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디 접속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강제 새로 고침(Ctrl + F5)이나 브라우저 캐시 삭제를 진행해주세요.
계속해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리디 접속 테스트를 통해 원인을 파악하고 대응 방법을 안내드리겠습니다.
테스트 페이지로 이동하기

중국 고아 상세페이지

중국 고아작품 소개

<중국 고아> 볼테르는 기군상의 <조씨 고아>에서 두 가지 비극적 상황, 즉 은인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해야 하는 정영의 갈등과 친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양아버지를 배신해야 하는 조무의 갈등 중, 전자만 취하고 후자를 배제했다. 대신 원작에 없는 정영의 아내, 즉 이다메를 등장시켜 은인의 자식 대신 자기 자식을 희생해야 하는 부모의 비극적 상황을 더욱 심화하는 한편, 그녀를 사랑하는 정복자 칭기즈칸을 통해 남녀의 사랑과 지배자의 덕목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도입했다. 작품의 역사적 배경은 기원전 6세기가 아니라 칭기즈칸 생존 당시인 13세기 초로 설정했다.
볼테르의 <중국 고아>는 18세기 내내 유럽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1755년,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초연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코메디 프랑세즈 극단은 1756년 리옹 극장 개장 기념 공연으로 볼테르의 이 작품을 올렸고 오스트리아, 덴마크 등 궁전에서 어전 공연을 하기도 했다. 영국의 경우, 볼테르의 <중국 고아>와 머피가 각색한 작품이 함께 공연되었다. 특히 머피의 <중국 고아>는 미국으로 건너가 1767년 필라델피아 공연을 시작으로 1842년 뉴욕에서 마지막으로 공연될 때까지 여러 번 무대에 올랐다.
볼테르의 <중국 고아>가 한국인에게 특히 의미가 있는 것은 이 작품에 한국에 관한 언급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저자 프로필


저자 소개

저자 - 볼테르
본명이 프랑수아마리 아루에(François-Marie Arouet)인 볼테르는 1694년 11월 21일3) 파리의 공증인인 프랑수아 아루에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711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률 공부를 시작했지만 곧 그만두고 사교계에 드나들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1717년, 섭정 오를레앙 공작에 대한 풍자시 때문에 11개월 동안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되었다. 석방된 뒤, 그는 아루에 드 볼테르(Arouet de Voltaire)라는 필명으로 첫 비극 <오이디푸스(Oedipe)>를 무대에 올려 대성공을 거두었다.
1726년 볼테르는 또 한 번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된다. 로앙 샤보라는 대귀족 가문의 기사가 볼테르와 말다툼을 벌인 뒤, 하인을 시켜 볼테르를 구타했다. 이에 볼테르는 기사에게 결투를 신청했는데 정부가 도리어 볼테르를 투옥한 것이다. 얼마 후, 영국 망명을 조건으로 석방된 볼테르는 3년간 영국에 체류했으며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734년에 ≪철학 편지≫를 출판했다. 영국의 자유주의를 소개하는 동시에 프랑스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이 책은 프랑스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곧 그에게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 볼테르는 파리에서 동쪽으로 약 250킬로미터 떨어진 로렌 지방에 있는 샤틀레(Châ̂telet) 부인 소유의 시레(Cirey) 성으로 피신했으며, 이후 약 10년간 이곳에서 은거하며 집필 활동을 했다.
1745년, 볼테르는 왕실 사료편찬관으로 임명되었고, 1746년에는 오랫동안 소원해 왔던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풍자를 즐기는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에 애써 얻은 궁정의 지위는 다시 위태로워졌다. 게다가 1749년에는 애인이자 친구인 샤틀레 부인이 젊은 애인 생 랑베르의 딸을 낳자마자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된다. 더 이상 프랑스에 머물 이유가 없어진 볼테르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의 초청을 받아들여 1750년 베를린으로 갔다. 볼테르는 이곳에서 역사서 ≪루이 14세의 세기(Le siècle de Louis XIV)≫(1751)와 콩트 ≪미크로메가스(Micromégas)≫(1752)를 썼다. 그러나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그의 품성은 애초에 절대군주와 궁합이 맞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1753년 프로이센을 떠났다. 그러나 파리로 돌아갈 수 없어서 제네바 근처에 델리스(Délices)라는 저택을 사서 1755년 3월부터 그곳에 머물렀다. 중국을 배경으로 하는 희곡 <중국 고아>는 이곳에서 완성되었다. 1755년 이 연극이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초연된 후, 그는 델리스에 있는 작은 개인 극장에서 이 연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1756년에는 이곳에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풍습론(Essai sur les moeurs et l’esprit des Nations)≫(1756)도 완성했다. 1758년, 볼테르는 스위스 국경 근처에 있는 프랑스 영토인 페르네(Ferney)에 영지를 사서 2년 뒤 이사했으며 이후 20년 동안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주민들을 돌보며 생활했다. 사람들은 이러한 볼테르를 ‘페르네의 영주’라고 불렀다.
그는 페르네에서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Candide ou l’Optimisme)≫(1759), ≪관용론(Traité sur la tolérance)≫(1763) 같은 대표작들을 썼다. 그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편견 때문에 부당하게 사형당한 장 칼라스(Jean Calas)를 위해 사법 체계 전체와 싸움을 벌여 1765년에 그의 복권을 이루어 냈다. 또한 1771년에는 또 한 명의 프로테스탄트인 피에르폴 시르벵(Pierre-Paul Sirven)이 무죄 판결을 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778년 2월 10일, 볼테르는 파리를 떠난 지 약 28년 만에 비극 <이렌(Irène)>을 상연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 시민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를 위한 행사가 연일 열렸고, 그를 만나려는 방문객이 줄을 이었다. 그의 마지막 비극 작품인 <이렌>은 코메디 프랑세즈 극장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이로 인한 흥분과 무리한 활동 때문에 건강을 해쳐 1778년 5월 30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역자 - 이봉지
이봉지는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를 졸업하였으며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배재대학교 프랑스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Le Roman à éditeur≫, ≪서사학과 페미니즘≫이 있으며 역서로는 ≪수녀≫, ≪공화정과 쿠데타≫, ≪육체와 예술≫(공역),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공역), ≪두 친구≫,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공역), ≪캉디드≫, ≪보바리 부인≫ 등이 있다.

목차

나오는 사람들
제1막
제2막
제3막
제4막
제5막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리뷰

구매자 별점

0.0

점수비율
  • 5
  • 4
  • 3
  • 2
  • 1

0명이 평가함

리뷰 작성 영역

이 책을 평가해주세요!

내가 남긴 별점 0.0

별로예요

그저 그래요

보통이에요

좋아요

최고예요

별점 취소

구매자 표시 기준은 무엇인가요?

'구매자' 표시는 리디에서 유료도서 결제 후 다운로드 하시거나 리디셀렉트 도서를 다운로드하신 경우에만 표시됩니다.

무료 도서 (프로모션 등으로 무료로 전환된 도서 포함)
'구매자'로 표시되지 않습니다.
시리즈 도서 내 무료 도서
'구매자’로 표시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같은 시리즈의 유료 도서를 결제한 뒤 리뷰를 수정하거나 재등록하면 '구매자'로 표시됩니다.
영구 삭제
도서를 영구 삭제해도 ‘구매자’ 표시는 남아있습니다.
결제 취소
‘구매자’ 표시가 자동으로 사라집니다.

이 책과 함께 구매한 책


이 책과 함께 둘러본 책



본문 끝 최상단으로 돌아가기

spinner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