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의 고향, 연극을 사랑하는 영혼의 고향, 브로드웨이에서 적어내린 300여 일의 여정
누구나 한 번쯤 저마다의 이유로 동경을 담아 떠올리는 도시를 꼽으라면 단연 뉴욕이 아닐까. 다양한 인종이 모여 다양한 색깔을 빚어내는 거대도시 뉴욕, 그중에서도 브로드웨이는 연극과 뮤지컬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꼭 한 번 밟아야 하는 영혼의 고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 연간 엄청난 숫자의 작품이 태어났다 사라지는 그곳 브로드웨이에서 평생을 사랑해온 연극의 실체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속에 저자는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 책은 바로 그곳 브로드웨이에서 30편 남짓한 연극과 함께 호흡하며 보낸 300여 일간의 섬세한 기록이다.
다양한 작품을 무대에 세우고 공부한 연극학자로서, 또 대학 강단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저자는 학자의 전문적 시선을 씨줄 삼아 관객의 독자적인 감상을 날줄 삼아 맛깔스럽게 이야기를 엮어간다. 올랜도 블룸이 출연해 화제를 모았던 <로미오와 줄리엣>과 저마다 다른 색깔로 선보인 두 번의 <맥베스>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셰익스피어의 여러 작품들을 비롯해, 조금은 마니아 취향인 <낸스>와 <라 디비나 카리카투라>, 국내에서도 상영되었던 <유리동물원> 등 다양한 층위의 작품을 아우르며 마치 내가 직접 브로드웨이의 극장에 앉아 있는 듯 작품의 이미지들을 눈앞에 풀어낸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작품에 녹아든 다른 듯 닮은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와 현지에서 만난 이들과 같이 보낸 여행의 시간이 교차되어 그려진다. 연극 공연뿐만 아니라, 뉴욕의 다채로운 풍경과 사람들을 담은 소박한 사진들이 그 감동의 시간을 고스란히 책장 위에 되살려낸다.
한겨울의 맨해튼에 처음 발을 내디딘 이후, 브로드웨이와 오프-브로드웨이를 가로지르고 맨해튼과 브룩클린을 건너다니며 바쁘게 오가는 저자의 모습을 보고 한 지인은 “무대가 너무 좋아 하염없이 극장가를 떠돌다 죽어서도 극장을 떠나지 못하는 연극의 유령”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손에 잡히지 않는 연극의 뿌리를 만지고자 브로드웨이와 그 너머까지를 온통 헤매고 다닌 유랑의 기록이 제목 그대로 『브로드웨이의 유령』이 된 셈이다.
이 인간미 넘치는 유령의 걸음을 좇고 있노라면 왠지 그 뒤를 따라 뉴욕의 거리를 걷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옷깃을 여미며 맨해튼 거리를 종횡하고 강 건너 브룩클린까지 섭렵하노라면, 뉴욕의 낯선 풍경과 낯익은 사람들 사이에서 뉴욕 사람들 또한 서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묘한 반가움도 느끼게 될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극장에서 저 극장으로 허둥지둥 걸음을 재촉하는, 제대로 된 한 끼를 챙기기보다는 영혼을 채워줄 좋은 작품을 찾아 바삐 움직이는 저자의 모습은 그 자체로 브로드웨이를 배경으로 만든 한 편의 일인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통해 무대 위에서 열정적으로 창조되었다가 다시 그곳에서 끝을 맺는 연극이 우리의 삶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 또 그 무대의 주인공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그렇기에 이 책은 한 사람의 여행기를 넘어 공명할 수 있는 ‘우리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극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뉴욕 브로드웨이를 동경하는 이들에게 비행기 티켓 대신 이 책을 내밀어보면 어떨까. 『브로드웨이의 유령』은 브로드웨이에서 꿈꿀 수 있는 모든 감동과 조우한 작가의 희로애락이 생생하게 담긴 책이기에 그 어떤 여행기보다 깊은 만족과 울림을 줄 것이다.
[책 속에서]
뉴저지의 작은 마을에 둥지를 틀고 사계절에 걸친 15회의 뉴욕 연극 여행을 했다. 이 여행의 동반자들은 타임스 광장과 센트럴 파크, 포트오소리티 버스 터미널과 펜스테이션 기차역, 맨해튼 미드타운과 다운타운, 첼시의 호텔과 이스트 빌리지의 목로주점, 링컨 센터와 브루클린 뮤직 아카데미, 허드슨 강변과 이스트 강변을 오가게 될 것이다. 거기서, 또 오가는 거리에서, 중독자와 노숙자, 광대와 성자, 시인과 연인과 살인자, 클로젯 게이와 드랙 퀸, 장인과 도제, 매춘부와 불구자, 혁명아와 수감자, 천재와 광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대나 거리가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숨 쉬고 있는 자유인과 자폐아라는 이름의 샴쌍둥이도 만날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을 만날 것이다._7쪽, 「유랑의 서」 중에서
연극인 칼데론이 예술의 파산을 선고하고 있다고는 믿기지 않는 것은 “연극은 전쟁터”라는 그의 말에서 여전히 예술의 힘에 대한 믿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역사책을 펼치면 연극이 있다”는 말이 역사와 연극, 삶과 예술의 순환 고리를 궁극적으로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_93쪽, 「퍼블릭 시어터」 중에서
그 열망에 감염되어 심야의 덤보 거리로 발을 디디는 여행자를 극장 외벽 전광 포스터의 브루터스가 시리고도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강바람에 그의 외침이 들려온다. “자유다! 해방이다! 독재는 끝났다!” 여행자도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외쳐본다. “자유, 브루클린!”_300쪽, 「결코 얻지 못할,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자유이기에」 중에서
연극이 연극인 것은 즐거운 경이의 체험을 넘어서 그 체험의 의미에 가 닿으려는 즐겁고도 고통스러운 놀이이기 때문이다. 수수께끼 같은 비밀에 호들갑을 떠는 대신, 설명되지 않는 세계와 불가사의한 인간 존재를 어떻게든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필사적인 유희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경이가 아니라 깊은 경외, 그것이 연극의 본령이다._375쪽, 「상상력의 놀이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