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별, 깨어나는 그림자
2024년 가을, 지리산.
단풍은 절정에 달해, 마치 산 전체가 거대한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도시의 소음과 회색빛에 익숙했던 강철민의 눈에도 그 풍경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름다움을 감상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발밑에 펼쳐진 이 광활한 대자연은, 그에게 정복해야 할 '미개발 부지'일 뿐이었다.
“강 대표님, 보시는 것처럼 입지 조건은 국내 최고입니다.”
헬멧을 쓴 현장 소장이 지형도를 펼쳐 보이며 아첨하듯 말했다. 강철민은 선글라스 너머로 지형도를 흘긋 쳐다볼 뿐, 그의 시선은 이미 지리산의 심장부, 망천애(望天崖)라 불리는 아찔한 절벽을 향해 있었다.
“저곳까지 포함해서, 이 일대 전부를 밀어버릴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서늘한 가을바람보다 차가웠다. 아쿠아 캐피털 코리아의 대표 강철민. 그의 이름 앞에는 늘 ‘M&A의 귀재’, ‘얼음 심장’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실패를 몰랐고, 감정 따위는 사치라 여겼다. 그에게 지리산은 천혜의 자연이 아니라, 아시아 최대 규모의 프리미엄 리조트, ‘아쿠아 유토피아’를 세울 최적의 캔버스였다.
“하지만 대표님, 저쪽은 국립공원 특별보호구역인데다, 로비도 쉽지 않을 겁니다.”
“돈으로 안 되는 건 없소. 시간이 걸릴 뿐이지.”
강철민이 손짓하자, 수행원이 서류 가방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 소장에게 건넸다. 소장의 얼굴에 탐욕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들이 딛고 선 땅 밑 아주 깊은 곳에서, 천 년간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희미하게 눈을 떴다. 인간의 탐욕이 내뿜는 탁한 기운은, 그 존재에겐 달콤한 자양분과도 같았다.
같은 시각, 지리산 어딘가.
“산하준! 너 또 벌통 앞에서 밤샐래?”
어머니의 잔소리가 아니었다면, 산하준은 정말로 밤을 샐 뻔했다. 그는 자신의 생태농장, ‘꿀안개 골짜기’에서 막 수확한 토종벌꿀의 당도를 측정하고 있었다. 그의 손길이 벌통에 닿자, 윙윙거리던 벌들이 신기하게도 잠잠해졌다. 마치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벌들의 미세한 날갯짓 소리로 그들의 건강 상태와 기분까지 알아채는, 기묘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요즘 들어 애들이 좀 예민하단 말이지.’
평소와 다른 벌들의 불안한 기운이 마음에 걸렸다. 그때였다. 그의 손목에 찬, 벌집 문양의 낡은 팔찌가 아주 희미한 온기를 띠며 미세하게 진동했다. ‘어?’ 하고 팔찌를 들여다보는 순간, 진동은 거짓말처럼 멈췄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서울, 한남동의 떡 카페 ‘운무’
운무아는 라이브 방송 카메라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가 갓 쪄낸 오색 무지개떡은 단순한 떡이 아니라 예술 작품이었다.
“자, 여러분. 이 영롱한 빛깔 좀 보세요. 지리산의 새벽안개를 품은 쌀로 만들어서 식감이 남다르답니다.”
수십만 팔로워를 거느린 푸드 인플루언서. 그녀의 손에서 빚어진 곡물은 언제나 최상의 맛과 형태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방송이 끝나자 그녀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졌다. 완벽주의자인 그녀는 최근 들어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할머니가 해주시던 ‘그 맛’, 기억 속 아련한 풍요로움의 맛을 재현할 수 없었다.
‘뭔가… 가장 중요한 게 빠졌어.’
그녀가 복잡한 심경으로 주방 조리대를 닦던 순간, 허리에 찬 곡물 모양의 낡은 노리개가 스스로 흔들리며 찰랑, 맑은 소리를 냈다.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였다. 놀라 노리개를 움켜쥐자, 손바닥 안에서 따스한 기운이 심장으로 흘러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가슴이 이유 없이 두근거렸다.
경기도의 한 동물보호소
“괜찮아, 이제 괜찮아.”
