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책소개 -모네와 가이 로즈
■ 1883년부터~43년간, 모네가 정착한 지베르니 (Giverny)
프랑스의 인상파는 1874년에 파리에서 모네등 30명이 165점을 출품하여 제1회 전시가 개최되었다. 인상파가 미국에 전파되기는 불과 4년 후인 1878년에 뉴욕과 보스턴에서 이었다. 그리고 1886년에는 본격적으로 뉴욕에서 ‘제1회 프랑스 인상파전’을 개최하여 모네, 마네, 드가 등의 작품 300점을 대거 전시한 이후에 크게 보급되기 시작했다.
19세기 전후에 서구 산업사회는 인류역사상 가장 유래가 없는 격변이 따랐다. 산업혁명으로 도시로 인구가 대거 유입되고 중산층의 시민계급이 형성되었다. 드디어 미술계에서도 혁명적인 인상파 화풍이 등장하고 유럽을 진동시켰다. 인상파는 모든 이에게 충격과 더불어 차츰 감동을 주었다. 이 운동을 주도하던 모네의 화풍과 그의 정착지인 지베르니는 1880년대부터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산업혁명이 기적을 이루고 과학적 기술로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내자 모네 등의 인상파 화가들은 경이스러운 현대를 꿈꾸면서 새로운 표현방법을 모색하다가 드디어 인상주의(Impressionism)를 탄생시켰다.
파리에서 인상파는 1888년까지 여덟 번의 전시가 열렸다. 당시 유럽에는 인상파를 가르치는 어떠한 교육기관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모네가 1883년에 정착한 지베르니는 불과 300명의 농부가 살고 있는 시골마을로서 차츰 주목을 받았다. 1885년부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1914년까지 30년 동안 전 세계 18개국의 화가 350명이 방문하고 수년 동안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에 미국 화가들은 300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하여 사실상 미국의 화가마을이 되었다. 화가들은 모네와 인접하여 생활하면서 정통적(正統的)인 인상주의에 영감을 받거나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화가와 예술가들은 모네의 신봉자(信奉者) 및 추종자(追從者)라는 의미로 지베르니아이츠(Givernyites)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프랑스는 전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베르니의 미국 화가들은 귀국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그들은 대도시 인근에 프랑스의 지베르니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마을을 건설해 나갔다. 뉴욕 인근의 동부지역에는 The Ten(10인 화가회)의 멤버가 주동이 되어 올드라임(Old Lyme), 시네코크 마을, 글로스터 등을 조성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 등 서부지역(西部地域)에는 가이 로즈가 중심이 되어 라구나 비치, 몬테레이, 카르멜 등의 화가마을을 건설했다. 이와 같이 화가마을이 확산된 것은 오늘날 미국이 모네가 추구한 정통적인 인상주의가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게 한 동인이었다. 제자의 양성과 화가마을의 확산은 미국의 인상파를 ‘불멸(不滅)의 화파(畵派)’로 키우는데 크게 공헌한 것이다. 인상파의 발상지인 프랑스와 달리 미국의 인상주의는 현대미술의 중심에 위치하면서 지속적인 르네상스를 이루어 나가게 되었다.
■ 1888년, 파리의 줄리앙 아카데미
로즈는 20세기 전후의 캘리포니아 주 출신의 인상파 화가들을 대표하면서 정점(頂点)에 위치한 거장이 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미술교육 후에 청운의 꿈을 품은 청년 화가들처럼 파리로 향했다. 나이 21세인 1888년에 줄리앙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3년을 다녔다. 그 곳의 스승은 아카데믹 리얼리즘을 추구하며 인물화와 초상화를 가르치던 거장화가인 윌리앙 아돌프 부그로, 장 조제프 뱅자맹 콩스탕, 쥘 조제프 르페브르 등이었다. 로즈는 당시 최고 수준의 전통적인 페인팅 교육을 받았지만 이러한 회화 스타일과 전혀 다른 인상파의 회화 스타일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곧 일생의 진로와 방향을 주저 없이 인상주의로 나아갔다.
