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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책 상리형진 2권 상층 상세페이지

관상책 상리형진 2권 상층작품 소개

<관상책 상리형진 2권 상층> 관상학의 바이블인 상리형진 2권 상층 한문 원문 및 한글번역 주석

[예시문]
顧下言徐叔向知其必死, 視端趨疾趨疾: 빠르게 좇다.『 석명釋名』이라는 책을 빌어서 ‘천천히 가다(徐行曰步)’ 또는 위를 오르는 모습. 서로 엇갈리면서 서로 같이 가다(相背猶相隨也
, 魏主覘 覘(엿볼, 기다려보다 첨{점}; ⾒-총12획; hān)
合乎情.
고하언서숙향지기필사 시단추질 위주합호정
아래를 돌아보고 말을 천천히해 숙향은 반드시 죽음을 알았고, 단정하게 보고 빨리 나아가니 위나라 군주는 정황을 엿볼수 잇다.
勾踐長頸鳥喙而亡身, 翼德環眼虎鬚爲上將.
구천장경조훼이망신 익덕환안호수위상장
월나라 왕 구천은 긴 목에 새 부리로 몸이 죽고 익덕 장비는 고리눈에 호랑이 수염으로 상장군이 되었다.
唐太宗有天日之表 天日之表:사해에 군림할 인상
, 龍鳳之姿.
당태종유천일지표 용봉지자
당나라 태종은 하늘 태왕과 같은 의표이며 용과 봉황같은 자태이다.
齊高帝有鍾鼓之音, 麟紋之體.
제고제유종고지음 인문지체
제나라 고제는 종과 북과 같은 목소리가 있고 기린무늬의 몸이 있었다.
潘 潘(뜨물 반; ⽔-총15획; pān)
相王敦 王敦 :266 ~ 324
동진(東晉) 낭야(琅邪) 임기(臨沂) 사람. 자는 처중(處仲)이고, 왕도(王導)의 종형(從兄)이자 진무제(晉武帝)의 사위다. 양주자사(揚州刺史)를 지냈다. 낭야왕(琅邪王) 사마예(司馬睿, 元帝)가 처음에 강동(江東)을 지켰는데, 위명(威名)을 떨치지는 않았지만 왕도와 함께 그를 도왔다. 두도(杜弢)의 반란을 진압하고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에 올랐다. 서진이 망하고 동진이 들어설 무렵 동진 정권을 지지한 덕에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과 형주목(荊州牧)에 올라 병권(兵權)을 장악했다. 원제가 왕씨의 세력을 제거하려고 들자 영창(永昌) 원년(322) 무창(武昌)의 난을 일으켰다. 건강(建康)을 공격하여 습협(習協)과 주의(周顗), 대연(戴淵) 등을 살해했다. 스스로 승상(丞相)이 되어 무창으로 돌아와 주둔하면서 멀리서 조정(朝廷)을 조정했다. 명제(明帝) 태녕(太寧) 2년(324) 왕도 등이 그가 중병에 걸린 것을 이용해 군사를 일으켜 토벌했다. 왕함(王含)과 전봉(錢鳳) 등에게 군대를 건강으로 진군시키라고 명했는데, 얼마 뒤 병사(病死)했고, 군대도 흩어졌다.
, 蜂目豺聲, 後必爲人所噬 噬(씹을 서; ⼝-총16획; shì)
.
반상왕돈 봉목시성 후필위인소서
반도가 왕돈관상을 보니 벌 눈에 승냥이 목소리로 뒤에 반드시 사람에게 씹혔다.
公孫相王莽, 虎吻鴟睛, 知其後來食人.
공손상왕망 호문치정 지기후래식인
공손시가 왕망의 관상을 보니 그는 호랑이 입술에 솔개 눈동자로 뒷날 다른 사람을 잡아먹을지 알았다.
潘安 潘安: 본명은 반안이 아니고 반악(潘岳)임. 자는 안인(安仁)인데, 貌似潘安은 잘생긴 남자를 칭찬할 때 쓰는 문구, 위진시대의 미남자. 어찌나 잘생겼는지 주변에 그를 보려는 여자들이 넘쳐나고, 추파를 보내는 여인들이 던진 꽃송이가 마차를 가득 채웠다 하여 척화영거(擲花盈車)란 사자성어도 만들어 졌다
號曰美丈夫, 身膺顯臣.
반안호왈미장부 신응현신
반안은 아름다운 장부라고 불려서 몸이 현달한 신하가 되었다.
何晏 何晏, 193년? ~ 249년)은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다. 자는 평숙(平叔)으로, 후한(後漢) 말기의 외척으로 대장군까지 지낸 하진(何進)의 손자이자 위 태조 무황제 조조(曹操)의 양자. 하안은 후한 왕조가 붕괴되고 각지의 군웅이 봉기한 군웅할거(群雄割據)시대를 거쳐 삼국시대(三國時代)로 이어지는 시기에 살았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는 정치를 비판하고 인물을 평가하는 것을 유행하게 하였다. 삼국시대에 들어 위 왕조의 정치적 언론탄압과 유학의 쇠퇴 등으로 정치 비판과 인물 비평은 자취를 감추고, 사람들은 노장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형이상학적 담론, 또는 철학론적 색채가 짙은 현학(玄學)이 발생하게 된다. 하안은 정시(正始) 연간, 왕필과 노장에 대한 논의를 거쳐, ‘천지만물은 모두 무위를 근본으로 삼는다(以無爲爲本)’는 결론에 다다랐다. “무(無)는 사물을 열고 사물의 본분을 완성시키며, 모든 곳에 두루 존재하는 것이다. 음양 또한 무에 의지하여 생긴다. 고로 무는 모든 것 중 가장 귀한 존재다.” 라는 자신만의 사상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하안은 《주역(周易)》, 《노자(老子)》, 《장자(莊子)》 등 삼현경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았고, 이 셋을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았다. 당시 유학자들은 이 삼현경을 모두 중시하여 연구하려는 경향이 있었으나 《주역》은 경시하는 풍조가 있었다.
