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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나 신부 상세페이지

메시나 신부작품 소개

<메시나 신부> 실러는 ‘메시나 신부’를 통해 그리스 고전 작품의 형식과 내용을 18세기 독일 연극 무대에 옮겨 놓았다. 그 때문에 당시에는 부정적인 평가를 피할 수 없었지만 현재에는 실러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실러는 <군도>로 18세기 독일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며 독일의 셰익스피어로 부상했다. 그러나 그리스 고전 비극의 형식과 내용을 담은 ‘메시나 신부’는 냉담한 평가를 받았다. 브렌타노는 이 작품을 ‘속속들이 지루하고, 기괴하고 웃기지도 않는 한심한 졸작’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메시나의 영주가 죽고 영주 부인인 이사벨라는 반목 중인 두 아들을 메시나로 불러들인다. 이들을 화해시켜 통치를 이어 나가기 위해서다. 두 아들은 각자 사랑에 빠져 있다. 사랑에 들뜬 마음은 오랜 마음의 골을 메우게 되고 이들은 이사벨라가 보는 앞에서 극적으로 화해한다. 이사벨라는 이제 모두에게 숨겨 왔던 비밀을 털어놓는다. 이사벨라는 태어나자마자 죽을 운명이었던 여자아이 하나를 몰래 낳아 숨겨 키웠던 것이다. 그때 이 비밀을 유일하게 알고 있었던 이사벨라의 충직한 신하 디아고가 등장해 불길한 소식을 전한다.

<메시나 신부>는 형제간의 갈등, 증고, 질투, 사랑, 근친상간, 결투, 살인, 죽음, 화해 등을 주제로 하고 있다. 소재 또한 소포클레스나 에우리피데스의 그리스 비극에 부합한다. 한 인물의 잘못이 전체 가문의 몰락을 가져 온다는 그리스 고전 비극의 틀에서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실러는 이 작품을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범주에 가두어 놓지 않고 살아 있는 우리 인간들의 문제로 그려 냄으로써 시간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대적 문제를 다룬다. <메시나 신부>가 고전극의 형식과 내용을 따르고 있지만 현대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저자 프로필

프리드리히 폰 실러 Friedrich von Schiller

  • 국적 독일
  • 출생-사망 1759년 11월 10일 - 1805년 5월 9일
  • 경력 예나대학교 역사학 객원교수

2015.03.10.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소개

저자 -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폰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 1759∼1805)는 독일 고전주의 극작가이자 시인, 철학자, 역사가, 문학이론가이다. 독일 남서부 뷔르템베르크 주의 마르바흐의 하급 군인의 집에서 태어났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신학을 전공해 목사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영주(領主)인 카를 오이겐 공작의 명에 따라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처음엔 법학을 공부했으나 의학으로 전공을 바꾼 그는 졸업 후 슈투트가르트에서 하급 군의관이 됐다. 그 후 사관학교를 졸업한 군인으로서 슈투트가르트 연대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학생 시절에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유에 대한 동경이 싹터 저작에 몰두했는데, 자비 출판한 첫 작품 <군도>가 1782년 1월 13일 만하임에서 성공적으로 초연된 것을 계기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후 공작의 저술 금지령을 피해서 그는 1782년 9월 22일 밤에 만하임으로 도주한다. 도피 방랑 생활을 하면서 <피에스코의 반란>(1783), <간계와 사랑(Kabale und Liebe)>(1784)을 썼다. 한때 만하임 극장의 전속 작가가 되었으나 중병을 앓고 사퇴한 후 쾨르너의 도움으로 <돈 카를로스(Don Carlos)>를 완성했다. 1787년에 네덜란드 독립사를 연구, 인정을 받아 1789년에 예나 대학의 비정규직 교수가 되었다. 그 후 미학, 철학, 역사에 관한 논문을 잇달아 발표하여 생활의 안정을 얻고 역사와 미학 강의를 했지만 학생 수의 감소와 신병으로 얼마 후 사직했다. 1794년부터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친분을 나누었고, 같이 ≪크세니엔(die Xenien)≫이라는 시집을 내기도 했다. 이들은 자주 만나서 문학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많은 서신을 교환하며 공동 작업을 했다. 특히 1802년에는 실러가 예나에서 바이마르로 이사를 해 이들의 친교와 공동 작업은 더욱 강화됐다. 1799년경부터 3부작 <발렌슈타인>, <마리아 슈투아르트(Maria Stuart)>(1800), <오를레앙의 성 처녀(Die Jungfrau von Orleans)>(1801), <메시나 신부(Die Braut von Messina)>(1803), <빌헬름 텔(Wilhelm Tell)>(1804) 등의 대표작을 써서 괴테와 견주는 대작가가 되었다. 희곡의 대부분은 운명과 대결하는 의지의 힘을 묘사한 것으로 그리스 고전극 정신의 재생을 지향하고 있다. 1805년 5월 9일 오랫동안 앓던 지병으로 바이마르에서 사망했다. 대표 희곡으로 ≪군도≫(1781), ≪발렌슈타인≫ 3부작, ≪마리아 슈투아르트≫, ≪오를레앙의 성 처녀≫, ≪간계와 사랑≫(1784), ≪빌헬름 텔≫(1804) 등이 있다.

