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 조선정부에 의한 서양 과학기술 도입과
그 변용・굴절의 역사
이 책이 다루는 시기의 통치자인 고종만큼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조선의 왕은 별로 없다. 지난 세기까지만 해도 고종은 어렸을 때는 아버지 대원군의 도포자락에서, 젊어서는 아내 명성황후의 치마폭에서 놀아난 유악하고 아둔한 군주, 한편으로는 돈 되는 사업마다 손을 대는 욕심 많은 군주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이었다. 그러나 21세기에 이르면서 그는 우호적이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하더니 어느 사이엔가 개화 정책을 이끈 개화 군주로, 심지어 서양 과학기술 관련 서적을 대거 입수하고 공부시킨 학자적 성군으로 거듭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고종의 치세 시기가 개인의 역량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제국의 침략기라는 세계사적 풍랑 속에 있었다는 역사적 상황 논리도 그에 대한 변호적 평가로 곁들여졌다. 그러나 이 책은 이 같은 한 인물에 대한 평가를 주된 관심사로 두지 않으며, 보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외부 세력의 유입에 대한 내부적 인식 및 대응 노력을 고찰하고 그것이 변용・굴절되어가는 과정을 살피고자 한다.
17세기 전후 조선에 선보인 서구 과학기술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전하고 중화주의적 천지관에 조응하여 번역된 중세의 것들이었다. 그러나 개항을 전후해 들어온 서양 과학기술은 이와는 전혀 달랐다. 그것은 16, 17세기의 과학혁명을 통해 형성되고 18, 19세기 산업혁명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구성된 근대 서양 제국의 산물이었다.
빠르고 거대한 군함과의 접전을 통해 서양 과학기술의 가공할 위력을 경험한 조선 정부는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이를 위해 근대 문물의 수용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고종(高宗) 정부는 무엇보다 강력한 서양 무기들의 도입을 원했는데, 이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서양 무기의 보유를 위해서는 군체제 전체를 전환해야 했고, 그 원천인 근대 과학기술의 도입이 필요했으며, 무엇보다 막대한 재정을 확보해야 했다. 이를 위해 재정 누수가 심한 국가 제도 분야를 개혁하기 시작했고, 이 개혁은 교통 및 통신 제도를 포함하여 일체가 서양 것으로의 대체를 내포하며 진행되었다.
이 책은 개항 전후부터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근대 과학기술의 도입 과정을 살피고, 그에 따른 변화 양상을 점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에서 중점적으로 제기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근대 과학기술 도입 이전, 전통사회에서 해당하는 분야들이 존재했는가? 존재했다면 어떤 기능을 담당했고, 어떻게 존재했는가? 둘째, 도입 분야마다 경로가 다르고 결과도 같지 않으며 소요 기간에도 차이가 있었는데, 이런 차이는 왜 발생했으며 무엇이 이런 차이에 영향을 미쳤는가? 셋째, 구성요소와 배경이 다른 각각의 서양 과학기술이 조선이라는 공간에 도입되었을 때 어떤 양상으로 나타났는가? 넷째, 도입된 서양 과학기술은 조선 사회, 나아가 조선 전통의 지적 체계와 어떤 상호작용을 이루었는가? 마지막으로, 사업 추진 세력의 전환이 도입 과학기술의 성격과 내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이 책은 근대 과학기술의 도입 과정에서 일어난 변용과 굴절, 혼종의 양태를 살피면서, 근대 과학기술이 조선에서 서양과 똑같은 형태로 유지되고 존재하는 독립적 완전체가 아님을 밝힌다. 즉, 과학기술이 사회적・문화적 배경과 지적 전통에 의해 변화되는 체계이자 조선 사회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한 특징을 갖추고 재구성되는 산물임을 보이고자 한다.
이 책의 구성
제1장 “서론”에서는 고종 시기 이전 조선에 소개・유입된 서구 과학과 개항을 전후해 들어온 서양 과학의 내용 차이를 살펴본 후 고종의 조선 정부가 시도했던 사업 및 노력들을 개관한다.
제2장 “근대 과학기술 발견과 조선 정부 도입 정책”에서는 조선 정부가 서양 근대 과학기술을 수용하는 태도를 점검한다. 전통적 관념의 변형과, 도입을 구체화하기 위한 정보 수집, 도입 정책들의 형성 및 전개를 통해 조선 정부의 기본 인식 및 태도와 더불어 당시의 국내외적 상황을 점검한다.
제3장 “서양식 군비의 확충”에서는 조선 정부의 현안이었던 서구 무기 제작기술 도입의 희망, 도입을 위한 정책의 구성 과정과 좌절,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를 살펴본다.
제4장 “서양 농법의 도입과 전개”에서는 강병에 필요한 재정 기반의 확보를 위해 전통적 기간산업이었던 농업을 새로운 근대 서양 농법으로 재구축하려 한 조선 정부의 여러 노력들을 살펴본다. 벼 품종 개발과 시비 방식의 전환을 위한 모색과 노력 과정, 그와 더불어 대표적 서양 농법 산업인 낙농을 포함한 상업 작물들의 도입, 나아가 농업기술의 전수를 위한 교육제도 구축 과정과 좌절, 통감부에 의한 굴절의 과정을 점검한다.
제5장 “교통 체계의 개혁: 철도와 전차를 중심으로”와 제6장 “통신 제도의 개혁—전신을 중심으로”에서는 중앙집권 국가의 통치 수단인 교통과 통신의 서양식 전환을 도모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국가 통치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였던 교통과 통신 사업권은 조선 정부뿐만 아니라 서양 열강과 청・일 두 나라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조선 정부의 적극적인 도입 노력이 이들의 간섭과 방해를 받으며 굴절・변용되는 과정을 점검했다.
제7장 “근대 과학으로 진입과 전통 자연관의 해체”에서는 전통적 자연관과 관련된 학문 분야의 균열과 해체의 과정을 다룬다. 천문학과 지리학 중심으로 이를 살펴보았는데, 특히 전통적으로 제왕의 학문으로 인식되던 천문학이 개항 이후 서양 근대 과학기술의 도입으로 크게 변화하는 과정을 검토한다. 이와 결부하여, 시간에 내재돼 있던 전통적 권력이 통감부 및 총독부에게 장악되면서 그들의 시간 관리를 통한 조선 지배의 과정도 살핀다. 또한 근대 지리학의 도입으로 전통적인 ‘천원지방’과 중국 중심의 세계관이 무너지고 5대양 6대주라는 넓은 세계와 함께 국제 질서의 재정립을 요구받는 상황에 대해서도 살핀다.
제8장 “새로운 교육 체계의 도입과 근대 과학 교육”에서는 근대 교육체제의 도입 및 학제 개편과 더불어 과학 관련 교육의 수행 과정을 살펴본다. 새로운 근대 과학은 독서와 암송 위주의 전통적 교육 방식과 제도로는 수용하기 어려웠다. 전통과 상이한 지적 훈련 체계를 가진 근대 과학의 수용 과정을, 서양식 학제 도입 및 교과서의 점검을 통해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