■ 1890년부터 네 차례 13년간,지베르니 생활
로즈는 지베르니에서 네 차례에 걸쳐 13년간을 생활했다. 그는 줄리앙 아카데미를 마치고 바로 귀국하지 않고 23살인 1890년에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고자 지베르니를 향했다. 이 시기는 지베르니가 1885년부터 미국화가 등이 방문하여 점차 국제적인 화가마을(Art Colony : 예술공동체)로 변하고 있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핍박받은 인상파는 모네가 43세에 정착하여 86세까지 생을 다하면서 지베르니에서 꽃을 피웠다. 왜냐하면 이곳에 350명의 지베르니아이츠(Givernyites)라는 지원군(支援軍)이 찾아와서 인상파를 계승하고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인상파는 미래가 사실 불투명하고 화가로서 성공의 보장을 받는 확신이 없었다. 때문에 이들은 모험을 하듯이 생애를 도박에 거는 것처럼 큰 용기가 필요했다. 인상파 원형(原形)의 작품을 실험하고 창조해 나간다는 것은 심미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베르니는 차츰 새로운 미술 즉 인상파의 모태(母胎)와 발원지(發源地)가 되었고 드디어 현대미술의 세계적인 메카로 발돋움했다. 지베르니는 모네와 함께 많은 지베르니아이츠의 노력으로 인상파는 전 세계를 향해 급속히 전파되었고 140년이 지나면서 차츰 현대미술의 르네상스를 이루기 시작했다. 로즈도 파리에서 최고의 아카데믹 엘리트 교육을 받았지만 이를 과감히 탈피하고 지베르니로 향했다.
■ 친구와 멘토로서 모네와 가이 로즈
로즈가 지베르니에 처음으로 방문한 시기인 1890년은 나이가 23세이었다. 당시 모네는 50세의 장년으로 두 사람의 나이는 27살의 차이가 있었다. 로즈는 모네와 같이 생활하면서 절친하게 지냈고 인상파의 경험자인 모네로부터 다양한 멘토를 받았다. 로즈는 지베르니에서 스타일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을 개발하였다. 즉 그의 화풍은 모네와 흡사하였으나 미국적인 사실주의를 혼합하여 누가 보더라도 확연히 구별되는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했다.
인상파의 스타일은 아카데믹 스타일과 달리 첫째 그림을 그리는 소재의 다양성(多樣性)으로 어떠한 대상도 모두 그림의 실체가 될 수 있었다. 둘째는 화가자신이 가진 개별성(個別性)으로 사람의 얼굴이 다르듯이 작품도 이와 같이 무한한 창작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은 인상파의 표현방법의 무한성을 들 수 있는데 즉 스트로크의 변화무상성(變化無常性)이 가장 특징이었다. 이와 같이 세 가지 특성 때문에 인상파는 인간이 원천적인 욕망 즉 ‘아름다움을 향한 영원한 열망’을 지속적으로 채울 수 있었다.
■ 1910년,‘지베르니 그룹’과 장식적 인상주의
1890년에 지베르니에 도착한 가이 로즈는 이곳에서 ‘장식적 인상주의’의 작품을 가장 먼저 구체적으로 실현한 화가이었다. 그가 성취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상주의 스타일 안에서 새로운 장르를 개발한 것이었다. 로즈가 지베르니에 온지 10년 후인 1900년부터 리처드 밀러, 로턴 파커, 프레드릭 프리세크, 에드먼드 그리슨, 칼 앤드슨 등의 화가들이 도착하여 비교적 오랫동안 정착하면서 로즈의 스타일을 보고 작품을 같이 그렸다. 그들은 주로 가족과 함께 생활하였고 완성된 작품은 매년 미국의 뉴욕 등에서 전시를 통해 작품을 인기 속에 판매하였다. 그리고 다시 지베르니에 돌아와서 다음의 전시를 위한 작업을 계속했다.