칠성이는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진 유기견의 상처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수의사인 그녀의 손길에는 특별한 힘이 있었다. 약물이나 수술로도 차도가 없던 동물들이, 그녀의 곁에만 있으면 기적처럼 회복되곤 했다. 그녀는 동물의 눈을 보면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미안해, 더 일찍 발견해주지 못해서.’
치료를 마친 그녀가 지친 몸을 이끌고 창밖을 보았다. 도시의 삶은 가끔 숨이 막혔다. 마음 같아선 모든 걸 버리고 지리산의 사촌 오빠, 상림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 보호소의 모든 동물들이 일제히 불안한 듯 울부짖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위협을 느낀 것처럼. 그리고 칠성이의 귓가에, 수많은 동물의 비명이 뒤섞인 날카로운 이명이 파고들었다. “으윽!”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지리산 상림 한의원
상림은 고서(古書)에 코를 박고 있었다. 그의 한의원은 단순한 치료 공간이 아니라, 지리산의 모든 약초에 대한 데이터가 집약된 연구소였다. 그는 전통 지식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칠성이 녀석, 또 사고 친 건 아니겠지?”
오늘따라 사촌 동생 칠성이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는 자신의 신중함과 정반대인,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칠성이를 늘 걱정했다. 그가 약초 향이 가득한 향낭을 만지작거리던 순간, 서재의 모든 약초 표본들이 일제히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그러나 땅은 고요했다. 떨리는 것은 오직 생명을 가진 식물들 뿐이었다. 상림의 눈이 커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자연의 경고임을 직감했다. 땅의 기운이, 지리산의 생명력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강남의 퓨전 한식 레스토랑 ‘당솔’
“셰프님, 오늘 예약 만석입니다!”
주방은 전쟁터였지만, 당솔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모든 것을 통제했다. 그의 손에서 창조된 음식은 손님들의 혀를 마비시킬 정도의 마법 같은 맛을 냈다. 그는 지리산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오직 자신의 성공을 위해 달려왔다. ‘미슐랭 스타’, 그것이 그의 유일한 목표였다.
그가 마지막 플레이팅을 위해 소스를 뿌리던 순간, 갑자기 눈앞의 모든 재료들이 색을 잃고 잿빛으로 변하는 환영을 보았다. “헉!” 놀라 뒷걸음치자 환영은 사라졌지만, 그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희미하고 역한 냄새. 그것은 ‘상한 음식’의 냄새가 아니었다. 생명력이 죽어가는, 대지의 썩은 냄새였다.
지리산 깊은 곳, 달빛마을
마을의 가장 나이 많은 촌장은 낡은 족자를 펼쳐놓고 깊은 시름에 잠겨 있었다. 족자에는 오성(五星)을 상징하는 다섯 개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부터, 그 다섯 문양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며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천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각성’의 징조이자, ‘위기’의 전조였다.
“때가 되었는가… 별의 아이들이 깨어날 때가…”
그리고 그 시각, 땅속 가장 깊은 어둠 속.
인간의 탐욕을 자양분 삼아 천 년의 잠에서 깨어난 그림자 군주는 만족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아쿠아 캐피털이 파헤칠 지리산의 상처는, 자신의 힘을 해방시킬 완벽한 통로가 될 터였다.
‘돌아갈 것이다. 모든 것을… 인간이 없던 태초의 그 시간으로.’
하지만 그의 부활은, 또 다른 존재들의 각성을 촉발시켰다. 자신에게 대항할 유일한 존재들. 별의 기운을 품고 대지에 흩어져 살아가는, 그 지긋지긋한 수호자의 후손들.
그림자 군주의 사악한 의지가 지맥을 타고 퍼져나갔다.
“찾아내어… 그 빛을… 삼켜버려라.”
지리산의 밤이 유난히 어둡게 내려앉고 있었다. 산하준, 운무아, 칠성이, 상림, 그리고 당솔. 서로 다른 장소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던 다섯 명의 청년은 아직 알지 못했다. 자신들의 혈관 속에 잠들어 있던 거대한 운명이, 그리고 그들을 노리는 차가운 그림자가 동시에 깨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을 하나로 이끌 ‘별이 부르는 소리’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