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인상주의 미술에 있어 유럽에서 대표적으로 활동한 화가는 모네를 위시한 르누아르, 드가, 시슬레, 마네, 피사로, 카셋 등과 세잔느, 고흐, 고갱 등의 후기 인상파 화가들을 들 수 있다. 모네는 43세인 1883년에 파리를 떠나 80km 떨어진 지베르니에 그의 평생 염원을 이루고자 정착했다. 이 시기는 파리에서 인상주의 전시회가 1886년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인상주의 전시에 [인상-해돋이]이란 타이틀의 작품에 온갖 악평과 비난을 당하면서 드디어 선도적인 제창자로 인정을 받았다.
모네가 지베르니에 정착한 2년 후인 1885년부터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18개국에서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30년 동안 지속적으로 350명의 많은 화가와 예술가들이 이곳을 찾아와 마을에서 같이 생활했다. 화가들이 일시에 모여들자 1887년부터 여인숙은 버디호텔로 변하고 숙소와 더불어 식당과 스튜디오가 마련되고 카페가 열렸다. 1890년경에는 80명 정도로 모이게 되자 개별적으로 숙소를 매입하거나 세내어 예술가 공동체Art Colony 즉 화가마을로 차츰 변했다. 이들은 ‘지베르니의 사람들’과 ‘지베르니의 신봉자(信奉者)’들이 되어 지베르니아이츠Givernyites로 불리었다. 그런데 모네는 이들을 결코 초청(招請)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제자(弟子)를 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슨 연유로 지베르니를 찾아간 것일까? 필자는 이 책을 쓰기 오래 전부터 아래와 같은 여러 가지 의문점을 갖게 되었다.
▶ 350명의 화가 등 예술가는 지베르니의 모네를 스스로 찾아간 까닭은?
▶ 이들은 모네의 작품을 단지 카피(Copy)하기 위해서 이었는가?
▶ 지베르니아이츠는 10년~20년 이상을 지낸 화가들이 많은데 그 이유는?
▶ 부부나 형제, 자매, 모자, 모녀 및 자녀들과 같이 와서 생활한 이유는?
▶ 방문한 화가 외에 조각가, 작가, 시인, 사진사 등 다양하게 모인 이유는?
▶ 방문화가 중에 미국화가 등이 약 300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하는 까닭은?
▶ 이들은 미국의 아트 스튜던트 리그 등에서 최고미술교육을 받은 이유는?
▶ 이들은 유명한 에콜 데 보자르나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배운 이유는?
▶ 미국과 파리의 최고 아카데믹 미술교육을 받은 이후 지베르니로 간 까닭은?
▶ 전 세계 18개국에서 화가 들이 지베르니를 지속적으로 방문한 이유는?
▶ 이들이 귀국하여 인상주의 전파와 많은 제자를 길렀는데 그 이유?
▶ 1874년에 제1회 전시회 개최이후 비평가들이 악평과 조롱을 한 이유는?
▶ 1886년 제8회 전시회가 개최된 12년 동안에 인상주의가 성공한 이유는?
▶ 당시 진취적인 인상주의가 유럽보다 미국 쪽에서 인기가 높은 이유는?
▶ 지금 현대미술의 중심에서 인상주의가 대중의 인기를 끄는 이유는?
▶ 1874년 제1회 전시 이후 140년 경과된 인상파는 계속 번성할 것인가?
▶ 인상주의 이해와 작품관람을 위한 인상파 개념, 태동 및 기법의 특징은?
▶ 장식적 인상주의(Decorative Impressionism)란 그리고 관련된 화가는?
▶ 가이 로즈 등 장식적 인상파 화가들이 장기간 지베르니에서 생활한 이유는?
▶ 인상파 화가의 작품이 경매에서 최고가를 경신하는데 그 이유는?
▶ 우리나라 청년 화가들이 장차 인상주의에 진로를 가질 수 있겠는가?
▶ 일본의 화가와 화상들이 지베르니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사실은?
▶ 일본의 우키요에가 유럽의 인상파에 어떤 영향을 주었고 그 실상은?
▶ 일본의 우키요에가 1864년에 처음 소개된 배경과 만국박람회의 효과는?
▶ 일본화가가 인상파를 초기에 배우고 귀국하여 어떤 활동이 전개됐는가?
▶ 모네의 8,000개 작품 중 1,000점은 뒤랑 뤼엘이 주로 미국에 판매한 이유는?
▶ 유럽 화상과 미국 화가들을 통해서 많은 작품이 미국에 판매된 이유는?
▶ 뉴욕 메트로폴리탄 등 많은 작품이 소장된 이유와 장차 전 세계에 파급은?
▶ 장차 인상주의의 미래 추세는 어떠한 전망과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지?
▶ 인상주의는 현재의 인기처럼 불멸(不滅)의 화파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 현대미술의 중심인 인상주의 미술에 국내 미술인력 개발은 필요한가?
모네의 작품은 대부분 풍경화이었다. 따라서 그가 중무장을 하고 야외로 나가서 원하는 각도와 광선이 나올 때 까지 한없이 기다릴 나이가 지나자 자연을 집으로 옮겨 놓아야 갰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지베르니의 화려한 정원은 모네의 헌신적 노력으로 만들어 졌다.