하안은 철학의 방법론이 《주역》에 담겨있음을 알고 이를 높게 보았다. 《주역》은 음양(陰陽)을 논리적인 틀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는데, 여기서 음양의 운행으로 성립되는 ‘도(道)’는 이 세계를 설명하는 데에 유용했다. 하안은 《주역》이 갖고 있는 논리적 틀이 다른 경전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주역》의 ‘도’를 갖고 경전을 이해하고 해석하려 하였다. ‘도’는 곧 도가(道家), 즉 노자와 장자의 학문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므로 곧 그는 노장 사상을 유가의 경전에 대입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하안은 자신의 저서 《도덕론》에서 결국 공자와 노자의 주장은 일치한다는 결론을 설파하기에 이른다.
《논어》 〈선진〉편에는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안회(顔回)는 도에 가깝구나. 자주 텅 비어[空] 있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비어있다는 것은 먹을 것이 없다는 것으로 풀어, 공자가 제자 안회가 자신의 가난한 처지에 비관하지 않는 것을 칭찬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하안은 공(空)을 마음 속이 빈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마음을 비우지 않고서는 도를 알 수 없다는 이론과 함께하고 있는데, 이는 《장자》에서 말한 “도는 허심에 머문다. 이 허심이 곧 심재(心齋 : 마음을 비운다)이다.”라는 격언을 통해 《논어》를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논어》 주해자들은 하안의 해석을 채택하여 공자를 더욱 도가화하였다. 하안은 자신의 외모를 많이 가꾸어 이름이 났다. 얼굴에 분을 바르고 다니며 자신의 그림자가 으쓱대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이러한 것에 대해 당시 유명한 점술가 관로(管輅)는 “얼굴이 하얗고 걷는 것이 나무와 같은 하안은 귀(鬼)의 상으로 오래 장수할 상이 아니다”라고 평하였고, 이는 적중하였다.
稱爲 傅粉面, 職列宰官 宰官의 백화원문은 寒宮이다.
.
하안칭위 박분면 직열재관
하안은 분을 얼굴에 칠한 사람이라고 불리니 직위가 재상에 나열되었다.
王嬋臉帶 事(일 사; ⼅-총8획; shì)이 백화원문임
三顴, 董卓 董卓, 139년 ~ 192년 4월 23일)은 후한 말의 정치가이다. 자는 중영(仲穎)이다. 영제가 죽은 뒤, 190년 원소(袁紹) 등을 익주에 보내 놓고 어린 황제를 죽이고 헌제를 즉위시켰다. 정권을 잡은 그는 성격이 포악하여 백성들을 마구 죽였는데, 이로 인하여 원소가 일으킨 군대의 공격을 받았다. 그는 황제를 옹호하여 장안(長安)으로 도망했으나, 부하이자 양자인 여포(呂布)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동탁은 완력이 뛰어나 두 개의 궁대(弓袋)를 몸에 차고 말을 몰면서 어느 손으로도 활을 맘대로 쏠 수가 있었다고 한다. 반동탁 연합군은 오래가지 못하고 자연스레 해체되었지만 동탁의 전횡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192년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으나 동탁이 이 결혼에 대해 여포에게 화극을 던져가면서까지 반대하였으므로 여포는 동탁에 대해 극에 달하는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해 4월 이를 이용한 왕윤(王允)은 동탁의 심복 여포에게 그 시녀와 여포를 혼인시켜준다는 조건으로 꾀어내어 동탁 살해를 모의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왕윤이 양녀 초선(貂蟬)을 이용하여 ‘연환지계(連環之計)’로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았다고 쓰여있다. 이리하여 동탁은 선양과 관련된 회의에 참석하라는 전갈을 받고 궁궐에 들어갔다. 그 때 왕윤과 여포가 서로 짜고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에 칼을 들거나 말을 타고 알현할 수는 있지만 휘하병력을 이끌고 알현할 수 없다는 궁중규칙을 이용하여 황제의 호위병을 이용하여 동탁을 제지하였다. 이에 동탁은 호위병들에게 제지당한 후 황제의 조칙을 받은 여포에게 살해당한다. 동탁은 사망한 후 참수되어 동탁의 머리와 몸통이 따로 분리되어 장안성에 효수되었는데, 한 병사가 동탁의 영구 중에 뚱뚱한 몸의 배꼽에 불을 놓자 며칠씩이나 계속 탔다고 한다.
적은 수이긴 하지만, 동탁이 삼국지연의의 작가인 나관중과 역사가들에 의해 악의적으로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동탁이 중원 출신이 아니라 변방 서량 출신으로 중앙 최고 관직에 오른 것을 사람들이 시샘하였다는 것이 그 주 내용이며, 반동탁 연합군들도 모두 전통적인 권세가들이라는 것을 볼 때, 반동탁 연합군 자체도 신흥귀족에게 자리를 빼앗긴 기성귀족들이 권력을 되찾기 위해서 전쟁을 벌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반동탁연합군에 참가한 제후 중 한복(韓馥), 유대(劉岱), 공주(孔伷), 교모(喬瑁) 등은 동탁이 임용한 관리였다.
臍容七李.
왕선검대삼권 동탁제용칠리
왕선은 얼굴에 세 개 광대뼈가 있고 동탁은 배꼽에 7개 오얏이 들어갔다.
