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1세) 9월 7일(음력 8월 6일), 부친 김성도金性燾와 모친 장경숙張景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단리(일명 남산동) 569번지이나, 실제 태어난 곳은 외가인 평안북도 구성군 구성면 왕인동이다.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소월素月은 필명이다. 처음에는 이름을 정식珽湜이라고 지었으나, 후에 정식廷湜으로 고쳤다. 아명兒名으로는 ‘갓놈’(큰 아이, 상속자)이라 불렸다.
1900년
(8세)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에 소재한 남산南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5년
(14세)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5월 오산五山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조만식曺晩植이 오산학교의 교장이었으며, 은사 가운데 김억金億이 있었다. 이때 한시·민요·서구시 등을 본격적으로 접하며 시작詩作 수업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6년
(15세) 홍실단洪實丹(일명 단실丹實) 여사와 결혼하였고, 이후 2남 4녀를 낳았다.
1920년
(19세) 3월 《창조》에 〈낭인浪人의 봄〉을 비롯한 5편의 시를 발표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7월에는 《학생계》에 시작품 〈먼 후일後日〉 〈거친 풀 흐트러진 모래동으로〉 〈죽으면?〉을, 이어 10월에는 산문 〈춘조春朝〉를 발표하였다.
1921년
(20세) 오산학교 중학부를 졸업하였다.
1922년
(21세) 4월 배재培材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하였다. 김억의 주선으로 《개벽》에 〈금金잔디〉 〈황촉黃燭불〉 〈꿈〉 등 많은 시작품과 함께 소설 〈함박눈〉을 발표하였다.
1923년
(22세) 3월 배재고보를 제7회 졸업생으로 졸업하고, 4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상대 예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9월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10월경 귀국하였고, 이후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였다. 이 무렵부터 나도향 등과 어울리며 서울 생활을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4년
(23세) 김동인, 주요한, 김억, 전영택 등과 함께 《영대》의 동인으로 참가하여, 〈밭고랑 위에서〉 〈생生과 사死〉 〈나무리벌 노래〉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1925년
(24세) 5월 유일한 시론인 〈시혼詩魂〉을 《개벽》에 발표하였고, 12월에는 그가 생전에 발간한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을 매문사에서 상재하였다.
1926년
(25세) 처가가 있는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로 낙향하여, 8월부터 동아일보 구성지국을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이 지국 경영은 이듬해 3월까지 계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8년
(27세) 작품 창작과 발표가 현저하게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부터 실의에 빠진 듯 불면증에 시달리고 과음하는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1934년
(33세) 몇 년간 작품 발표가 뜸하다가, 이 해에 〈생生과 돈과 사死〉 〈제이, 엠, 에스〉 등 여러 편의 작품을 《삼천리》에 발표하였다. 그러나 12월 24일 오전 8시,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 자택에서 돌연 작고하였다. 묘소는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 터진 고개에 있다. 사망일시를 23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사인은 음독자살로 추정하기도 하나, 확실치는 않다.
1935년
1월 서울 종로에 있는 백합원에서 김기림·김동인·김동환·김억·박종화·박팔양·이광수·정지용 등 문인 백여 명이 소월을 추모하는 모임을 가졌다. 김억은 《조선중앙일보》(1. 22~26)에 〈요절한 박행의 시인 김소월의 추억〉을 쓰고, 《신동아》(2월)에 추모시를 발표하였다.
1939년
《여성》 《조광》 《박문》에 〈박넝쿨타령打令〉 〈늦은 가을비〉 〈기억記憶〉 등의 유고시들이 발굴 발표되었고, 12월에 김억이 편한 《소월시초素月詩抄》가 박문서관에서 간행되었다.
1948년
김억이 산호장에서 《소월민요선素月民謠選》을 간행하였고, 이후 여러 출판사에서 많은 종류의 김소월 시집을 펴내기 시작하였다.
1956년
《소월시집》이 정음사에서 간행되었다.
1966년
백순재·하동호에 의해 양서각에서 《못잊을 그사람》이 간행되었다. 200여 편의 시를 원본과 대조하여 펴낸 이 시집은 이후 소월시 텍스트 연구와 전집 발간에 초석이 된 것으로 평가된다.
1977년
《문학사상》(11월호)이 소월의 육필유고를 다량 발굴하여 《미발표 소월 자필 유고시집》을 게재하였다. 여기에는 20여 편의 창작시와 10편의 일문시, 영문시, 번역시가 포함되어 있다. 1982년 김종욱에 의해 홍성사에서 《원본 소월전집(상·하)》이 간행되었다. 이 책에는 원본 대조 작업을 거쳐 그때까지 알려진 소월의 전 작품이 수록되었고, 소월의 육필원고가 영인되어 실렸다.
1986년
문학사상사에서 소월을 기려 소월문학상을 제정하였다. 윤주은이 교문사에서 소월 시전집 《밧고랑우헤서》를 간행하였다.
1993년
전정구가 《소월 김정식 전집1·2·3》을 한국문화사에서 간행하였다.
1995년
오하근이 《원본 김소월전집》을 집문당에서 펴냈다.
1996년
김용직이 서울대출판부에서 《김소월전집》을 간행하였다.
2002년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각종 기념행사와 학술대회가 열렸고, 《현대문학》(8월호), 《시와 시학》(가을호) 등의 문예지에서 기획 특집을 마련하여 소월의 시세계를 재조명하였다.
2004년
《문학사상》(5월호)이 소월의 초기시 3편(〈서울의 거리〉 〈마주석磨住石〉 〈궁인창宮人唱〉)을 새로이 발굴 게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