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를 겸한 절충주의 화풍
오늘날 존 싱어 서전트(1856-1925)는 역대 미국화가 중에 가장 뛰어난 화가중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18세인 1874년부터 파리의 저명한 에콜 데 보자르에서 아카데믹 사실주의(Academic Realism) 화풍을 익혔다. 같은 해에는 파리에서 모네가 주축이 되어 제1회 인상파전을 개최한 시기였다. 그는 인상주의(Impressionism) 화풍에 영감을 받았고 모네의 시골마을인 지베르니(Giverny)를 1885년부터 4년간에 걸쳐 방문하여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화가들은 생애를 통하여 일관되게 자기 고유의 화풍을 유지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화풍과 스타일을 여러 번 바꾸는 경향도 있다. 그리고 두 가지 이상의 화풍을 같은 시기에 구사하는 화가도 많다. 서전트는 일생동안 이렇게 두 가지 화풍을 동시에 겸한 절충주의(Eclecticism)로서 자신의 스타일을 개발하여 특색 있게 채택했다. 이러한 스타일은 1865년 남북전쟁 이후에 대부분 미국의 사실주의 풍조의 화가들이 대거 유럽에 진출하여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고 자유롭게 절충하는 화풍으로 발전되었다. 즉 프랑스에 배경을 둔 인상주의가 미국적인 사실주의 표현으로 확산된 것이다.
서전트의 화풍이 지닌 특징 중에는 무엇보다 모든 사물이 가지는 특색을 살리는 데 있었고 치밀한 드로잉과 신비한 명암대비 및 인상주의에서 강조되는 활달한 붓터치를 함께 이룬 점이었다. 그의 작품을 대하면 누구나 서전트 고유의 특색 있는 기법으로 명화다운 진수를 느끼게 되는 심미적 감흥을 받게 된다. 따라서 서전트의 작품은 고유의 특징을 단번에 구별할 정도로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
-유럽에서 미술의 유목민 생활
그의 부모는 미국의 의사인 아버지와 미국 부호의 딸이며 아마추어 화가인 어머니였다. 그의 출생지는 미국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두 여동생을 포함한 가족들은 수년간씩 유럽의 여러 나라를 마치 집시처럼 여행하면서 거주지를 옮겼다. 그래서 그는 유럽 전역에서 살아있는 현지교육을 받았다. 또한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등 외국어에 능통하며 부모가 힘쓴 교양교육으로 여러 가지 재능을 겸비했다. 그는 한마디로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미국에 상주하면서 스페인,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 유럽 전역을 여행하고 소위 미술을 위한 유목생활을 전개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찍부터 생활과 더불어 사고방식에서도 코즈모폴리턴 즉 세계주의자(Cosmopolitan)가 되었다.
-아마추어 화가로서 서전트를 격려한 어머니
이러한 성장배경에 덧붙여 그는 일찍 예술적인 소질과 경향을 나타내었다. 그의 어머니는 미국에서 모피상점을 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부유한 집안 출신이며 아마추어 화가로서 아들의 진로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었다. 부모는 출생지인 이탈리아에서부터 아들의 예술적 소질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두 화가에게 개인교습으로 미술을 배우게 했다. 가족들은 제1회 인상파전이 열리던 1874년에 파리로 이사를 하여 정착했다. 서전트는 예민한 감수성의 젊은 학생시절부터 ‘예술의 도시’인 파리에 정착한 것이 후일에 거장화가로 성장하는데 지름길이 되었다. 파리에서는 공립 미술학교인 저명한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이며 당시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리던 카롤루스 뒤랑의 스튜디오에서 18세의 나이에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더불어 그는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다. 당시 그곳에서 배운 화풍은 전통적이며 아카데믹한 스타일로 인물과 초상 위주의 사실주의 페인팅이었다.
-카롤루스 뒤랑보다 먼저 영국에서 뢰종 도뇌르 훈장을 받다.
