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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헤벨 Friedrich Hebbel

    프리드리히 헤벨 프로필

  • 국적 독일
  • 출생-사망 1813년 3월 18일 - 1863년 12월 13일
  • 학력 에를랑겐대학교 대학원 박사
    하이델베르크대학교

2015.10.27.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 프리드리히 헤벨
프리드리히 헤벨의 생애는 가난, 고통, 시련의 세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그의 일생의 노정들은 1835년 3월 23일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헤벨은 1813년 3월 18일 당시 덴마크에 속해 있었던 베셀부렌(디트마르센 지방)에서 가난한 미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1827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 헤벨은 교구 사무장 모어의 사무실에서 사환 겸 서기로 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배우가 되어 좁은 시골 마을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모어의 서재에서 독학으로 체계적이지는 않았지만, 작가로서 기본 교양은 쌓을 수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읽은 책들 중엔 자연 신비주의자 슈베르트(Gotthelf Heinrich Schubert)의 문집과 포이어바흐의 ≪죽음과 불멸에 관한 생각≫도 있었다.
지역 신문에 초기 시와 단편들이 실린 일이 계기가 되어 함부르크의 여류 작가 쇼페(Amalie Schoppe)의 지원을 받는다. 그녀는 헤벨이 대학 공부를 하도록 재정적 도움을 제공하는 등, 작가 생애에 첫 번째 후원자가 된다. 1835년 헤벨은 두 번째 후원자가 될 재봉사 렌징(Elise Lensing)을 알게 되어 오랫동안 동거인 관계를 유지하지만 1846년 결별한다. 헤벨보다 8년 연상인 그녀는 모성애와 같은 사랑으로 헤벨을 돌보며 그와 사이에 아들을 둘 낳지만, 아이들은 일찍 사망한다. 헤벨은 이 무렵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1863년에 사망할 때까지 이어지는 일기는 문학사적 기념비로 평가받는다. 그의 일기는 생애에 대한 자료 외에도 작품의 생성과 집필 동기에 대한 정보, 작품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담고 있다. 특히 칸트, 셸링, 헤겔, 쇼펜하우어 등의 철학에 대한 헤벨의 특별한 관심도 엿볼 수 있다.
1836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잠시 법학을 청강한 후, 뮌헨으로 옮겨 가서 그리스 비극, 셰익스피어와 실러의 드라마를 집중적으로 공부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1839년 경제적 사정까지 여의치 않아, 걸어서 뉘른베르크, 밤베르크, 하노버, 괴팅겐을 경유해 함부르크로 돌아간다. 3월의 혹독한 꽃샘추위에 자신의 개와 단둘이었다. 헤벨은 후에,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던 이 18일간의 여정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기간으로 회상한다. 여기서 완강하고 지칠 줄 모르는 기인의 모습이 드러난다.
함부르크에서 당시 구츠코브가 발행하던 ≪텔레그라프≫의 비평가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한다. 1840년 1월 <유디트>가 완성되어 7월 베를린 초연에서 성공을 거둔다. 이듬해 3월에는 <게노베바>를 완성한다. 이 두 비극은 인간의 본성과 숙명을 근본 모티프로 하고 있다. 특히 헤벨의 첫 번째 비극 <유디트>는 실러의 <오를레앙의 성 처녀>와 대비되고 클라이스트의 <펜테질레아>에서 영향을 받은 그의 출세작으로 평가된다. 헤벨의 <유디트>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여주인공의 적장 살해 동기다. 그녀는 홀로페르네스를 살해하는 순간, 신과 민족을 잊어버린다. 그녀는 민족의 적을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여자로서, 인간으로서 굴욕감을 안겨 준 남성에게 복수하는 것이다. 중세의 성녀 게노베바 전설에서 소재를 취한 <게노베바>는 작가에 의해 <유디트>의 2부, 또는 종결 작품으로 표현되었으며, <유디트>와 양극에 자리한 긍정적 극점으로 평가받았다. 또한 <유디트>에는 행동하는 희생자가, <게노베바>에는 고통을 겪는 희생자가 그려지고 있다고 했다. 세 번째 드라마 <다이아몬드>는 최초의 희극으로 재판 장면이나 등장인물 성격에서 클라이스트의 <깨어진 항아리>를 연상케 한다. 탐욕과 광기, 자본의 소유와 이데올로기 등이 드라마의 원동력이 되고 있으며 시대상을 투영하고 있다.
1843년 덴마크 왕실에서 받은 2년간의 여행 장학금으로 경제 문제가 해결되면서, 헤벨은 파리와 로마 등지를 여행한다. 파리에서는 하이네와 헤겔 철학 전문가인 밤베르크(Felix Bamberg)와 친교를 맺는다. 이 해 시민비극 <마리아 마그달레나>가 완성되어 다음 해 출간된다. 헤벨의 드라마 중 지금까지 가장 많이 읽히고, 가장 많이 공연된 드라마다. 헤벨은 이 드라마로 레싱의 <미스 사라 샘슨>과 <에밀리아 갈로티>, 실러의 <간계와 사랑> 등 기존의 시민비극을 개혁하고자 했다. 그는 소시민 가정의 편협성, 엄격하고 경직된 도덕관, 독선 등이 주제인 이 드라마에서 모든 철학적 성찰을 배제하고 그냥 일상의 모습을 그려 보이고자 했다.
헤벨은 드라마뿐 아니라 서정시로도 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시인으로 꼽힌다. 헤벨의 서정시는 자아와 세계에 대한 성찰, 삶에 대한 욕구와 죽음에 대한 동경의 대비, 개체와 우주의 합일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1842년에 첫 시집이 발표된 이후에 ≪신 시집≫(1848), ≪시 전집≫(1857)이 발간되었다. 1859년에는 7장으로 된 서사시 ≪어머니와 아이≫를 출판했다. ≪어머니와 아이≫는 가족과 부모의 행복에 관한 헤벨의 신앙고백과 같은 작품으로 사회 윤리 문제를 다루고 있다.
