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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희

  • 국적 대한민국
  • 출생 1952년
  • 학력 성균관대학교 사서교육원 학사
  • 경력 한국 문인 협회 회원
  • 수상 세종 아동 문학상
    한국 아동문학상
    1978년 중앙일보 소년 중앙 문학상 동화 당선

2015.02.27.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 이규희
1952년 9월 3일(음력), 그해 가을은 모처럼 따뜻했을 것이다. 6·25 전쟁으로 피란 갔던 사람들도 돌아오고, 전쟁은 이제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대신 길고 긴 휴전협정으로 치닫고 있을 때였으니까. 그날, 햇살 바른 이른 아침, 충청남도 천안 오룡동 한 허름한 집에서 여자아이 울음소리가 들렸으니, 그게 바로, 아버지 이계영과 어머니 강종춘 사이에 태어난 나였다. 하지만 난 참으로 타이밍을 잘 맞춰 태어나지 못했다. 위로 언니와 오빠가 죽고 세 번째로 태어나고 보니, 이미 아버지는 첩과 딴살림을 차린 뒤였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없는 셈이었다. 어린 시절, 오죽 여자가 못났으면 남편을 빼앗기기나 하고, 엄마를 참 많이 원망했다. 하지만 어느 날 점쟁이가 “당신 팔자에 엄마가 둘이구먼!”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엄마 때문이 아니라 내 팔자 때문이라는 걸 알았고 그때부터 엄마에 대한 미움보다 미안함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태어난 나는 오룡동을 떠나 천안 삼거리로 이사를 가서 대여섯 살까지 살았는데, 그 무렵 능수버들이 휘휘 늘어진 신작로 위를 날마다 먼지를 뽀얗게 날리며 달려가는 미군 트럭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초콜릿이나 사탕을 얻어먹던 아이들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용한 한의사인 아버지 덕에 집안 살림은 나날이 좋아져 엄마와 나, 남동생, 할머니는 천안중학교 근처 번듯한 집으로 이사를 갔다. 그러나 그런 행복도 잠시뿐이었다. 천안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채 3학년이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노름과 방탕한 생활 끝에 모든 재산을 잃고는 우리를 첩첩산중인 강원도 황지(태백), 영월로 끌고 다녔으니까.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아버지에게 감사한 마음뿐이다. 그 시절 내가 본 험한 산과 탄광촌, 동강, 단종 유적지며 그때의 그 황량하고 쓸쓸했던 상실의 경험들이 내겐 두고두고 동화의 씨앗이자 근원이 될 정도로 깊은 영향을 미쳤으니 말이다.

그 후 나는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상경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강원도에서 공부를 잘한다고 해도 일류중학교는 어림없었다.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보광동 작은집으로 가자, 작은아버지는 집에서 걸어 다닐 수 있다는 이유로 ‘보성여자중학교’에 원서를 내게 하였다. 그리하여 나의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친척집을 전전하며 지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마침내 아버지는 어차피 영월에서도 두 집 살림을 하는 판이니 그 참에 엄마와 동생들까지 서울로 올려 보냈다.
엄마와 나, 두 동생, 네 식구의 서울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순천향병원이 내려다보이는 한남동 언덕배기, 그곳에 방 한 칸을 얻어 시작한 서울 생활은 만만치가 않았다. 그 무렵 한 달에 한 번쯤 영월에 있는 아버지께 생활비며 학비를 달라는 편지를 써야만 했는데, 나는 그게 죽기보다 싫었다. ‘이러고저러고 해서 이번 달에는 돈이 얼마가 필요합니다’라는 편지를 받기 전에 돈을 보내 주면 좋으련만, 그쪽 식구 살기도 바쁜 탓에 언제나 우린 뒷전이었다. 그러다 처음에는 꼬박꼬박 돈을 보내 주던 아버지는 점점 돈을 보내는 시기가 뜸해졌다. 양쪽 살림을 책임져야 하는 게 버거운데다, 아버지 자신도 점점 살아가는 일에 지쳐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더니 급기야 학비는커녕 생활비조차 보내 주지 않았다. 변변한 재주가 없던 엄마는 종이봉투를 붙여서 우리를 먹여 살려야만 했다. 백 장, 천 장, 만 장, 엄마가 붙이는 종이봉투만큼 엄마의 손은 갈퀴처럼 변했다. 나는 좁은 단칸방에서 딸의 눈치를 보며 풀을 붙이고 봉투에 끈을 꿰던 엄마를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무지렁이 같던 엄마가 암탉처럼 우리 삼 남매를 날개 밑에 품고서는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도 안쓰러웠고, 나는 어떻게든 그런 엄마를 도와줘야만 했다.