서전트는 스승인 카롤루스 뒤랑의 권유로 그가 스페인 거장화가들의 열렬한 팬이라는 취향에 영향을 받았다. 즉 스승은 과거 스페인에서 습작을 통하여 널리 공부한 화가였다. 스승이 존경하는 벨라스케스(Velazquez 1599-1660)는 신고전주의 화풍이었지만 150년 후에 발아된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귀감을 주게 된 화가였다. 서전트도 스페인 화가들을 연구하기 위하여 1879년에 마드리드에 위치한 프라도를 방문하고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회화(繪畵 Painting)가 취급하는 여러 가지 모티브 중에서 음악이 포함된 주제는 중요한 테마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서전트가 많이 그린 음악적 소재의 작품은 시초가 1879년에 스페인 여행에서 만들어 진 것이다. 스페인의 무희와 배경에 반주자를 그린 『엘 할레오, 1882』는 바로 그러한 작품이었다.
그 외에 서전트는 1880년에 네덜란드를 여행하고 프란스 할스로부터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그의 작품으로부터 단순하게 그리는 법과 형태와 색채에서 무엇을 가감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다른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는 작업은 그에게 또 다른 힘찬 교훈이 되었다. 왜냐하면 작품을 모사할 때는 거장화가가 그린 그림의 구성법과 함께 색채의 배합에 대한 기법도 실제로 터득하기 때문이다. 서전트는 그가 파리를 떠나 비장한 마음으로 런던에 있을 때에도 파리 살롱과 파리 만국박람회에 작품을 제출하면서 전시 또한 이어갔다. 그는 1889년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뢰종 도뇌르(Legion of Honour)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의 스승인 뒤랑은 서전트보다 한 해가 늦은 1890년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같은 훈장을 받았다.
-인상주의 거장화가 모네와 서전트의 친교
서전트는 모네가 주도한 인상주의에 대하여 영향을 받은 것은 여러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모네가 주도한 최초의 인상파전은 1874년 파리의 나다르 아틀리에에서 30명이 165점을 출품하여 개최되었다. 당시 서전트는 18세로 파리에 있었고 에콜 데 보자르의 학생이었다. 2년 후인 1876년에 파리의 거상(巨商)인 뒤랑 뤼엘이 모네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면서 자신의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는 모네를 처음으로 만났다. 이어서 모네와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까지 함께 만나 친해졌다.
서전트는 스승이 가르친 기법 중에 브러시 드로잉(Brush Drowing) 등 인상주의가 추구하는 기법에 바로 적용되는 붓놀림을 배웠다. 즉 아카데믹 사실주의의 기법에는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기 전에 연필이나 목탄 등으로 먼저 드로잉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스승은 캔버스 위에 직접 붓으로 드로잉을 하는 브러시 드로잉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그는 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붓터치를 신선하고 활달하게 만들었다.
당시 파리에서는 인상파의 전시가 혁명적인 사건으로서 받아지면서 전위예술(前衛藝術 : 아방가르드 Avangarde)로 간주되어 온갖 핍박과 혹평이 가해졌다. 또한 종래 이름난 미술비평가나 프랑스 정부인사 및 미술학교의 유명 교수들도 이들에게 날카롭고 가혹한 비평의 메스를 가했다. 1874년부터 1886년까지 여덟 번의 인상파전이 개최되고 난 후에 인상파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고 해체되는 운명에 처해졌다.
19세기 후반에 파리에서 발아된 인상파는 체제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인상파의 기법과 이론을 가르치는 학교나 스튜디오도 없었다. 8회의 인상파 전시에 후반 3회를 불참하던 모네는 1883년에 일찍 파리를 떠나 시골로 찾아 갔다. 즉 모네는 파리에서 서북쪽으로 80km가 떨어진 지베르니(Giverny)라는 시골마을에 드디어 정착하여 평생의 염원을 찾기 시작했다.
따라서 서전트와 같이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와 줄리앙 아카데미 등에서 종래의 아카데믹 사실주의 기법을 공부하면서 감수성과 예측력이 뛰어난 청·장년 화가들은 당시 혁명적인 인상파에 엄청난 영감을 받았다. 그러나 인상파가 해체된 이후에는 이들은 모네의 지베르니 외에는 찾아갈 곳이 없었다.