장식적 인상주의(Decolative Impressionism) 작품이란 가이 로즈 등 10명의 화가들이 당시 지베르니의 실외 정원과 실내에서 꽃과 정원의 배경과 함께 여인이나 가족 인물을 결합하여 그린 작품 스타일이다. 특히 작품의 배경에는 햇빛이 쏟아지는 정원에서 시간에 따라 무수히 반사되는 섬광(閃光)과 같은 색채의 명멸을 개성적으로 묘사했다. 주제는 주로 가족의 인물과 모델 여인의 누드를 정원이라는 배경과 함께 그린 것이다. 또한 실내에서도 창으로 흘러 들어오는 햇빛에 비친 인물의 모습을 실외에서처럼 묘사한 것이다. 이러한 작품 속에 배경이 되는 정원의 꽃이나 잎사귀의 모습은 다소 추상적(抽象的)이며 환상적(幻想的)인 표현기법 즉 개성적인 터치로 그려졌다. 작품속의 인물은 인상주의 및 사실주의에 가까운 표현방법으로 그리되 배경과 서로 병치(倂置)하여 조화를 이루게 한 것이 특색이었다.
1910년에는 이와 같이 새로운 화풍으로 활동한 지베르니의 화가 6명이 [지베르니 그룹 Giverny Group] 이라는 명칭을 스스로 지어서 고국인 뉴욕에서 전시하여 큰 성공을 이루었다.
6명의 화가 자신들도 처음에 그들의 화풍이 미술사적으로 새로운 ’장식적 인상주의’라고 나중에 정의(定義)가 될지를 몰랐다. 단지 작품 속에 햇빛을 받아 무수히 명멸하는 정원의 나무 잎사귀와 꽃들이 어울린 아름다운 정원과 사람을 그린 것은 뉴욕 등의 전시를 통해 큰 인기를 얻었다. 그들은 실내에서도 인상파가 추구하는 빛(光)과 색(色)의 조화 및 대상(對象)과 면(面)의 구성을 장식적 인상주의로 실험하기 시작했다. 이는 인상파가 추구하는 빛이 충만한 자연(自然)이라는 배경 속에 인간(人間)을 포함시킨 것이었다. 즉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인상파의 새로운 스타일로 개발하여 캔버스에 창작한 것이다.
전시가 끝난 1년 후인 1911년에야 미국의 미술비평가이며 수집가인 크리스천 브린턴 Christian Brinton (1870~1942)이 서양미술사에 처음으로 이들의 그림 스타일을 ‘장식적 인상주의’라는 용어로 명명(命名)하였다. 오랜 인상파의 실험 끝에 새로운 인상파의 장르가 드디어 정의(定義)되고 탄생한 것이다.
인상주의는 그림의 대상에 대하여 빛과 색채의 변화에 따라 사실주의와 달리 다소 주관적(主觀的)으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작품에는 심미적으로 추상적(抽象的)인 이미지가 일부 묘사되는 회화 기법이다. 추상화를 최초로 개발한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는 1896년에 모네의 <건초더미>를 모스코바 전시장에서 본 적이 있었다. 이 때 사물에 비친 햇빛의 추상적인 표현과 함께 사물자체가 가진 중요성을 지워 버린 것에 대하여 영감(靈感)을 받았다고 스스로 고백한 적이 있다. 또한 인상파는 기능적으로 장식적(裝飾的)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들 지베르니의 장식적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면 위와 같은 추상적인 이미지 표현과 더불어 새로 개발된 장식적인 측면 즉 두 가지 요소가 특징적으로 함께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 모네와 가이 로즈 』 출간
지난 6월에 출간한 <The Ten-미국 인상주의의 거장들, (전2권)>에서 소개한 내용은 프레드릭 차일드 하삼 등 미국 동부지역의 11명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소개이다. 이번에는 지베르니에서 생활한 화가들 중에 단권(單券)으로 가이 로즈의 책을 출간하였다. 로즈는 지베르니아이츠(Givernyites)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건강문제의 어려운 장애를 극복하고 미국의 인상주의 화가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한 사람이 되었다. 또한 새롭게 정의(定義)된 ‘장식적 인상주의’ 와 지베르니 그룹(Giverny Group)이라는 이름으로 뉴욕에서 전시를 추진한 리더였다. 90년 전에 세상을 떠난 가이 올랜드 로즈의 인상파 작품이 국내에서 한권의 책으로 소개되는 일은 처음이다. 인상파라는 서양미술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서 유럽의 인상파와 달리 미국의 인상주의 화가들의 내용을 알았으면 하고 바란다. 모네와 가장 가까이에서 오랜 생활 동안 생활하며 창작한 작품은 참고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