그러던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우리 반에 눈이 크고 키가 껑충하게 큰, 송월주라는 중국 아이 하나가 전학을 왔다. 화교인 그 아이는 어차피 한국에서 살아가려면 한국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부모의 뜻에 따라 우리 학교에 온 아이였다. 담임선생님은 내게 그 아이한테 한글을 가르쳐 주는 일을 맡겼다. 지금은 잊었지만 한 달에 얼마인가의 돈을 받고 하는 아르바이트 자리였다.
나는 학교가 끝나고 소공동에 있는 그 아이의 집으로 갔다. 아래층은 중국 음식점을 하고 살림집이 2층에 있었는데, 유난히 고양이를 싫어한 나는 대여섯 마리의 고양이가 두 눈을 반짝이며 여기저기 웅크리고 있고, 울긋불긋한 빨간 헝겊으로 치장한 그 집 계단을 올라갈 때면 저절로 죽고만 싶었다. 제발 누군가 나를 위해 하늘에서 튼튼하고 질긴 새 동아줄 하나만 내려 줬으면 소원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겨우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담임선생님의 설득에 나는 본교인 보성여자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여, 3년 내내 도서 부장 노릇을 하며 학비를 벌었다. 하지만 졸업을 하던 1972년, 그해 봄은 내겐 세상에서 가장 슬픈 봄이었다. 온 천지에 봄이 오고 친구들이 화사한 옷을 입고 대학에 들어가는 걸 그저 묵묵히 지켜봐야만 했으니까. 당장 취직을 해서 동생들 학비며 생활비를 벌어야만 했던 내겐 대학은 가당치도 않았다.
나는 누군가 사람을 만나는 것도 피한 채 일자리를 찾아다녀야만 했다. 그러나 국어 선생님이 소개해 준 과외 선생 자리 외엔 내가 갈 만한 곳이 없었다. 은행에 가자니 유난히 셈이 약해 주산은커녕 암산도 못하는데다 그럴 만한 백도 없었다. 또 간호 보조사를 하려 해도 겁이 많아 주삿바늘 하나 꽂지 못하고 피를 보면 기절할 게 뻔했다. 그렇다고 어느 가게에 나가 점원 노릇을 하자니 참으로 성에 차지 않았다. 공부하고 책 읽고, 글 쓰는 재주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게 한없이 절망스러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 당시 미도파백화점 옆에 있던 국립중앙도서관에 나가 책을 읽는 게 일이었다.
그러던 이듬해인 1973년 봄이었다. 당시 사서 교사가 없던 모교에서 내게 ‘도서관’을 맡아 운영하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기꺼이 그 일을 맡았다. 그 후 1년이 지나자 도서관 운영에 관한 초보 지식밖에 없었던 나는 일의 한계를 느끼고 문교부에서 주최하는 ‘사서 강습’을 받았다. 그러다가 또다시 길이 열려 ‘성균관대학교 사서 교육원’에 들어가 정식으로 도서관학을 공부했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 시절, 모교에서 나를 불러 주지 않았다면 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갔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어쩌면 지나친 감수성과 자포자기로 <별들의 고향> 경아처럼 흰 눈이 내린 벌판에 누워 서서히 죽어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현실 속의 나를 잊고 싶은 마음에 어느 극단에 들어가 무명 연극배우가 되었거나, 어느 관공서에서 서류 더미에 묻혀 늙어 갔을지도 모르고.

어느덧 내 나이 스물여섯 살이 되었다. 어느 날 우연히, 국립중앙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던 시절 눈인사를 나눴던, 법대 출신의 가난한 고시생을 만나게 되었다. 그 후 몇 번을 만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아, 잘하면 나도 판사 부인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웬걸, 내가 얼마나 헛똑똑이인가! 합격하는 사람보다 떨어지는 사람이 많은 게 고시라는 걸 미처 몰랐으니. 내 복에 판사 부인은 이미 물 건너갔고, 나는 말단 공무원인 박남길과 1977년 7월 16일 경동교회에서 결혼을 했다. 하지만 하얀 꽃관을 쓴 채 화사하게 웃던 스물여섯의 신부와 엉겁결에 딸을 시집보내게 된 엄마는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결혼식 비용을 아끼기 위해 하객으로 온 학교 은사, 동료 교사, 친구들, 후배들에게 밥조차 대접하지 않았으니. 내 인생에서 그보다 더 낯 뜨겁고, 슬프고, 속상한 사건이 또 있을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만약 그때 오신 하객들을 지금이라도 모두 초대할 수만 있다면 근사한 식당에서 맛있는 밥 한 끼 대접하고픈 마음이 간절할 뿐이다. 그 후 학교를 그만두던 날이며, 몇 년 전 개교기념일 행사에서 ‘모교’를 빛낸 졸업생으로 뽑힌 날, 밥을 대접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마음의 빚은 사는 동안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
아무튼 막상 결혼을 하고 보니 어깨의 짐을 덜기는커녕 혹 떼려다 혹 하나를 더 붙인 꼴이었다. 가난한 집 장남과 장녀가 만났으니 늘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았으니까. 그래도 우린 1978년 11월 8일, 사랑하는 딸(박가영)을 낳고는 성실하게 살았다.