오늘날 인상주의는 과거 기존 화풍에 대하여 반작용에서 생긴 것으로 전위예술에서 출발하여 차츰 고전의 클래식 화풍이 되는 과정으로 발전했다. 즉 1874년부터 1886년까지 8차례 인상파 전시기간인 12년, 1885년부터 1914년까지 모네의 지베르니에서 형성된 국제적인 화가마을에서 인상주의를 실험하고 체제를 이룬 30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프랑스가 전쟁터의 중심이 되자 부득이 미국 등 18개국에서 모여든 350명의 지베르니아이츠(Givernyites)가 각기 자국으로 귀국하여 ‘제2의 지베르니’를 이룬 기간을 포함하여 도합 140여년이라는 시일이 흘렀다.
서양 미술사의 흐름에 모네의 초기 인상주의(初期 印象主義)로부터 시냑크 등의 신인상주의(新印象主義), 고흐·고갱·세잔느 등의 후기 인상주의(後期 印象主義), 쇠라 등의 점묘주의(點描主義), 칸딘스키가 창시한 추상파(抽象派), 뭉크 등의 표현주의(表現主義), 앙리 마티스 등의 야수파(野獸派)로 현대미술이 파생되었다.
위와 같은 현대미술은 존폐의 부침이 있었으나 초기 인상주의는 모네와 350명의 지베르니아이츠가 1885년부터 1914년까지 지베르니에서 국제적인 화가마을(Art Colony)을 형성하고 30년간 완성해 나갔다. 그 이후 귀국하여 미국 등지에서 번성을 이루면서 드디어‘불멸의 화풍’이 되었다.
-미국화가 중에서 최초로 지베르니의 모네 하우스를 찾아간 서전트
모네(1840-1926)는 1883년부터 1926년까지 생애의 절반 43년간을 지베르니에서 지베르니아이츠들과 함께 이어갔다. 서전트는 1885년에 유럽에서 유학하던 미국화가들 가운데 최초로 모네를 찾아간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다른 두 사람의 화가는 윌러드 릴로이 메트캐프(1858-1925)와 시어도어 로빈슨(1852-1896)이었다. 메트캐프는 4년간 지베르니에서 생활하고 난 후에 미국으로 귀국하여 ‘10인 화가회 The Ten’라는 미국에서 최초로 인상파 그룹을 창설했다. 그는 파리의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저명한 블랑제와 르페브르 밑에서 수학한 화가였다.
로빈슨은 8년간 지베르니에서 생활하고 귀국하여 ‘미국 인상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서전트가 배운 에콜 데 보자르에서 스승 카롤루스 뒤랑 밑에서 수학했던 화가였다.
이러한 세 명의 화가 외에도 1885년부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1914년까지 30년 동안 모네의 지베르니에서 생활한 미국 화가는 300명이었다. 전 세계 18개국에서는 350명이 모네의 초기 인상주의 스타일을 같이 실험하여 익힌 후에 모국으로 귀국하여 인상파의 화가와 교사로서 정통 인상주의 기법을 전파해 나간 사람들이다. 이러한 화가들을 지베르니아이츠(Givernyites)라고 칭하고 있다. 필자는 2013년과 2015년에 이들의 문헌자료가 남아 있는 114명을 골라 『모네와 지베르니아이츠, 전2권』과 이어서 『모네와 114명의 지베르니아이츠』단행본을 발간하였다.
-국내 처음으로 존 싱어 서전트에 대한 발간 서적
현재까지 미국이 독립한 이후 역사상으로 가장 유명한 화가를 거론할 때 단연코 존 싱어 서전트가 한 손 안에 꼽히고 있다. 한마디로 그는 서구의 유명 거장화가에 비견하여 손색이 없는 우람한 존재가 되었다. 그 예로 현재까지 미국 Amazon 등에서 소개되고 있는 서전트에 관한 종이책은 미국, 영국,프랑스 등에서 발간되어 100여권에 달하며 전자책도 근간에 20여권이 발간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는 서전트에 대한 출판물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사실 서전트가 활동한 시기는 18세인 1874년부터 세상을 떠난 1925년까지 51년간이었다. 즉 그의 처음 활동 시부터는 140년이라는 세월이 경과되었다. 그러나 국내 미술계의 시선은 세잔느(1839-1906), 고갱(1848-1903), 고흐(1853-1890) 등 유럽의 후기 인상파 화가들에게 시선이 몰리고 있다. 그리고 19세기 전후의 동시대인이었으나 서전트에게 크게 미치지 않았다.