鬼谷子 鬼谷子)는 기원전 4세기에 전국시대를 살았던 정치가로 제자백가 중 종횡가(縱橫家)의 사상가이다. 그는 역시 종횡가에 속한 소진과 장의의 스승으로, 귀곡에서 은거했기 때문에 귀곡자 또는 귀곡 선생(鬼谷先生)이라 불렸다. 그의 이름과 성씨 및 향리까지 모두 알 수 없지만, 전설에 따르면 성(姓)은 왕(王)씨고 이름은 후(詡)로, 제(齊)나라(일설에는 초나라) 사람이라 전해진다.
귀곡자의 사상을 담은 책 또한 《귀곡자》라고 불린다. 이 책의 지은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귀곡자라는 설, 귀곡자의 제자인 소진(蘇秦)이라는 설, 그리고 육조시대의 일을 꾸미기 좋아하는 아무개라는 설 등이 있다. 다만 현존하는 형태로서의 책은 육조시대 사람이 귀곡자의 이름을 가탁해 엮은 것이다. 《귀곡자》에는 상대의 심리에 맞추어 그의 신임을 얻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고, 기회를 틈타 상대의 약점을 장악해서 그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붙잡아 둬야 한다는 내용도 있으며, 상대를 잘 위무해 그의 진심을 끌어내 확인함으로써 상황을 추측하고 파악해서 책략을 세워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 요컨대 《귀곡자》는 유세할 때 유의해야 할 사항들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론화한 중국 최초의 심리학 전문 서적이라 말할 수 있다.
露齒結喉, 採桑 숙류채상(宿瘤採桑)은 몽구(蒙求)라는 책에 나오는 일화이다. 숙류(宿瘤)는 태어날 때부터 혹이 달렸다는 뜻이고. 채상(採桑)은 뽕을 딴다는 말이다. 혹 달린 여자가 뽕을 딴 다는 뜻이다. 몽구의 저자는 당나라 때 이한(李翰)이 쓴 책이다. 몽구에 보면 고열여전(古列女傳)에 제나라 민왕(齊閔王)의 왕후는 혹이 있어서 혹부리라고 했다. 처음에 민왕이 백성들이 사는 것을 보려고 동곽(東郭)에 이르자 백성 들은 모두가 구경을 하였으나, 혹 달린 여자만은 뽕잎만 따 면서 왕도 쳐보지를 않았다.
왕이 생각해 보니, 그 여인의 행동이 좀 이상해서 물었다. “과인이 출유하자, 온 백성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구경을 하는데, 왜? 너는 나를 한번도 보지를 않는고?” 그러자 혹부리 여자가 대답하기를, “저는 뽕잎을 따라는 부모님의 가르침을 받았을 뿐, 임금님을 보라는 가르침은 받지 않았습니다.”
민왕이 말하였다. “이는 기특한 여자로다. 혹 달린 것이 애석 하구나” 그러자 여자가 말하였다. “천한 소첩의 소임은 두 가지가 아닐 뿐, 저의 본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무엇을 말할 것이며, 혹부리가 무슨 흉이 되겠습니까,” 왕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였다. “이는 현명한 여자로다.”
왕이 수레에 태우라고 말을 하자. 혹부리 여자가 말하였다. “부모님이 집에 계십니다. 소첩으로 하여금 허락을 받지 않고 임금님을 따른다면 이는 분녀(奔女)가 됩니다. 어찌 왕께서는 허락도 없이 쓰려고 합니까?” 왕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돌아갔다. 그 후 신하에게 예물과 금(金)이천 사백 냥을 가지고 가서 증빙토록 하니. 부모가 놀라 당황하여 몸을 깨끗이 씻게 하고 옷을 갈아입히려고 하였다.
그러자 혹부리 여자가 말하였다. 이대로 왕께 보이도록 합시다. 얼굴이 바뀌고 옷을 갈아입으면 왕께서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과 같이 하고 신하를 따라갔다. 왕궁에 도착하여 민왕에게 이르자, 그녀를 왕후로 삼았다. 왕이 영을 내려 궁실을 낮추고 연못은 메워버렸고, 반찬수도 덜고 음악도 줄였다.그리고 후궁에서도 호화스러운 장식을 못하게 하였다.
왕후를 얻는지 1년 사이에 교화는 이웃 나라까지 행해졌고, 제후들이 입조하게 되었다. 또한 삼진(三晉)을 침공하자 진(秦)나라 초나라도 두려워하였다. 혹부리 왕후가 있어서 그 힘으로 나라가 강국이 된 것이다. 혹부리 왕후가 죽고 난 뒤에 연나라가 제나라를 쳐들어 왔고, 민왕은 도망쳐서 외국에서 살해되었다.
女凹頭深目.
귀곡자노치결후 채상녀요두심목
귀곡자는 치아가 노출되며 울대뼈가 도드라지고 뽕나무를 따던 왕비는 꺼진 머리에 깊은 눈이었다.
皐陶 皐陶:중국 상고시대의 인물이다. 순임금의 신하로 형옥을 관장하였다. 자는 庭堅이라고 한다. 그러나 『路史』에서는 庭見은 高陽씨의 아들이고 고요는 靑陽씨의 후손이라 하여 庭見을 다른 사람으로 보고 있다. 『춘추좌씨전』의 주에서는 아버지 大業이 陶를 낳고 皐 땅에 봉하여졌으므로 皐陶라고 하였다 한다.
色爲削瓜 削瓜 [xiāoguā]:1) 참외의 껍질을 벗기다 2) 껍질 벗긴 참외 3) 껍질을 깎다
荀子 非相篇第五 :美惡形相,豈論也哉! 且徐偃王之狀,目可瞻馬。仲尼之狀,面如蒙倛。周公之狀,身如斷菑。皋陶之狀,色如削瓜。閎夭之狀,面無見膚。傅說之狀,身如植鰭。伊尹之狀,面無須麋。禹跳湯偏。堯舜參牟子。
, 莊周身似喬木.