아동문학에 발을 디딘 것도 바로 1978년 그해였다.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훗날 ≪혼불≫을 쓴 최명희 선생과 날마다 도서실에 붙어 앉아 문학 이야기를 하며 울고 웃던 때였다. 어느 날, ≪중앙일보≫에서 ‘소년중앙문학상’을 모집한다는 기사를 본 순간, 문득 강원도 황지(태백) 연화산의 조그만 암자에서 혼자 사방치기를 하던 아이가 떠올랐다.
‘그 아이에겐 엄마가 없을 거야. 그러니 내가 동화 속에서라도 엄마를 만나게 해 주자.’
신문 기사를 보는 순간 동화적인 상상력이 마구 떠올랐다, 마침내 그 아이를 주인공으로 해 쓴 <연꽃등>이 ‘운 좋게도’ 덜컥 당선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이 얼마나 ‘운 나쁜 일’인지를 나중에 알게 되었다. 다른 작가들은 이미 등단 전부터 동화 공부를 꾸준히 해 오고, 원고지가 자기의 키를 넘길 만큼 습작 동화를 썼다는데, 단편 소설 몇 개 끄적거린 게 전부인 난 동화가 뭔지 알지도 못했으니까. 하지만 심사위원장이었던 이원수 선생님, 박홍근 선생님을 비롯해 여러 문단 어른들을 만나고, 아동문학인 협회의 간사를 맡으며 나는 점점 동화와 가까워졌고, 점차 동화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고 말았다.
그렇게 하여 나는 과분하게도 ‘70년대 작가’의 자리에 올라, 어느덧 등단 30여 년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비록 대표작이라고 선뜻 내놓을 만한 작품은 아직 쓰지 못했지만, 그동안 ≪대장이 된 복실이≫, ≪아빠나무≫, ≪깔끔이 아저씨≫, ≪열세 살에 만난 엄마≫, ≪난 이제부터 남자다≫, ≪아버지가 없는 나라로 가고 싶다≫, ≪두 할머니의 비밀≫, ≪어린 임금의 눈물≫, ≪흙으로 만든 귀≫, ≪왕비의 붉은 치마≫ 등 여러 권의 동화책을 냈다. 또한 그동안 ‘한국동화문학상’, ‘한국아동문학상’, ‘어린이문화대상’, ‘세종아동문학상’, ‘이주홍문학상’, ‘방정환문학상’ 등 여러 상을 받았다.
문득 돌이켜 보면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동화 작가로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고, 서로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문단 선배, 동료, 후배 작가들이 늘 내 곁에 있으며, 판사가 아닌 남편과도 올해로 결혼 32주년이 되도록 여전히 잘 살고 있고, 하나뿐인 딸도 자기 길을 열심히 걸어가고 있으며, 2011년 김지훈과 결혼해 아들 민재를 낳았으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까. 게다가 누더기 이불처럼 이리저리 덧대어 꿰맨 나의 불행들이 사실은 동화 작가인 내겐 보물단지며 빛나는 보석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
그저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좋은 동화를 쓰고, 여러 문우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며, 틈틈이 뒤늦게 취미로 시작한 그림을 그리고, 다리에 힘이 빠지지 않을 때까지 여기저기 여행할 만큼의 건강과 여유가 있기를, 그래서 더도 덜도 말고 지금처럼만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작품 및 수상 연보

1978년 <연꽃등>이 소년중앙문학상에 당선되어 동화작가가 됨(심사위원 이원수).
1994년 ≪앉은뱅이 꽃의 비밀≫(예림당) 출간.
1995년 ≪뱅뱅이의 노래는 어디로 갔을까≫(성바오로출판사), ≪구름 위의 큰 새≫(중앙M&B) 출간.
1997년 전래동화 ≪해와 달이 된 오누이≫(보림) 출간.
