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소개-
이상
이상(李箱, 1910년 9월 23일~1937년 4월 17일)은 일제강점기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며, 시인, 소설가, 수필가뿐만 아니라 건축가, 화가로도 활동했던 다재다능한 예술인입니다.
삶의 궤적
이상은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태어났으나, 3세 때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의 집으로 입양되어 자랐습니다. 엄격하고 냉정한 백부의 환경 속에서 성장한 그는 신명학교와 보성고보를 거쳐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부를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학창시절부터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유화 작품이 입선하기도 했습니다. 졸업기념 사진첩에서 처음 사용한 필명 "이상"은 친구 구본웅으로부터 받은 오얏나무 화구상자에서 유래했으며, 이것이 훗날 그의 정체성이 됩니다.
건축 기술자에서 문인으로
이상은 졸업 후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발령받아 건축 공무원으로 일하면서도 동시에 문학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30년 《조선》에 장편소설 《12월 12일》을 필명 이상 아래 연재하며 공식 등단했고, 건축 잡지 《조선과 건축》에 일본어로 쓴 시들을 발표했습니다. 1931년 폐결핵 진단을 받았으나, 이후 병의 악화로 1933년에 직무에서 물러났습니다.
구인회와 활발한 창작활동
1933년부터 이상은 서울 종로에서 다방 '제비'를 경영하며 본격적인 문학활동에 매진했습니다.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박태원 등 구인회의 핵심 동인들과 교류하면서 국문으로 된 작품들을 발표했습니다. 1934년 이태준의 주선으로 《조선중앙일보》에 시 〈오감도〉를 연재했으나, 표현의 난해함으로 인한 독자들의 항의로 15편에서 중단되었습니다. 이는 기존 문학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려는 이상의 실험정신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산촌여정〉의 의미
〈산촌여정〉(山村餘情)은 1935년경 폐결핵 요양을 위해 평안남도 성천에 머물렀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수필입니다.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취한 이 글은 서울의 도시 감수성을 갖춘 작가가 낯설고 이질적인 시골 풍경을 경쾌한 어조로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궁벽한 산촌의 일상을 도시인의 시각으로 관찰하며, 당시 조국의 정경을 생생하게 기록한 문학적 기행문으로 평가됩니다.
영향력 있는 작품들
이상의 주요 작품으로는 문법을 무시하거나 수학 기호를 포함하는 등 혁신적인 시도를 담은 〈오감도〉, 무기력한 남편과 절망적인 아내의 관계를 그린 소설 〈날개〉, 그리고 여러 수필과 단편들이 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발표 직후부터 난해하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동시에 한국 근대 문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비극적인 삶의 마무리
1936년 6월 이상은 변동림과 결혼하지만, 급속도로 진행되는 폐결핵으로 인해 같은 해 9월 요양을 위해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1937년 2월 도쿄에서 '불령선인'이라는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34일간 구금되는 고초를 겪었고, 이를 계기로 건강이 돌이킬 수 없게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1937년 4월 17일 도쿄 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멜론이 먹고 싶소"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26세(향년 28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상은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한국 근대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되며,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77년 이상문학상이 제정되어 현재까지 매년 시상되고 있습니다.
현진건
현진건(玄鎭健, 1900년 9월 2일~1943년 4월 25일)은 일제강점기 한국 근대문학의 사실주의를 개척한 뛰어난 소설가이자 언론인, 그리고 독립운동가였습니다. 본관은 연주 현씨이며, 호는 빙허(憑虛)라고 불렸습니다. 그는 20편의 단편소설과 7편의 중·장편소설을 남겼으며, 일제 지배 아래의 민족의 수난적 운명에 대한 객관적인 현실 묘사를 지향한 사실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대구에서의 유년 시절과 교육
현진건은 경상북도 대구에서 대한제국 말기 대구 우체국장을 지낸 아버지 현경운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역관 출신이 많은 중인 계급의 양반 가문이었으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신학문을 강조하는 개화적인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8살 때부터 당숙 현보운이 세운 대구노동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으며, 이후 일본 유학을 통해 새로운 문명의 세계를 경험했습니다. 그는 형 정건과 함께 독립운동의 정신을 공유하는 가족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으며, 1920년에 형 정건은 상하이에서 한인청년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문단 등단과 초기 창작
현진건은 1920년 11월 문예지 『개벽』에 「희생화」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처음에는 비평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지만, 1921년 1월 발표한 「빈처」와 같은 해 11월의 「술 권하는 사회」는 문단의 호평을 받으며 그의 재능이 인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술 권하는 사회」에서는 사회의 부조리를 알면서도 저항하지 못하는 나약한 지식인상을 날카롭게 풍자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그는 『백조』, 『조선문단』 등 여러 문예지를 무대로 활발한 창작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사실주의의 완성과 대표작
현진건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1924년 6월 『개벽』에 발표한 「운수 좋은 날」입니다. 이 단편은 영세 택시 운전사가 겪는 일상의 비극을 담백하고 정밀한 묘사로 그려냈으며,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사실주의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됩니다. 1926년 1월 『개벽』에 발표한 「사립정신병원장」은 물질적 빈곤을 겪는 주인공이 정신적으로도 파멸하고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되는 이야기로, 일제 강점기 하의 사회적 비참함과 인간 존엄성의 상실을 깊이 있게 다루었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현진건은 당대의 현실을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관찰하고 표현하는 스타일리스트로 인정받았습니다.
언론인으로서의 활동과 민족의식
1920년 조선일보에 입사한 현진건은 동명사, 시대일보를 거쳐 1925년 동아일보사에 입직했습니다. 1928년에는 동아일보 사회부장이 되어 신문사 편집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으며, 당시 사람들로부터 "제목을 붙이는데 진주 같은 제목명을 떨어뜨리는 재재"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1929년에는 신라의 고도 경주를 답사하고 그 기행문을 발표했으며, 1932년에는 단군의 전승이 남아있는 여러 지역을 다니며 「단군 성적 순례」를 저술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그의 깊은 민족주의적 의식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역사소설 창작과 말년의 고통
1930년대 후반부터 현진건은 순수 현실소설에서 벗어나 민족주의적 색채를 띤 역사소설 창작에 몰두했습니다. 1932년부터는 장편역사소설 「적도」를 연재했고, 1938년에는 「무영탑」, 1939년에는 「흑치상지」 등을 발표했습니다. 다만 그의 「흑치상지」는 일제 총독부의 검열과 탄압으로 58회만에 강제 중단되었고, 심지어 작품집 『조선의 얼골』도 금서로 지정되어 판매가 금지되었습니다.
1936년에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선수 손기정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말소하여 신문에 실은 사건으로 기소되어 1년간 복역해야 했습니다. 출옥 후 동아일보를 사직한 현진건은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며 양계장 운영과 투기사업에 손을 댔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러한 개인적 비극과 사회적 억압 속에서 그는 술에 의지하게 되었고, 혈압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짧은 생애의 마감
현진건은 1943년 4월 25일 서울 제기동의 자택에서 폐결핵과 장결핵으로 44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그의 동향이자 문우였던 시인 이상화도 대구에서 별세했습니다. 그가 남긴 문학적 유산은 후대에 크게 평가되어, 2009년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현진건 문학상'이 제정되었으며, 2005년 8월 15일에는 건국공로훈장 독립장(3급)이 추서되었습니다.
현진건은 진정한 의미의 사실주의 문학을 한국에 정착시킨 개척자로서, 그의 담백하고 정밀한 필체로 일제강점기의 피폐한 현실과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민중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