꿈꾸었던 작가는 비싼 물감을 살 형편이 되지 않아 그림을 포기하고,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되는 소설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평생 글을 쓰며 살아온 뒤 마지막 소설에 이르러 오래전에 포기했던 그림을 다시 꺼내 들었다. 반 고흐의 그림을 찾아다니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쓰면서 자신이 직접 그린 고흐의 그림들을 소설 속에 실었다. 어쩌면 소설이라는 공간을 빌려 젊은 날 접어두었던 꿈을 뒤늦게나마 원 없이 펼쳐본 셈이다. “그림을 그리면 그냥 눈으로 볼 때보다 10배 이상 그림을 샅샅이 뜯어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보다 효과적인 그림 감상은 없다.” 이재이와 윤소인에게서는 자꾸 조정래 작가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자본주의적 가치관에 사로잡힌 아버지와 형의 등쌀에 자신이 원하는 길에서 밀려나는 이재이에게서는 가난 때문에 미술의 꿈을 포기해야 했던 젊은 조정래가 보인다. 그리고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느끼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을 그리고 싶어 하는 미술학도 윤소인에게서는 병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글을 써 내려가는 노년의 작가가 보인다. 한 사람에게는 이루지 못한 젊은 날의 꿈을, 다른 한 사람에게는 죽음을 앞두고도 놓지 못하는 예술에 대한 열망을 나누어 준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고흐의 그림을 찾아다니며 함께 감동하고, 문학과 미술의 접점을 이야기하면서 생의 마지막 시간을 아껴 나누는 두 젊은이의 발걸음이 더욱 애틋해진다. 둘에게 사랑은 단순히 서로를 좋아하는 감정만은 아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기에 함께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모든 순간이 곧 삶 그 자체가 된다. 둘이 함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숨을 쉴 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그 짧은 시간이 더욱 아쉽다. 생각해보면 《서리꽃》은 거창한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젊은 날 포기해야 했던 꿈, 평생 놓지 않았던 예술, 죽음을 앞두고 더욱 절실해지는 삶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노작가가 자신이 가장 익숙한 소설이라는 그릇에 하나씩 담아놓았을 뿐이다. 혹시라도 세련된 사랑소설을 기대한다면 다소 낡고 촌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것이 한 작가가 긴 생애의 끝에서 써낸 마지막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평생 소설을 써온 사람이 마지막에 이르러 소설 속에 그림까지 그려 넣으며 자신이 사랑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불러 모은 작품. 어쩌면 《서리꽃》 두 권은 조정래가 독자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이야기인 동시에, 젊은 날의 자신에게 뒤늦게 건네는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자신의 삶에서 끝내 놓지 못했던 것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꺼내놓은 노작가의 마지막 두 권. 꾹꾹 눌러쓴 문장과 서툴지만 정성껏 그린 그림 사이에서 한 사람이 평생 사랑해온 문학과 예술, 삶의 흔적이 보인다. 굳이 ‘노작가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더라도, 충분히 의미 있는 조정래의 또 하나의 소설이 아닐까. ________ 갑자기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함박눈이었다. 바람결이 부드러워 큰 눈발들은 공중에 느리고 여유롭게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큰 눈송이들은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처럼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서리꽃 1 | 조정래 저 #서리꽃_조정래 #조정래작가 #해냄 #서리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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