고요색위삭과 장주신사교목
고요는 안색이 깍아놓은 참외와 같고 장주[장자]는 몸이 큰 나무와 같았다.
漢呂后 고황후 여씨(高皇后 呂氏, ? ~ 기원전 180년)는 전한 고조의 황후이며 전한 혜제의 어머니이다. 이름은 치(雉). 자는 아후(娥姁). 남편인 고조 사후, 황태후・태황태후가 되어, 여후(呂后), 여태후(呂太后) 등으로 불린다. '중국 3대 악녀'로 당나라의 측천무후, 청나라의 서태후와 나란히 이름을 같이 한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정식 황후이며, 또한 중국 최초의 황태후, 태황태후이기도 하다. 여황후가 다스리던 시대에는, 황족이나 공신들이 살해당하는 등, 정계에서는 피를 부르는 사건이 계속 되었던 시대였지만, 시정은 매우 평화롭고 안정된 시대였다. 이것은 여황후가 대외 원정등의 대사업을 극력 줄여, 국민의 생활의 안정에 진력했기 때문이다(특히 한신의 반란을 미리 막은 일은, 동시에 천하가 다시 분열되어 전쟁을 하게 되는 일을 막게 되어, 그 공적은 크다). 후의 문제와 경제에 의한 문경의 치 및 무제시대의 대원정을 필두로 하는 대사업의 정치·경제적 기초는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덧붙여 새롭게 후한에 걸친 동란때, 적미의 군대는 전한 황제들의 능묘를 도굴하여, 안치되고 있던 여황후의 사체를 더럽혔다. 광무제는 여치에게서 황후의 지위와 고황후의 칭호를 박탈하고, 문제의 생모인 박씨를 유방의 정실 부인으로 하여, 고황후의 시호를 추증했다.
陰毛過膝, 桃葉女媚眼橫波 橫波: 추파를 던지를 여인의 눈길
.
한여후음모과슬 도엽녀미안횡파
한나라 여태후는 음모가 무릎을 지날 정도로 길고 도엽녀는 고운 눈에 추파를 던졌다.
李牧 李牧:~ BC 228 전국 시대 조(趙)나라 사람. 오랜 기간 대(代)와 안문(雁門)에서 흉노(匈奴)를 방비했다. 날마다 군졸들에게 넉넉한 군량을 지급해 군심(軍心)을 얻었다. 말 타기와 활쏘기를 훈련시켜 출병해 흉노를 격파했다. 진(秦)나라가 대거 조나라를 공격하자 다음 해 비(肥)에서 대파하고,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졌다. 진나라 사신이 조나라 군주의 폐신(嬖臣) 곽개(郭開)에게 그가 반란을 꾀한다고 무고하여 참수당했다. 적이 침입하면 대항하지 않고 군민(軍民)을 철수시켜 성(城) 안으로 들어가 사기를 키우며 지키다가 상대가 태만해진 때를 노려 불의에 공격하는 작전을 써서 흉노를 물리쳤다.
神光射人, 重耳騈脅興霸.
이목신광사인 중이변협흥패
이목은 정신 광채가 다른 사람을 쏘고 중이공자[진문공]는 통갈비뼈로 패업을 이루었다.
孟子內養輕萬斛, 李嶠 李嶠(뾰족하게 높을 교; ⼭-총15획; jiào,qiáo) : 중국 초당(初唐)의 시인·재상(宰相)이다. 자 거산(巨山). 허베이성(河北省) 짠황(贊皇) 출생이다. 20세에 진사에 급제하였다
耳息享百齡.
맹자내양경만곡 이교이식향백령
맹자는 안으로 길러 만곡 녹봉을 경시하며 이교는 귀로 숨시어 백세를 누렸다.
鶴形龜息, 呂洞賓 呂洞賓: 八仙之四 팔대선인 중 한명 서기 750년경의 학자이자 은자인 그는 팔선의 수장격인 종리권으로부터 도교의 비밀을 배우고 나이 50에 신선이 되었다. 그는 이발사의 수호 성자이며, 병자들이 숭앙하였다.
得道成仙;
학형구식 여동빈득도성선
학의 형체와 거북처럼 숨쉬어서 여동빈은 도를 얻고 신선이 되었다.
龍腦鳳睛, 郭汾陽 郭子儀697 ~ 781:汾(클 분; ⽔-총7획; fén)陽王을 지낸 바 있어 세상에는 郭汾陽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백 명의 아들이 있다. 화저우[華州:陝西省] 정셴[鄭縣] 출생. 천보(天寶) 연간(742~756)에는 북경(北境) 방위를 맡아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 휘하에 있었는데,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삭방의 군사를 거느리고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이광필(李光弼)과 함께 중원(中原)의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756년에 숙종(肅宗)이 서북의 영무(靈武)에서 즉위한 후에는 황태자 광평왕(廣平王:뒤의 代宗) 밑에서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관군의 총지휘를 맡았으며, 위구르(Uigur:回紇)의 원군을 얻어 창안[長安]과 뤄양[洛陽]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공로에도 불구하고 환관(宦官) 어조은(魚朝恩) 등의 배척으로 한때 실각하였다. 그 후 대종의 광덕(廣德) ·영태(永泰) 연간에 토번(吐蕃:티베트)이 복고회은(僕固懷恩) 등과 연합하여 창안을 치려고 하자 다시 기용되어, 위구르를 회유(懷柔)하고 토번을 무찔러 당나라를 구하였다. 그의 무공은 비할 데가 없다고 칭송되어, 상부(尙父)의 칭호를 받고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졌으며, 당나라 최대의 공신으로서 영광을 누렸다.
出將入相;
용뇌봉정 곽분양출장입상
용의 뇌와 봉황의 눈동자로 곽분양은 나가면 장군 들어오면 재상이었다.