모네는 어떠한 제자라도 두지 않는 것이 소신이었다. 단지 그들의 멘토가 되거나 관심사를 얘기하고 때로는 시어도어 로빈슨과 같은 귀국한 미국 화가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모네는 평생을 8,000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가 20세부터 사망한 해인 86세까지 작업을 계속했는데 이를 계산하면 매년 120점을 제작한 셈이었다. 이는 3일마다 평균 1점을 제작한 것으로 엄청난 다작(多作) 화가임에 틀림없다. 그의 작품 주제는 대부분 풍경화가 대부분이었지만 인상주의의 특징 중의 하나인 주제Motif의 다양성(多樣性)을 들 수 있다. 그는 프랑스 국내를 포함하여 영국과 네덜란드 등의 여러 장소를 옮겨 다니면서 과거 여러 대가들의 작품까지 연구하면서 그렸다. 또한 남이 생각하지 않은 연작(連作)등의 획기적이고 창의적인 작품으로 세상과 주위 화가들을 놀라게 했다. 이러한 결과는 바로 작품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지베르니를 찾아온 청. 장년 화가들은 모네의 그림에서 자신들의 먼 장래에 이상적(理想的)인 세계를 바꾸어 보았을 것이다.
114명의 지베르니아이츠의 작품을 본다면 서로 카피하듯이 모방한 화가는 없었다. 단지 모네의 작품을 통하여 크게 영감과 감명을 받거나 작품의 뉘앙스에 영향을 입었다. 또한 야외에서 같은 주제를 함께 나가 그린 적은 있었다. 그렇다면 흔히 인상주의의 특징으로 ◇ 주제의 다양성(多樣性) ◇ 화가의 자유스런 개별성(個別性), ◇ 표현방법의 무한성(無限性)즉 스트로크stroke의 변화 무상성(變化 無常性)을 말할 수 있다. 이 세 가지를 매트릭스로 조합할 때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무한한 작품들과 또한 서로 다르면서 독창적인 작품들이 창조될 수 있을 것이다.
지베르니아이츠 중에 지베르니에서 10년 이상을 생활한 화가들 들자면, 시어도어 버틀러는 모네의 사위이면서 41년, 멕모니스는 26년, 첵코슬로바키아의 라딤스키는 25년, 메리 페어차일드(멕모니스의 부인)는 20년, 루이스 리츠먼은 19년, 윌리엄 H. 하트는 16년, 리처드 밀러는 15년, 프레드릭 프리세크는 14년, 가이 로즈는 13년, 에텔 로즈(가이 로즈의 부인)는 12년, 릴라 케벗 페리(남편과 자녀와 함께 생활)는 11년, 로턴 파크는 12년, 폴 콩클링은 10년을 생활했다. 이들은 매년 주로 봄. 여름철 전후에 지베르니에서 작업을 하고나서 미국에 잠시 귀국하여 전시를 통하여 작품판매를 한 경우가 많았다.
당시 미국은 1865년에 남북전쟁이 끝나면서 유럽보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었고 부강해 졌다. 그리고 19세기 중반에 우세했던 허드슨 강파(派)의 보수적인 스타일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따라서 미국 미술가들은 청운의 꿈을 품고 유럽 땅을 밟았다. 이들은 예술의 수도인 파리에서 아카데미 교육을 받고 왕실이나 개인이 소장한 고대 및 르네상스 걸작들을 통해 역사와 문화를 접하고자 대거 진출했다.
또한 유럽은 1874년 이후에 인상주의 화가들에 대한 비평과 악평이 심했고 이러한 분위기가 이어져 온 반면에 미국은 당시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인상주의를 유럽보다 쉽게 받아들인 점이 있었다. 이는 1880년대 전후에 유럽의 인상주의 작품들이 처음으로 전시되기 시작하자 진보적인 미국 일반시민들의 호응이 대단하였기 때문이다.
1874년부터 파리에서 제1회 인상파 전시를 통해 주도적인 역할을 한 모네의 작품 가치와 장래의 전망을 지베르니아이츠는 초기부터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미국에서 가장 우수한 미술학교에서 수학했고 또한 파리에서도 유명한 학교에서 아카데미식의 교육을 받아 그냥 귀국하여도 장래가 보장되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지베르니로 찾아들어 모네의 가까이에서 새로운 인상파의 실체와 원형을 알고자 했다.
즉 새롭고 혁신적인 인상주의의 시대적 조류와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이들 지베르니아이츠는 알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화가들이었으나 조각가, 작가, 시인, 삽화가 및 사진사 등도 모여들어 예술가 공동체 즉 화가 마을을 조성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프랑스가 전쟁의 중심지가 되자 남았던 화가들은 거의 고국으로 되돌아갔다. 이 책에서는 지베르니를 거친 인상파 화가들 즉 모네와 114명의 ‘지베르니의 예술가들’인 지베르니 신봉자(信奉者) 즉 ‘지베르니아이츠Givernyites’는 어떤 이유로 지베르니로 갔는지? 또한 어떤 생활을 하면서 작품을 제작했는지? 등이 궁금했다. 그래서 그들의 아름다운 생애와 훌륭한 작품을 이 책을 통하여 소개해 보고자 한다.
독자 분들에게 먼저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책에서는 지베르니에 30년 동안 찾아온 미국 및 다른 나라의 화가 350명 중에서 약 ⅓인 모네를 포함하여 114명을 골라 편의상 방문시기별, 그룹별로 대별하였다.
도입부에 [인상주의의 개념(槪念)]과 [인상주의의 태동(胎動)], [미국(美國)의 인상주의] 및 [인상주의의 기법(技法)] 을 기술하였다.
- 모네와 그의 가족 화가 -3명
- 각 그룹에서 제외되는 화가들을 시기별로 1880년대의 초기(初期) -16명
- 1890년대의 중기(中期) -20명
- 1900년대의 후기(後期) -8명
- 미국의 부부 및 가족 예술가 중에서 1880년대 초기(初期) -8명
1890년대의 중기(中期) 17명, 1900년 이후의 후기(後期) 5명으로 -도합 30명
- 미국의 여류화가(조각가 포함)들 -14명
- 미국의 장식적 인상주의 화가들 -9명(가이 로즈를 포함하여 10명)
- 미국 외(外) 다른 나라 -14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