역자 - 이재진
나는 단국대학교 독문학과에서 독일 문학 특히 독일 희곡, 독일 연극 등을 주로 가르쳤다. 더구나 1998년부터 한국브레히트학회를 2년 동안 이끌었으니 나는 독문학자다. 1960년대 말, 1970년 대 초 레싱(<미나 폰 바른헬름>), 뷔히너(<보이체크>), 뒤렌마트(<로물루스 대제>) 등의 많은 작품을 무대에 올렸으니 나는 연출자다. ≪월간 중앙≫과 같은 정기간행물에 1990년대 한동안 정기적으로 연극 평을 쓰며 이 작품 저 작품, 이 사람 저 사람과 시시비비를 가렸으니 나는 연극 평론가다. 여러 해 동안 극단 ‘프라이에 뷔네’, 극단 ‘우리극장’을 운영하며 이끌어 왔으니 나는 연극 경영인이다. 몇 년 전에 <미망인>이라는 작품을 각색해서 공연했고, 금년에는 <펜테질레아 2011>이라는 진한 작품을 하나 썼으니 나는 극작가다. 그렇다고 연출가로 극작가로 비평가로 연극 경영인으로 크게 행세한 적도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다. 하지만 오랫동안 실러, 클라이스트, 브레히트, 베데킨트, 뒤렌마트 등의 여러 작품을 번역하느라 애를 썼으니 나는 무엇보다도 번역자라 함이 옳을 것이다.
그래, 나는 일생을 번역에 전념해 왔다고 말하고 싶다. 1965년 제대하고 복학한 후 극단 ‘가교’에 들어갔다. 공연할 때 음향효과나 소도구 등 무대 뒷일을 맡았지만 나의 주된 업(임)무는 번역작업이었다. 주로 영미 작품을 번역해서 극단에 공급했다. 사실 그때 나는 제법 셰익스피어의 전문가라고 자처할 때였다. 오셀로나 로미오의 웬만한 독백은 술술 외울 정도로 셰익스피어에 깊이 빠져 있었다. 미국 선교사의 지원을 받아 공연하면서 여러 편의 성극(聖劇)을 번역했다. 때로는 1966년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했던 <요나의 표적>과 같이 큰 작품도 번역했다. 1967년 친정을 떠나 극단 ‘프라이에 뷔네’를 창단했다. 그 후부터는 좋든 싫든 간에 나는 독일 희곡 작품에만 매달리게 되었다.
나는 정말 많은 작품을 번역했다. 나는 공연을 전제로 번역한다. 독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관객을 위해서 작업한다. 내가 번역한 작품이 무대에 오르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거의’라 했으니 밝혀 두어야겠다. 브레히트의 <바알(Baal)>이나 실러의 <메시나 신부(新婦)>와 같은 작품은 아직 나의 손을, 아니면 누군가 다른 연출가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나는 대학에서 교양과목으로 천문학을 가르쳤다. 이 분야에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설픈 사이비 천문학자 정도로 나를 내세울 때도 있다. 우주의 법칙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나는 하늘의 비밀을 누설했다. 그럼 나는 창조주를 보았는가? 창조주를 믿는가? 그런 나는 혹시 무신론자인가? 갑자기 나 스스로 이렇게 반문해 본다. 나는 무신론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아주 오래전 독일에서 간단히 독일어로 강연한 적이 있었다. 발표 내용이 모두 생각나지는 않으나 그 가운데 니체를 흉내 내며 “신은 늙었다!”라고 흥분한 부분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하기야 우주가 약 137억 년 전쯤에 창조되었다니 창조주도 나이를 꽤나 많이 먹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나사(NASA)의 과학자들에게 ‘신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대다수가 신은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나 역시 신의 존재를 믿는다. 하늘의 신비를 찾아내려고 천문학 책을 늘 가까이하는 작은 과학자로서 나는 우주를 창조한 실체를 믿지 않을 수 없다. 현재를 긍정하려면 시작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든 시작을 있게 한 그 무엇인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학생들에게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반문하며 따져 가르치던 인문학자로서 창조주를 내세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와 있는지, 우리는 끝내 어디로 가게 되는지, 그런 의문을 무대에서 끊임없이 실험하고 규명해 보려는 연극쟁이로서 우주의 창조주를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성경의 하나님을 나는 믿지 않는다. 소돔과 고모라를 잿더미로 만든 여호와는 너무나 무책임하기 때문이다. 돌아보지 말라는 말 한마디를 어겼다고 가엾은 여인을 소금 기둥으로 만들어 버리는 여호와는 너무 무정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인디언을 죽일 때 백인들의 총부리에 달라붙어 탈환을 아까워하며 죽임을 응원하던 여호와는 너무나 잔인하기 때문이다. 신부들은 두꺼운 성경 밑에 일식, 월식이란 몇 가지 천문학 지식을 챙겨 넣고 몽매한 아프리카를 찾아 들어갔다. 슈바이처는 한 손에는 청진기를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있었다. 나는 슈바이처를 존경하지 않는다. 그분의 하얀 가운의 인도를 받아 하얀 피부의 약탈자들이 뒤를 따랐기 때문이다. 이들과 함께 검은아프리카를 하얗게 물들인 하나님은 너무나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 편파적이다.
1969년 <로물루스 대제>(뒤렌마트)의 연출을 맡아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했다. 당시 초대 주한 독일 문화원 원장(Hans Salmann)은 여러 사람에게 나를 이렇게 소개해 주었다. “이 사람은 처음에 나와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으나 이제는 독일 말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2007년 나는 독일문화원에서 퇴임식을 가졌다. 그때 독일 문화원 원장(Jürgen Keil)은 청중에게 나를 이렇게 소개해 주었다. “나의 친구는 그저 흔한 교수는 아닙니다. 연극하는 교수입니다(Mein Freund ist kein irgendein Professor. Er ist Theaterprofessor / My friend is not someone professor. He is a theatreprofessor).”

목차

서문: 비극에서 코러스의 활용에 관해

나오는 사람들

제1막
제2막
제3막
제4막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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