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을 넘어, 나로 서기까지’
과거와 현재가 이어진 남산 아래 이태원의 골목에서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고 싶었다.
삶의 상처를 껴안고 나를 사랑할 때,
그 길 끝에서 다시 빛나는 자신을 만난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12월의 어느 날, 집 근처 카페를 찾았습니다. 창밖에는 크리스마스 조명이 물기를 머금어 진한 여운을 남깁니다. 퇴근 시간 행인들의 분주한 발걸음 사이로 구세군의 종소리가 유난히 크게 퍼집니다. 크리스마스를 3일 앞두고 2025년도 막바지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지나가던 신사분이 정성껏 지폐를 모금함에 넣습니다. 순간 온 세상이 금세 따스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지금, 당신은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신가요? 당신이 지내는 그곳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나요?
하루하루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제가 살아온 공간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이 책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이태원에 삽니다. 열심히 살아내기도 때로는 무심히 지나치기도 했던 공간에는 저의 삶이 녹아있었습니다. 즐거웠던 일, 슬펐던 일들이 있었습니다. 함께 했던 사람들도, 스치듯 지나갔던 사람들도 모두 제 인생의 지도에 그려진 풍경이었습니다. 이 책에는 그런 저의 경험과 기억, 감정들이 역사가 되어 실려있습니다.
휴머니즘과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태원에는 외국인들과 해외 생활 후 돌아온 한국인들이 다수 거주합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터를 잡고 살아온 원주민들과 최근 새롭게 이주한 청년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합니다. 매우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한국인과 외국인, 남녀노소가 어우러져 사는 열린 공간입니다. 또한, 매우 한국적이고 전통적인 곳이기도 합니다. 저와 매우 닮아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방식으로 버텨내는 곳. 다름이 이상하지 않고, 외로움마저 자연스러운 곳.
그런 이태원에서 저는 상실을 경험했고, 치유와 위로를 받았습니다. 쉼을 갖고, 회복하고, 꿈과 성장을 이야기하고, 존중과 사랑을 주제로 토론했습니다. 이 책에는 그런 저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제 이야기는 저만의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나'의 이야기입니다. 공존의 이야기이며 '나'로 당당히 서기를 허락하는 '나다운 자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이태원에서 살고 있습니다. 경계 위에 서 있고, 확신과 불안 사이를 오가며, 완벽하지 않은 모습으로 하루를 견뎌냅니다. 《이태원에 삽니다》는 답을 주는 책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는 책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는 독자분께서 그 질문 끝에 자신을 조금 더 따뜻하게 대할 수 있기를, 스스로에게 진심 어린 격려와 용기를 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자신을 먼저 가득 채우고 넘치는 사랑을 주위에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책 속으로
나의 삶에 나타났다 사라진 존재들이 있다.
있었음을, 존재하였음을,
이제는 시나브로 알 것 같다.
텅 비었으나 꽉 차 있는 기억의 순간들을 본다.
-1. 상실 ‘상실의 시대’ 중에서
디아스포라는 민족의 정착지를 벗어나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러 문화를 체득하고 있으며, 때로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한다. 새로 정착하는 사회에서 다시 적응해야 하는 설렘과 부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구분이 아니라 따듯한 시선과 포용이면 좋겠다.
-2. 이태원에 삽니다 ‘이태원 디아스포라’ 중에서
삶은 한 번도 나를 막아서지 않았다. 나는 어떠한 모험보다 결국 나 자신을 추스르고 보호할 안식처가 필요했다. 이태원은 그런 나를 안아 주었다.
-2. 이태원에 삽니다 ‘다시 이태원’ 중에서
루프탑 아래로 보이는 집들은 장난감처럼 작다. 골목길을 횡단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인형처럼 귀엽다. 하지만 안다. 그들의 삶은 매우 현실적이고 생생할 것을. 멀리 떨어져 보니 옅어 보이는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3. 치유 ‘루프탑 카페에서’ 중에서
매번 지나쳐도 못 보았던 장소가 보이는 건 새로운 기억이 생겼기 때문이다. 내가 변했기 때문이다. 관심 없이 지나치던 중국 식당은 어느 날부터 상하이의 그 식당과 닮아 있다.
-4. 수용 · 존중 ‘변화하는 이태원’ 중에서
"아빠, 전 어쩌면 좋죠?"
"집으로 가"
"그게 어딘데요?"
"네 마음이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곳이지."
-4. 수용 · 존중 ‘집’ 중에서
버스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이른 아침 어디론가 분주히 떠나는 사람, 저녁이 되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는 직장인, 오랜 원주민인 듯 보이는 나이 든 어르신들, 타지에서 적응하며 열심히 일상을 살아가는 외국인들. 눈을 감은 채 잠깐이나마 하루의 피로를 푸는 사람, 낮은 버스 천장에 머리가 닿을라 고개가 꺾인 사람.
-5. 관계 ‘2번 마을버스’ 중에서
일인칭 단수로써의 삶은 모호한 상황에서 명료함을 찾을 수 있는 힘이다. 내가 나로 실존하는 가장 간단하고 명확한 관계이다. 누군가 내려주는 결론은 내 것이 아니다. 두 개의 길을 사이에 두고 방황해도 일인칭인 내가 선택하면 된다. 내 선택을 믿는 힘이 있다면 도착지까지 무사히 다다를 수 있다.
-5. 관계 ‘남산도서관에서 다시 만난 하루키’ 중에서
"그래 왼쪽으로 가보자, 밀로."
밀로는 아까부터 그저 새길이 재미있는지 연신 기분 좋은 표정으로 내게 눈인사를 한다. 왼쪽으로 내려가면 오던 길의 반대 방향이다. 집과 더 멀어진다. 괜찮다. 밀로와 함께이니 무서울 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밀로와 만나는 새로운 세상은 늘 신나고 재밌었다.
-6. 사랑 ‘밀로의 해방촌 길’ 중에서
서울에서 동네를 걸을 수 있는 곳. 구석구석 나의 역사가 있는 곳. 낯선 곳이 낯설지 않고, 더 이상 이방인의 가방이 무겁지 않을 때, 과거는 현재에서 빛을 낸다. 삼각지에서 후암동, 경리단, 명동, 해방촌을 거치며 펼쳐진 나의 용산 발전사는 지금도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7. 희망 · 성장 ‘용산발전사’ 중에서
그날 밤, 깨달았다. 매 순간 나의 선택으로 삶이 창조됨을. 원하는 재료를 배합하여 나만의 삶을 창조하는 것임을. 루콜라와 망고, 오일와 민트가 어우러져 새로운 맛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나는 그 저녁에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 있었다.
-9. 자유 · 창조 ‘해운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