필자는 2013년부터 국내에서는 생소한 ‘미국의 인상주의 화가들’에 대하여 시리즈로 소개하는 책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모네와 114명의 지베르니아이츠』등 12권(체험판 4권은 별도)을 발간하였고, 더불어 15c-20c까지의 거장화가 100명들이 평소에 가장 애호하던 모티브로 그림을 남긴 ‘어머니’와 ‘독서’에 대한 명품을 선정하여 발간했다. 즉『15c-20c의 거장화가 100명, 마음의 우주, 어머니』와 『15c-20c의 거장화가 100명, 생각의 우주, 독서』 라는 전자책 2권이다.
미국 인상주의 화가 가운데 『모네와 가이 로즈』(Guy Rose 1867-1925)는 2014년에 단행본으로 전자책을 발간하였다. 로즈는 모네의 정착지인 지베르니에서 16년간 작품 활동을 전개한 화가로서 파리의 줄리앙 아카데미에서는 재학중에 모든 상을 휩쓸어 재능이 탁월했고 귀국하여 미국 인상주의를 이끌어 간 지도자였다.
이어서 이번에 『미국의 인상주의 거장화가, 존 싱어 서전트』를 단행본으로 전자책을 발간하고자 한다. 국내에서 서전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책은 처음으로 발간하게 되어 다소 주저되는 심정이다. 앞으로 계속해서 서전트에 대하여 여러 장르의 관련 서적이 출간된다면 미술전문가는 물론이고 일반인들에게도 매우 재미있고 유익할 것이 분명하다.
-[서전티즘]이란 자신만의 화풍으로 혁신적인 작품 구성
서전트는 22세 나이에 1878년 파리살롱의 풍경화 장르에서 처음으로 장려상을 받았다. 프랑스 북쪽의 노르망디 해안에서 그린『껑깔르의 굴채집자』라는 작품이다. 사실 이 작품은 1874년에 파리에서 제1회 인상파 전시가 있은 후로서 그는 벌써 인상주의 화풍을 과감히 시도한 작품이었다. 서전트는 1879년부터 차츰 자기 이름의 초상화 작품이 등장하게 된다. 서전트는 작품의 구도와 구성에 있어 남다르게 혁신적인 시도를 하였고 대담한 스타일을 취하는 편이었다.
파리의 평론가들은 가끔 그가 제작한 작품이 크게 혼란스럽다고 비평한 적도 있었다. 보통 대형 캔버스의 크기이고, 캔버스 평면을 어떤 때는 텅 비어 있는 듯한 구도로 공간처리를 과감히 하였으며, 드가의 작품처럼 주제의 일부를 자르거나 생략하는 구성과 또한 짙은 그림자를 투영하는 기법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스타일은 아주 독특한 편이어서 서전티즘(Sargentism 서전트 스타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미술학자도 있었다.
서전트는 작품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 1882』에서도 초상화의 구성은 가히 혁신적이었다. 2.2미터나 되는 정사각형의 대형 캔버스에 네 명의 자매가 다른 방향으로 시선이 돌리고 있고 한쪽 공간은 텅 비어 있는 듯한 구성을 과감히 시도했다.