螣蛇 螣蛇:운무를 일으키며 몸을 감추고 난다고 하는 뱀, 土를 관장
螣蛇入口,项折而倒死街衢 입술을 잠근다는 의미로서 반드시 굶어죽게 된다. 한편 어지러운 금이 입가에 생겨나는 것도 굶어죽는 아류
鎖脣, 武帝 蕭衍, 464년 ~ 549년)은, 중국 남조 양의 초대 황제(재위:502년 - 549년). 자는 숙달(叔達).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무제(武帝). 남제 황실의 방계에 해당된다. 아버지의 순지(順之)는 남제의 고제 소도성(蕭道成)의 3종 형제이다. 소제의 6대 폐제(廢帝) 소보권(蕭寶卷;동혼후(東昏侯))은 황족에 그치지 않고 관료, 민중을 마구 죽이고, 궁전에선 과다한 사치을 하여 정치를 매우 어지렵혔다. 동혼후는 폭거를 저질러 많은 대신들을 살해하고,종족(宗族)인 소의(蕭懿)을 살해했다. 옹주자사로써 양양에 주둔하고 있던 동생 소연(蕭衍)은 형이 동혼후에게 살해당한 일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우고 병력을 일으켜 동혼후를 살해하고, 화제(和帝)를 옹립했으나 다음 해 502년 화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양나라를 건국했다.
그가 바로 남조 최고의 명군으로 칭송받은 무제(武帝)였다. 무제의 치세는 48년이란 긴 세월이었고, 그동안 내정을 정비하여 구품관인법을 개선하고, 불교를 장려하여 국내를 다스리고 문화를 번영시켰다. 대외관계도 비교적 평온하여 약 50년간 태평성대를 유지하여 남조 최 전성기를 보냈다. 또한 31살의 젊은 나이에 죽은 무제의 장남 황태자 소통(蕭統;소명태자(昭明太子))이 편찬한 《문선(文選)》은 후세에까지 전해지는 훌륭한 문헌이었다. 그러나 무제의 50년에 걸친 치세 후반에는 불교에 너무 심취하여 스스로 동태사(同太寺)에 여러 번 투신하는 무모한 행동을 여러 번 일으켰다. 그럴 때마다 신하들은 막대한 돈을 들여 무제를 되찾아 왔기에 국고가 크게 궁핍해졌다. 퇴위 후 법황의 신분이라면 모를까 재임 중에 황제를 잃어버리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548년 동위(東魏)의 무장이었던 후경(後景)이 투항해 왔다가 반란을 일으켜 수도 건강(建康)으로 진격해 다음 해 건강이 함락되고, 무제는 사로잡혀 쇠약해 죽었다. 각지에 분봉되었던 종실의 여러 왕들은 형제나 삼촌, 조카들이었기에 서로의 이득을 보고 견제를 한 결과 모두 황제의 구출에 나서지않아 무제가 죽는 걸 보고만 있었다. 후경은 간문제(簡文帝)을 옹립했다가 551년 간문제를 살해하고 예장왕 소동(豫章王 蕭棟)을 제위에 올린뒤 선양을 받아 황제에 올라 건강에서 즉위했다.
食絕臺城下;
등사쇄순 무제식절대성하
등사가 입술을 양무제는 대성 아래에서 음식이 끊어져 죽었다.
法令入口, 鄧通 등통:전한 촉군(蜀郡) 남안(南安, 지금의 四川 樂山) 사람. 『후한서』열전 권63 영행전(侫幸傳)에 나오는 인물이다. 당시 문제(文帝)의 총애를 받았지만, 무능(無能)했다고 한다. 문제가 총애해서 벼슬이 상대부(上大夫)에 이르렀으며, 동산(銅山)을 하사받고 주전(鑄錢)을 허가받아 그가 주조한 등씨전(鄧氏殿)이 세상에 유포되었다. 나중에 ‘등통’은 동전의 대칭(代稱)이 되었다. 관상을 보니 평생 가난할 팔자라고 하여 문제가 동전을 주조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지만, 결국 가난하게 살다 죽었다고 한다.
餓死野人家;
법령입구 등통아사야인가
법령이 입에 들어가니 등통은 야인의 집에서 굶어 죽었다.
亂紋主於口角, 當饑亡之亞夫 周亞夫:한(漢) 나라 문제(文帝) 때 흉노(凶奴)가 대거 침입하자 세류영(細柳營)에서 주둔했다가 흉노를 크게 물리친 장군. 그런데 만년에 경제(景帝)의 의심을 받아 구속되어 피를 토하고 죽었음. 충신의 비유로 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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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문왕어구각 당기망지아부
입가에 어지러운 주름이 있으니 주아부는 응당 굶어죽었다.