헤벨의 산문들에는 장 파울, 클라이스트, 호프만, 티크 등을 연상케 하는 비극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소설, 밤과 꿈 등 낭만주의 주제를 다룬 괴기소설들이 있지만 문학적 가치는 드라마와 서정시처럼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1845년부터 헤벨은 빈에 체류하면서 국립극장 여배우 크리스티네 엥하우스를 알게 되어 이듬해 결혼한다. 결혼 후 극작 활동도 활발해져 <시칠리아에서의 비극>과 <율리아>를 잇따라 발표한다. 나폴리의 한 카페에서 들은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시칠리아에서의 비극>은 경찰국가인 시칠리아의 상황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비판에 희극적 요소를 가미한 희비극적 드라마라 할 수 있다. 뒤이어 완성된 비극 <율리아>를 헤벨은 <마리아 마그달레나>의 2부라고 칭했다. 딸을 내쫓는 가혹한 아버지가 <마리아 마그달레나>와 연결되는 모티프다. 1848년 <헤로데스와 마리암네>가 완성되어 이듬해 빈 국립극장에서 초연된다. 사랑에서 비롯된 인간들의 과오와 오해를 다룬 혼인 비극이다. 전체 비극이 폭력과 투쟁, 그리고 죽음의 모티프로 채워져 있다. 크리스티네가 마리암네 역을 맡아 열연했지만,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1851년에 완성된 <아그네스 베르나우어>(1852년 초연)는 ≪니벨룽겐≫과 같이 ‘독일 비극’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헤벨은 이 비극을 ‘현대의 안티고네’로 명명했다. 개인의 자유와 사랑에 대한 요구, 전체를 위해 필요한 경우 개체를 희생시킬 수 있는 국가권력과 사이에 벌어지는 대립과 충돌을 다루고 있다. 1854년에는 극작가로서 원숙한 경지를 보여 주는 <귀게스와 그의 반지>가 완성된다. 리디아의 왕 칸다울레스, 그의 처 로도페, 그리고 그리스인 귀게스 사이의 남녀 관계를 다룬 비극으로서 고전적, 신화적 요소와 현대적 분위기가 혼합되어 나타난다. 작품의 주제는 지크프리트의 마법의 외투와 같은 반지에 의해 귀게스에게 자신의 육체가 노출된 로도페의 굴욕감이다.
1860년 헤벨은 5년여의 작업 끝에 중세 영웅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를 극화한 마지막 대작 ≪니벨룽겐≫ 3부작을 완성해, 1861년 바이마르에서 초연을 갖는다. 이 드라마로 헤벨은 임종의 자리에서 실러상을 받는다. 사망 직전 헤벨은 바이마르로 이주할 계획이었으나, 그곳 궁정의 음모와 신병(골연화증)으로 좌절된다. 1863년 실러처럼 <데메트리우스>를 탈고하지 못한 채 12월 13일 빈에서 사망한다.
그러면 여기서 헤벨의 주 장르라 할 수 있는 드라마, 특히 그의 비극론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헤벨의 드라마는 자신의 고난에 찬 생애에서 비롯된 염세적, 허무주의적 경향과 자아의 고독으로 특징지어지며, 주요 주제는 자아와 세계의 관계, 감정의 위기, 양성 간의 투쟁, 영적 고독 등이다. 헤벨은 1843년 ≪드라마에 관한 나의 의견≫에서 예술과 드라마에 대한 자신의 근본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드라마는 예술의 최고 형식이고, 비극은 다시 드라마의 최고 형식이다. 왜냐하면 드라마의 법칙이 세계 의지의 기초가 되고, 역사는 커다란 위기 때마다 항상 비극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의 비극에서는 개인의 주장과 신의 법칙, 인간적 욕구와 객관적 세상사 사이의 모순이 날카롭게 드러난다. 이와 관련해 헤벨의 범비극론(Pantragismus)이 등장하는데, 이는 모든 인간 존재와 현실은 비극적인 법칙에 지배를 받고 있어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갈등에 빠져들게 되어 있다고 보는 사상이다. 즉 인간 개개인의 자아실현 의지는 필연적으로 전체의 의지(세계의 의지)와 충돌을 일으키게 되며, 드라마 주인공의 죄 역시 자아의 독단적인 실현 및 확장 의지에서 비롯된다. 이렇게 개인의 의지가 세계의 의지와 충돌을 일으키면서 비극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헤벨 비극의 핵심은 개인의 의지와 세계의 의지, 개인의 법칙과 세계의 법칙 사이에 벌어지는 이원론적 대립이라 할 수 있다.

역자 - 김충남
김충남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본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뷔르츠부르크대학과 마르부르크대학교 방문교수, 체코 카렐대학교 교환교수를 지냈다. 1981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재직하면서 외국문학연구소장, 사범대학장, 한국독어독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의 시문학≫(공저), ≪민족문학과 민족국가 1≫(공저), ≪추와 문학≫(공저), ≪프란츠 카프카. 인간 도시 작품≫이, 역서로는 게오르크 카이저의 ≪메두사의 뗏목≫, ≪아침부터 자정까지≫, 페터 슈나이더의 ≪짝짓기≫,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헤르만 전쟁≫, 에른스트 톨러의 ≪변화≫, 프란츠 베르펠의 ≪거울인간≫ 등이 있으며 독일 표현주의 문학과 카프카에 관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명예교수로 <독일작가론>과 <독일명작산책>을 강의하고 있다.

<니벨룽겐> 저자 소개

프리드리히 헤벨 작품 총 8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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