1884년에 그려진 파리 사교계의 이름난 미인 초상화인 『마담 X의 초상』에서도 파격적인 구성을 보였다. 이 작품은 19세기 말 서구의 초상화 작품 중에서 우아한 기품에 있어 가장 극치를 보이는 명작이 되었다. 옆얼굴을 그린 프로필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마치 이집트의 네페르티티(Nefertiti) 왕비에 버금가는 것이다. 그녀는 고대 이집트의 제18왕조 아케나톤 왕(재위 : 기원전 1379년-1362년경)의 왕비였다. 마담X에서 모델의 벗겨진 어께와 시선을 몰입시키는 목의 라인과 심연같은 검은색 이브닝 가운은 당시 프랑스 사회에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 작품이 파리살롱에 전시되었을 때 파리의 미술 비평가들은 외설적인 작품으로 해석하여 화제를 일으켰다. 정작 모델이 된 그녀 자신과 어머니 등의 가족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단순히 익명의 마담X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궁금증으로 인하여 금방 누구인지가 공개되어 버렸다. 결국 이러한 스캔들로 서전트를 향하여 일반 대중과 언론이 분노하였고 미래의 고객까지 잃어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데 1915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만국박람회에 전시되었고, 다음 해 뉴욕 전시에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OMA)이 1,000파운드로 매입하였다. 작품이 제작된 30년 이후의 일이었으나 현재는 미국의 최대 미술관인 MOMA의 상징적인 대표작이 되었다. 모델의 가족들은 이 작품을 당시 매입하지 않은데 대하여 크게 후회하였다고 전한다.
다른 사례는 그가 이탈리아 피렌체 근처의 카라라 채석장을 방문하고 『카라라 채석장으로부터 대리석 내리기, 1911』라는 작품을 그렸다. 그는 현장에서 크게 영감을 받아 기묘하면서 역동적인 구성으로 인물과 풍경을 극적으로 융합하였다. 이 작품은 현재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파리에서 런던으로 이주한 젊은 초상화가의 인생역정
서전트는 파리에서 매우 불리한 여건이 되자 29세의 젊은 나이로 1885년에 마침내 런던으로 이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의 결과는 화가의 생애 전체로 두고 볼 때 그에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즉 영국에서의 활동은 화가경력에서 새로운 전망과 활로를 초래했다. 그는 이 시기에 특히 야외 페인팅에 대한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고 차츰 원기를 회복해 나갔다. 1887년경에는 특히 수채화에 대하여 오랫동안 가졌던 흥미가 다시 새로워지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서전트가 시도한 모네의 인상주의 화풍은 이미 1878년의 작품인『껑깔르 해안에서 굴채집』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1885년에 모네가 정착한 지베르니를 처음 방문하고, 영국에 이주한 3년 뒤인 1888년부터 인상주의 페인팅을 본격적으로 시도하게 된다. 영국에서 작품 활동은 오히려 파리생활에서 받던 긴장의 연속에서 마음자세에서 부터 벗어나 크나큰 휴식을 가져왔다.
그는 젊은 초상화가로서 파리에서 자원하여 그린 『마담 X로 인하여 몸과 마음으로 엄청난 시련과 어려움을 직접 경험했다. 그 후에 그가 초상화를 그리다가 도중에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시 전체의 그림을 지우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숙녀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꼬박 3주의 날짜를 보낸 적도 있었다. 충분히 그려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다시 결심하여 전체를 지우고 새로 그린 것이다. 이때 화가의 면전에 앉은 모델인 시터(Sitter)의 숙녀도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서전트는 1902년 영국에서 이탈리아 출신의 절친한 초상화가인 안토니오 만치니(1852-1930)를 알라 프리마 기법으로 1시간만에 즉석에서 유화로 그려 선물로 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아 한 친구는 작품을 스케치 현장의 식당 요리장에게 준 사실을 알았다. 그는 말없이 작품을 되받아 소장하다가 23년 후인 1925년, 바로 서전트가 임종한 그해에 이탈리아의 유명 미술관에 이 작품을 보낸 적이 있었다. 서전트는 “나는 초상화를 그릴 때마다 한명의 친구를 잃는다.”라는 어려움을 실토한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서전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거친 비평에 대하여 굳건한 의지를 가지고 주저하지 않았다. 마치 모네가 인상파에 대한 엄청난 혹평을 이겨낸 것처럼 그는 자신을 그림으로부터 객관적으로 떨어져서 관조하는 능력과 또한 엄정히 중립적으로 쳐다보는 시각을 가졌다. 이것은 그가 젊은 나이에 『마담 X로부터 시련을 당한 결과로 생긴 내성(耐性)과 신념이었다.