赤紋貫於瞳中, 是難封之李廣 李廣, 병음: Li Kuang - 기원 전 119년)은 중국 전한시대의 장군. 문제, 경제, 무제를 삼 대에 걸쳐 수행하였다. 무용이 뛰어나 평생을 흉노와 싸워왔지만 번번이 전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분사했다. 진의 명장 이신의 자손이다. 사촌동생으로 승상이 된 이채가 있다. 한 무제 때는 그를 천거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위위에 승진했다. 무제가 마 읍에 흉노를 유인하여 공격하려고 했을 때에는, 효기장군으로 종군했지만 공적은 세우지 못했다. 기원 전 129년 흉노와의 싸움에 패해 포로가 되었다. 그 후 탈출하여 장안으로 돌아왔지만, 죄를 추궁 당해 평민으로 강등당했다. 이후 우북평 태수로 복귀하여, 낭중령으로 옮겼다. 흉노와 자주 전투를 벌였지만 좋은 전과를 얻지 못하고, 기원 전 119년 흉노 침공 때에는 고령을 이유로 배제되었다. 이광은 격렬하게 항의해 간신히 참전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무제의 밀명을 받은 대장군 위청에 의해서 후방인 익수의 군으로 돌려졌다. 이광은 불복하여 다른 방면에서 진군 했지만, 우연히 길 안내가 없었기 때문에, 길을 잃어 흉노와의 싸움에 늦어 버렸다. 위청이 그것에 대해서의 보고서를 보내려고 이광의 부하를 힐문하자, 이광은 담담히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 흉노와 크고 작은 전투를 70여 차례 치렀다. 이번에도 위청대장군을 따라서 선우의 군사와 싸울 수 있을 기회를 가졌지만, 대장군 위청이 나를 후방 부대로 돌렸기 때문에 길을 잃고 우회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것이 천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외치고, 그대로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광의 부하 장교는 물론이고, 백성들도 남녀노소 없이 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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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문관어동중 시난봉지이광
적색 주름이 눈동자를 관통하니 이는 봉하기 어려운 이광이다.
漢高左股奇形, 七十二痣精華見;
한고좌고기형 칠십이지정화현
한나라 고조 유방은 좌측 넓적다리에 기이한 형체가 있으니 72개의 사마귀의 정화가 나타났다.
蒼頡 蒼頡(곧은 목 힐; ⾴-총15획; xié,jié):한자는 창힐이라는 신이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천계에서 지상으로 내려와서 새와 동물들이 남긴 발자국에 착안해 문자를 고안해냈다는 것이다. 창힐은 일반적으로 네 개의 눈을 가진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는 아주 예리한 눈빛으로 사물을 관찰해서 순식간에 그 특징을 파악, 도형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용안(龍顔)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창힐은 황제(黃帝)의 가신(家臣)이었다고 한다. 그가 문자를 완성하자 하늘에서는 오곡(五穀)이 떨어졌지만, 귀신은 울부짖고 용은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었다고 한다. 즉, 천계에서는 그의 업적을 칭송하고, 귀신과 용은 두려움에 떨며 탄식했다는 것이다. 이는 문자의 발명이 무지의 고통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四目相異, 億百萬字制作;
창힐사목상이 억백만자제작
창힐은 4개 눈에 모습이 기이하니 많은 문자를 제작했다.
昉 송나라 때 이방(李昉)이 편찬한 太平御覽
面方如田, 李仁安封侯拜相;
방면방여전 이인안봉후배상
이방[?]은 얼굴이 밭처럼 네모나며 이인안은 제후로 봉해지고 정승에 제수되었다.
狼顱 顱(머리뼈 로{노}; ⾴-총25획; lú)는 顧가 아닐까 한다.
面正, 司馬懿位極人臣;
낭로면정 사마의위극인신
이리 두개골로 얼굴은 바르면 사마의는 지위가 신하의 최고에 올랐다.
裴度 당나라 때 배도(裴度)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어릴 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의기소침했다.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일행(一行) 선사를 만났다. 대사는 배도의 얼굴을 보니 그의 눈빛이 겉으로 떠 있고 세로주름이 입까지 연결되어 밖에서 걸식하다 굶어죽을 상이었다. 때문에 배도에게 열심히 노력해 선을 닦으라고 권고했다.
며칠 후 배도는 향산사(香山寺)에서 한 부인의 옥대(玉帶)를 주워 주인에게 돌려주었고 그녀 부친의 생명을 구해주었다. 며칠 후 또 우연히 일행선사를 만났는데 대사가 보니 배도의 눈빛이 맑았고 얼굴 상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대사는 이에 장차 반드시 외직에 나가면 장군이요 들어오면 재상이 될 거라고 알려주었다. 배도는 일행선사가 자신에게 농담을 하는 거라고 여겼다. 일행선사는 “7척의 몸이 7촌의 얼굴만 못하고 7촌의 얼굴이 3촌의 코만 못하며 3촌의 코가 한 점 마음만 못하다.”라고 말하면서 그의 선행을 칭찬했다.
배도는 과연 헌종(憲宗), 목종(穆宗), 경종(敬宗), 문종(文宗) 4대에 걸쳐 조정의 중신이 되었다. 말 그대로 “문무를 겸비”해 당시 중국에서 공이 가장 높았으며 널리 사방에 명성이 퍼졌다. 사서(史書)에서는 그를 가리켜 “네 임금을 모시면서 시종 덕을 완전히 했으며”, “그 위엄과 명예가 곽자의(郭子儀 역주; 안록산의 난을 토벌하고 토번의 침략을 물리친 당나라 최고의 공신)와 비할만하다.”고 평가했다. 배도는 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들 명성이 혁혁했고 큰 업적을 남겼다.
位登宰官, 在還帶犀之德;
배도위등재관 재환대서지덕
배도는 지위가 재상에 오른 것은 무소뿔로 만든 대를 돌려준 덕이다.
叔敖 손숙오(孫叔敖)가 어린 아이였을 때, 나가서 놀다가 돌아와서는 근심에 젖어 먹지를 않았다. 그 모친이 그 까닭을 묻자 울면서 대답하였다. “오늘 저는 머리 둘 달린 뱀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을 것입니다.” 모친이 말했다. “지금 뱀은 어디에 있느냐?” 말했다. “저는 머리 둘 달린 뱀을 본 사람은 죽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다른 사람이 또 볼까봐 걱정이 되어 이미 그것을 묻어 버렸습니다.” 모친이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라. 너는 죽지 않는단다. 내가 듣기로, 陰德이 있는 사람은 하늘이 복을 내리신다고 한다.”
職位相位, 因享埋蛇之榮.
숙오직위상위 인향매사지영
손숙오의 직위가 재상에 이름은 몰래 불행을 주는 쌍두사를 묻은 영광을 누림이다.