1999년 방송통신대 일본학과 3학년 편입, ≪아빠 오늘 이야기 뭐야?≫(한국어린이교육연구원) 출간.
2000년 ≪대장이 된 복실이≫(예림당), ≪아빠나무≫(한국어린이교육연구원), 유아 동화 ≪엄마 엄마, 이야기해 주세요≫(보림) 출간.
2001년 ≪우리 집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왔다≫(중앙출판사), ≪참 이상한 달리기≫(문공사), ≪깔끔이 아저씨≫(현암사) 출간.
2002년 한국방송통신대학 일본학과 졸업, 국어 5―2 읽기에 <아빠 좀 빌려주세요> 수록, ≪난 이제부터 남자다≫(세상모든책) 출간, ≪난 이제부터 남자다≫로 제35회 세종아동문학상 수상.
2003년 ≪아버지가 없는 나라로 가고 싶다≫(푸른책들) 출간.
2004년 ≪어린 임금의 눈물≫(파랑새어린이), ≪두 할머니의 비밀≫(주니어김영사), ≪내 동생 별희≫(두산동아), ≪아빠의 앞치마≫(교학사) 출간, ≪어린 임금의 눈물≫로 제24회 이주홍문학상 수상.
2005년 ≪울어 버린 애국가≫(밝은미래) 출간.
2006년 ≪열한 살에 천사가 된 아이≫(대교출판) 출간.
2007년 ≪흙으로 만든 귀≫(바우솔), ≪아빠 좀 빌려주세요≫(푸른책들), ≪오늘은 내가 아빠야≫(은하수미디어), ≪심부름 온 삐삐천사≫(기탄출판) 출간, ≪흙으로 만든 귀≫로 제17회 방정환문학상 수상.
2008년 그림 동화 ≪부엌 할머니≫(보림), 그림 동화 ≪가을이네 장 담그기≫(책읽는곰), 그림 동화 ≪내 연필 어디 갔지?≫(지경사), ≪내 짝꿍 김은실≫(좋은책어린이) 출간.
2009년 ≪왕비의 붉은 치마≫(계림북스), ≪도깨비 언니가 왔어요≫(아리샘주니어), ≪너는 나쁜 친구가 아니야≫(홍진P&M), ≪엄마를 구합니다≫(청어람주니어) 출간.
2010년 ≪떴다, 도깨비 오형제≫(그린북), 그림 동화 ≪꽃신 신고≫(와이즈와이), ≪그리스 로마 신화보다 재미있는 세계사 100대 일화≫(삼성출판사), ≪조지 할아버지의 6·25≫(바우솔), ≪모래시계가 된 위안부 할머니≫(네버엔딩스토리) 출간, ≪왕비의 붉은 치마≫로 제14회 한국가톨릭문학상 수상.
2011년 ≪큰 기와집의 오래된 소원≫(키위북스), ≪아버지, 계백≫(MBC씨앤아이), ≪어린이를 위한 절약≫(위즈덤하우스) 출간.
2012년 ≪사람을 품어 나라를 세우다≫(스푼북), ≪유행어보다 재미있는 우리 100대 속담≫(삼성출판사), ≪모래시계가 된 위안부 할머니≫(푸른책들) 양장본, ≪모래시계가 된 위안부 할머니≫(일본 나시노키샤) 출간.
현재 한국아동문학인협회,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해설 - 전명희
1957년에 대구에서 태어나 아직도 대구에 살고 있는 토박이다. 경북여자중학교와 경북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5년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재학 때 영남대 신문사 기자 활동을 하면서 문화, 평론 부문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대학 졸업 후, 대구 구남여자중학교 국어과 교사로 재직했다. 그러던 중 학문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해 1984년 영남대학교 일반대학원 국문학 석사학위를, 1998년 영남대학교 일반대학원 국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논문을 쓰면서 우리나라 아동문학과 청소년 문학에 대한 연구가 미진함을 깨닫게 되었고 1998년 아동문학 평론가로 등단했다.
2012년 현재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책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최서해 소설 연구>, <한국 근대 소년소설 연구>, <현덕 소설의 일고찰>, <근대 소년소설에 나타난 성장담>, <영상 예술 사조 속의 아동문학>, <해리포터를 통해 본 아동문학의 대중성>, <황선미론>, <동화와 만화의 바람직한 접목>, <청소년 문학의 정체성>, <남북한 문학 속에 투영된 여성미 비교 고찰>, <표현주의 관점에서 본 <날개>, <현대 청소년 소설의 다양한 미학성> 외 다수가 있다.

<이규희 동화선집>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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