-미국과 영국 및 프랑스에서 서전트에 대한 구애(求愛)
1876년에 서전트는 고국에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처음으로 여행을 하였다. 이때 나이가 20세로 미국 시민권을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그는 미국시민으로서 유럽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평생을 외국에서 살아가야 하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실제적으로 영국에서 영주하는 실정이었으나 귀화하지 않았다.
그가 미국에서 처음 개최한 개인전은 제1회를 1909년에, 제2회를 1912년에 모두 뉴욕의 노에들러 갤러리에서 열렸고 대단한 칭송을 받았다. 당시 전시된 작품은 보스턴 미술관과 뉴욕의 브루클린 미술관에 각각 매입되었다.
서전트가 영국에 이주하여 활동을 시작하자 당시 거주하고 있는 영국과 고국인 미국에서 모두 서전트에 대한 구애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의 왕인 에드워드 7세(1841-1910)는 서전트가 1885년부터 영국에 있으면서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지 않고 미국의 보스턴 공공도서관의 벽화 제작을 위하여 1890년부터 주문을 받아 오래토록 거주하면서 장기 체류하는 것에 대하여 우려를 했다. 1907년에 서전트의 관심이 차츰 고국으로 기울자 왕은 그를 영국의 기사(騎士)로 봉하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이미 서전트는 1897년에 영국의 왕립 아카데미 정회원으로도 영예롭게 선출되어 있었다.
미국 미술계는 서전트가 미국시민이지만 유럽에서 활동을 하고 있고 특히 영국에서 영주하려는 움직임에 비상수단을 강구했다. 서전트가 23세인 1879년에 뉴욕의 국립디자인 아카데미에서 최초의 전시회를 개최하도록 하였다. 그 이후 1888년에 보스턴 등지에서 전시를 개최하면서 전시작품도 미술관 등지에서 매수되도록 했다. 또한 1890년부터 보스턴 공공도서관 및 미술관, 하버드대학 미술관 등에서 수많은 벽화 작품을 주문하여 그를 장기 체류시켰다. 특히 1903년에 미국 정부가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 1917년에는 예술 후원자인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여사를 통하여 아일랜드가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그리도록 주문까지 했다.
이와 같이 서전트의 명성이 차츰 비례적으로 높아지자 영국과 미국 두 나라에서는 서로 예술적인 구애를 던지는 훌륭한 화가가 되었다.
1885년에 서전트가 파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영국으로 떠났지만 프랑스 정부에서도 1889년에 서전트에게 최고 영예인 뢰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또한 파리살롱의 지속적인 전시와 수상은 물론이고 파리 만국박람회에서도 그를 열렬히 환대했다. 이와 같이 마담X의 파문은 결국 그로 하여금 대서양을 가운데 두고 유럽과 미국에서 최고의 화가로 성장시킨 역전의 계기가 된 것이다.
-일생동안 유화 900점과 수채화 2,000점 등 창작
서전트의 본격적인 페인팅은 18세에 파리에서 출발하여 69세로 런던에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51년 동안 이어졌다. 그는 900점의 유화 작품을 그렸다. 그리고 2,000점의 수채화 및 추가로 수많은 스케치와 드로잉 작품을 남기고 있다. 특히 그는 전 유럽과 북미, 중앙아시아, 북 아프리카 등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면서 직접 현장에서는 주로 수채화와 드로잉 및 유화작품을 그렸다.
이처럼 훌륭하고 많은 수채화를 여러 장소의 현장에서 직접 그린 전문화가는 드문 것이 사실이다. 그가 그린 수채화는 먼저 다른 화가에 비하여 모티브에서 크게 달랐다. 남들이 보면 하찮은 거리풍경과 낡은 건물, 허물어져 가는 고대도시의 한 단면, 거리에서 소외된 사람들, 사라져 가는 풍속의 모습, 알프스에서 보는 즐비한 작은 하천과 암석 덩어리, 들판에 이름 없는 하천과 구석진 곳에 핀 야생화, 농가에 흔히 눈에 뛰는 가축 등에 시선이 미쳤다.