呂望 呂望: 姜太公 강상은 염제신농황제(炎帝神農皇帝)의 51세손이요, 백이(伯夷)의 36세 손이기도 하다. 주나라 문왕, 무왕, 성왕(成王), 강왕(康王) 4대에 걸쳐 태사(太師)를 지냈으며 춘추전국 시기의 제(齊)나라의 창시자요, 딸은 주 무왕의 왕후이다. 때는 기원전 1046년 2월 겨울, 은나라 주왕의 흉폭한 정치가 계속되어 천하가 비탄에 젖어있을 시 홀연히 나타나 주 문무왕의 스승이 되어 4만 5천의 군사로 72만의 은나라군을 대파하는 기적적인 전쟁을 일구어낸 동이지사(東夷之士)이며 기인(奇人)이다. 이 전쟁을 목야전쟁(牧野戰爭)이라 하며 목야전쟁이 주는 의의는 적은 수로 많은 적을 섬멸한 기적의 전쟁이요, 아무리 불리하더라도 정의(正義)는 반드시 필승(必勝)한다는 정법을 확립시킨 정의 필승의 전쟁이며 대륙을 통일한 천하통일전쟁이라 할 것이다.이후 제나라를 일으켜 제1대 초대 국왕으로 제나라는 32대 근 800여 년을 존속하였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 무왕의 스승이자 장인이며 천하의 스승국의 위치로 군림하여 제나라의 왕이 되었다. 제나라의 2대 왕좌를 큰아들 강급(姜及)에게 물려주었고 강급은 제 정공(齊丁公)이라고 불렸다. 강태공을 이어 제나라가 가장 흥한 시기는 제 환공 강소백(姜小白)시기로 강소백은 춘추시대 첫번째 패자가 되기도 하여 강태공의 얼을 이었다. 제나라 최전성기에는 사방 5000리를 이룩한 대국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耳毫紅細, 貴壽無雙 无双 [wúshuāng]:1) 무쌍하다 2) 둘도 없다 3) 유일무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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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망이호홍세 귀수무쌍
여망이호홍세 귀수무쌍
강태공은 귀의 털이 홍색으로 가늘어 귀함과 장수에 최고가 되었다.
石崇석숭249 ~ 300: 자(字)는 계륜(季倫)이고, 어려서의 이름은 제노(齊奴)이다. 원적지(原籍地)는 발해군(渤海郡)의 남피(南皮, 지금의 허베이성 난피)이며, 청주(青州, 지금의 山東省 青州市)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위(魏, 220~266)의 장수로 서진(西晉, 265~316)에서 표기장군(驃騎將軍) 등의 관직을 지낸 석포(石苞)이다. 서진(西晉)의 무제(武帝, 재위 265~290) 때에 수무령(修武令)으로 관직을 시작해 성양태수(城陽太守) 등을 지내고 안양향후(安陽鄕侯)로 봉해졌다. 혜제(惠帝, 재위 290~306) 때에는 중랑장(中郎將), 형주자사(荊州刺史) 등의 벼슬을 하였다. 형주(荊州, 지금의 河南省 南陽市 일대) 자사(刺史)로 있으면서 항해와 무역으로 큰 부자가 되었는데, 〈진서(晉書)〉에는 "멀리 가는 상인과 상인을 위협하여 치부하였다(劫遠使商客 致富不貲)”고 기록되어 있다. 혜제(惠帝)의 황후인 가후(賈后, 256~300)가 조정에서 전권(專權)을 휘두르며 가씨(賈氏) 일족(一族)의 권세가 커지자 가후(賈后)의 조카인 가밀(賈謐, 277~300)과 가까이 지내며 이른바 '24명의 벗(二十四友)' 가운데 하나로 불렸다. 학문과 시에도 능통하여 문인(文人)으로서의 명성도 높았다. 6권으로 된 문집(文集)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에도 '사귀인(思歸引)', '사귀탄(思歸歎)' 등의 시가 전해진다.
석숭(石崇)은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는데, 〈진서(晉書)〉와 〈세설신어(世說新語)〉 등에는 황제의 인척인 왕개(王愷)와 부를 다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뤄양[洛陽] 서쪽에 금곡원(金谷園)을 지었는데, 집안을 매우 호화롭게 꾸며 뒷간도 화려한 옷을 입은 십여명의 시녀들이 화장품과 향수를 들고 접대하게 하여 손님들은 침실인 줄 알고 놀라 돌아올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금곡원(金谷園)에 관리와 문인들을 초대하여 주연(酒宴)을 자주 열며 풍류를 즐겼는데, 주연(酒宴)에서 시를 짓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벌로 세 말의 술을 마시게 하였다고 한다. 이 고사에서 '금곡주수(金谷酒數)'라는 말은 '술자리에서 받는 벌주'를 가리키게 되었다.
석숭에게는 녹주(綠珠)라는 애첩(愛妾)이 있었는데, 피리를 잘 불 뿐 아니라 악부(樂府)도 잘 지었다. 그는 녹주를 총애하여 '원기루(苑綺樓)' 또는 '녹주루(綠珠樓)'라고 하는 백장(百丈) 높이의 누각을 지었다.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 ?~301)의 측근이었던 손수(孫秀)가 녹주의 미색을 탐하였으나 석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300년(永康 원년) 조왕 사마륜이 가후(賈后)의 세력을 제거하고 전권을 장악하자, 석숭은 황문랑(黃門郞) 반악(潘岳)과 함께 회남왕(淮南王) 사마윤(司馬允, 272~300),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 ?~302) 등과 연합해 사마륜(司馬倫)을 제거하려 했다. 손수(孫秀)가 이를 알고 대군을 이끌고 금곡원(金谷園)을 포위하자, 녹주는 누각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였고, 석숭은 반악(潘岳) 등과 함께 사로잡혀 참수(斬首)되었다.
鼻孔圓收, 富豐第一;
석숭비공원수 부풍제일
석숭은 콧구멍이 둥글고 거두어져서 부유와 풍족함이 제일이다.
學堂既瑩, 岑 岑(봉우리 잠; ⼭-총7획; cén)의 백화원문은 岭(산 이름 령{영}; ⼭-총8획; lǐng)이다.
文夷詞章立顯;
학당기영 잠문이사장입현
학당이 이미 빛나니 잠문이의 글과 문장이 곧 빛났다.
蘭庭已滿, 範仲淹 范仲淹, 병음: Fan Zhongyan)(989년 - 1052년)은 자는 자는 희문(希文),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북송 때의 정치가, 문학가, 교육가이며, 쑤저우 저정 성 오현 사람이다. 989년 소주(蘇州)에서 태어나 서주(徐州)에서 거세(去世) (1052年)했으며 籍贯(적관)은 彬州(빈주)에서 행했다. 불행하게도 2세 때 부친을 여의었다. 모친도 어린 그를 데리고, 산둥 성의 지저우의 장산현 주씨 집안으로 개가를 하여 그의 이름도 '주설'로 바꾸었다. 이후 성장을 하면서 생가를 알아내고는 다시 제 이름을 찾았다.
인종은 그를 부재상에 임명했으며, 1043년 관리제도를 정비하여 인재를 양성하며, 무력을 강화하는 개혁조치를 제안했다. 인종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여 개혁안이 전국적으로 실시되게 된다. 이 정치개혁은 기원 1041-1048년까지에 7년간 실시되어, 이 개혁을 경력신정(慶曆新政)이라고 불렀다.
범중엄은 어렵게 자라, 출세한 뒤에도 부귀를 누릴 수 있었는데도 지독할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자나깨나 백성만을 생각했다고 전한다. 송대의 사대부 풍을 형성시킨 사람이요, 육경과 역경에 통달하였고, 항상 감사히 천하를 논하며, 자신을 뒤돌아보지 않았다고 전한다. 당시 사회는 워낙 부패하여 비록 범중엄의 개혁은 성공하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개혁에 자극을 받아 송나라 때의 가장 위대한 개혁가로 불리는 젊은 개혁가 왕안석(王安石, 1021년-1086년)은 그의 개혁을 이어받아 송나라 최고의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相業堪嘉.
난정이만 범중엄상업감가
콧볼인 난대와 정위가 이미 가득차니 범중엄의 재상의 업을 잘했다고 할만하다.
廉頗 廉頗: 춘추전국시대 조나라의 명장이다.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 장군에 못지 않은 완력을 보여 삼국지의 황충과 함께 중국의 대표적인 노익장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염파는 한 끼에 밥 한 말, 고기 열 근을 먹었으며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아직도 쓸모 있음을 보였다(一飯斗米肉十斤, 被甲上馬, 以示常可用)고 한다. 나이 80이 넘어서도 그의 용맹이 두려워 제후들이 조나라를 넘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豎天雙眼尾, 襄王當胸五花紋.
염파수천쌍안미 양왕당흉오화문
염파장군은 하늘에 두 눈썹꼬리를 드리우며 양왕은 가슴에 다섯가지 꽃 무늬가 있었다.
穀也下豐 叔服曰“穀也食子, 難也收子. 穀也豊下, 必有後於魯國.”於是閏三月, 非禮也. 先王之正時也, 履端於始:春秋
, 知其有後.
곡야하풍 지기유후
곡식은 아래가 풍부하니 그의 후손을 알수 있다.
樾椒形惡, 難免滅宗.
월초형오 난면멸종
월초는 형체가 나빠 종족을 멸망시킴을 면치 못했다.
軀七尺不如面一尺, 桑維翰臨鏡自奇 寄(부칠 기; ⼧-총11획; jì)가 백화 원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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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칠척불여면일척 상유한임경자기
7척의 몸이 1척의 얼굴만 못하다고 상유한은 거울에서 스스로 기이하게 여겼다.
八字紋兼有武字紋, 梁高帝奇徵 奇徵:기이(奇異)한 징조(徵兆)
貴極.
팔자문겸유문자문 양고제기징귀극
八(여덟 팔; ⼋-총2획; bā,bá)글자 주름에 武(굳셀 무; ⽌-총8획; wǔ)글자 주름이 있는 양나라 고제는 기이한 징조로 지극히 귀했다.
宋大珪口能容拳, 有神仙之狀, 歐陽公耳白過面, 振 享(누릴 향; ⼇-총8획; xiǎng,hēng,héng)의 원문은 振(떨칠 진; ⼿-총10획; zhèn)이다.
朝野之名.
송대규구능용권 유신선지상 구양공이백과면 진조야지명
송대규는 입으로 주먹이 들어갈만해서 신선의 모습이 있고 구양수공은 귀가 얼굴보다 희어서 조정과 재야에 명성을 떨쳤다.
前賢既有明徵 明徵 [míngzhēng]:1) 명증 2) 명징 3) 명백한 증거
, 後世焉得無相?
전현기유명징 후세언득무상
전대 현인이 이미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 후세에 어찌 관상이 없다고 하는가?
欲求所以, 宜鑒於斯.
욕구소이 의감어사
그렇게 된 까닭을 구하려거든 이를 거울삼아야만 한다


저자 프로필


저자 소개

저자 - 진담야
청나라 진담야

역자 - 홍성민
튼살 흉터 치료하는 이미지한의원 www.imagediet.co.kr 원장

목차

판권 페이지
비전십자면도
십이궁시결
전현신상고
전현신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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