수채물감으로 그린 인물화와 풍속화는 물론이고 특히 들판과 산으로 평소의 생활에서 일탈(逸脫)하여 낮잠 자는 사람들의 평범하고 자연스런 모습도 그려 나갔다. 이 작품은 화가 자신과 관람자에게 안일(安逸)이라는 편안함을 선물해 주었고 요사이 말로는 마음의 치유 즉 힐링(Healing)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한마디로 그의 타고난 천성은 온화한 마음과 풍부한 감성이라는 미적 안목을 소유했다. 더불어 이를 묘사할 줄 아는 특출한 기량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 말로 연민의 정을 지닌 화가였음을 증명했다. 또한 삶의 전반에 아끼고 베풀며 따뜻하게 여기는 즉 사랑하는 마음이 스며있는 화가임에 틀림없었다.
서전트의 초상화는 그가 수채화에서 그린 소박한 대상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주로 주문에 의하되 왕족과 귀족 및 대통령을 포함한 상류층의 사회 저명인사를 주로 그렸다. 그의 남긴 900점 유화작품 중에 대부분은 화려한 의상과 장엄한 배경속에 그려진 부유층의 초상화로 일부 비평가들은 이점에 대하여 호의적인 평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가진 초상화의 비범한 재능에 비추어 여러 계층의 훌륭한 작품을 후세에 남긴 사실은 이러한 비평을 잠재우는데 충분한 것이 되었다.
서전트가 가장 왕성하게 수채화를 제작한 시기는 1902년경 이후였다. 즉 그의 나이 44세로 1900년대 이후의 일이다. 당시 그는 가장 위대한 앵글로 아메리칸의 초상화가로서 평가를 받고 있었고, 동시에 수백 점의 이탈리아의 베니스 풍경에 관한 수채화를 그렸다. 퇴색하는 베니스의 고대도시에서 운하의 상징인 곤돌라를 묘사하고 눈부시게 화려한 물위의 빛을 대조적으로 그렸다.
베니스의 작품이 소장된 뉴욕의 브루클린 미술관은 서전트의 작고 느슨한 스타일의 작품이 주로 소장되어 있다. 그 대신 보스턴 미술관의 수집품은 크고 웅장한 작품이 많다. 관람객들은 베니스의 도시 풍경과 오래된 건축물이 물위에 흔들거리는 광경을 실감 있게 보게 된다. 또한 그림 속에 이탈리아의 정원에서 반짝이는 나무 사이로 화려한 빛이 내려앉은 광경도 보였다. 그는 일생의 후반기에 미국의 서부와 메인 주, 플로리다 주를 다니면서 많은 풍경의 수채화를 그렸다.
서전트는 유럽과 미국의 각지에서 초상화 주문을 받으면 직업적인 압박으로 몹시 지쳤다. 그래서 여행을 통하여 장소를 이전하면서 주로 불특정 인물과 풍경의 주제를 그릴 수 있도록 피해 다녔다. 또한 가끔 친척 및 친구들과 여름철에 알프스를 여행을 하면서 인기 있는 풍경화와 인물화 작품을 많이 남겼다.
1890년부터 보스턴의 공공 도서관을 위한 벽화작업을 주문받고 여러 번에 걸쳐 그렸으나 이를 마친 시기는 생을 마감한 때인 1925년으로 당시 그의 거주지는 런던이었다.
서전트는 69세의 독신으로 비교적 화려한 예술적 생애를 마친 화가이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은 잘 알려지고 있지 않다. 단지 다작 화가의 수많은 작품을 통하여 그가 생각하며 행동한 여러 가지 진면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필자가 미국의 인상주의 화가들을 지난 3년 동안 여러 책을 통하여 소개하면서 존 싱어 서전트라는 화가의 단행본을 편집하여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간하는데 고심이 따랐다. 방대한 자료와 기록을 찾아보면 귀중한 스토리와 일화가 점점 더해져만 갔다. 또한 국내에서 처음으로 서전트의 단행본이 발간되는데 대하여 미술계 뿐 아니라 일반인께서도 관심을 보여 줄지 궁금하였다. 앞으로 거장화가의 많은 자료를 연구하면서 장르별로 속편을 내어 볼 예정이다.
2015.10월, 안양 스튜디오에서,
저자 조영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