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문학상(Nobel Prize in Literature)(1950) : 러셀은 소설가는 아니지만, 논리와 종교, 철학에 관한 다양한 글을 썼고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950년 노벨 문학상(Nobel Prize in Literature)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는 생전에 이미 학문적 성취와 명예를 인정받은 철학자로써 노벨문학상 전후에도 드 모건 메달(De Morgan Medal)(1932), 실베스터 메달(Sylvester Medal)(1934), 칼린가 상(Kalinga Prize)(1957), 예루살렘 상(Jerusalem Prize)(1963)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영어고전(English Classics)과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문학여행을! B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1806~1873)이 대부(godfather)를 맡은 이유는? : 영국의 철학자(English philosopher)이자 정치 경제학자(political economist), 자유당 당원(A member of the Liberal Part)이자 국회의원(Member of Parliament) 겸 공무원(civil servant), 당대의 석학들과 대화하며 자신만의 공부법을 정립한 신동이자 수많은 명저를 집필한 천재 작가... 일평생 다양한 직업을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1806~1873)은 친구의 부탁으로 버트런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1872~1970)의 대부(godfather)를 맡았습니다. 비록 밀은 대부를 맡은지 3년 만에 사망했기 때문에 러셀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진 못했습니다만 러셀은 밀의 저서를 읽으며 자신의 대부를 잊지 않았습니다. 러셀의 아버지 존 러셀이 밀에게 대부(godfather)를 부탁한 이유는 바로 그가 ‘무신론자’였기 때문입니다. 러셀 또한 확고부동한 무신론자로써 자신의 철학을 완성하였으니, 불과 3년의 인연이지만 대부 밀에게 받은 영향이 결코 전무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러셀의 찻주전자(Russell's china teapot)(1952) :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신은 존재하는가?(Is There a God?)(1952)를 통해 우주의 항성 사이를 도는 찻주전자란 개념을 유추(類推), 즉 아날로지(Analogy)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트런드 러셀을 반박하고 싶다면? 무엇의 존재가 존재한다는 증거는 신을 믿는 자들이 제시해야할 것이며, 이를 증명책임(Burden of proof) 혹은 거증책임(擧證責任)이라 합니다. 결론적으로 버트런드 러셀은 기존의 기독교가 신의 존재를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할 수 없다’는 논리로 믿는 것을 비판한 것입니다. 신은 존재하는가?(Is There a God?)(1952)는 2만자가 채 되지 않는 짧은 글로, 원문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러셀은 신은 존재하는가?(Is There a God?)(1952)를 발표하고 6년 후 증거의 부재, 부재의 증거, 그리고 무신론자의 찻주전자(Absence of evidence, evidence of absence, and the atheist's teapot)(1958)에서 자신의 종교관에 대해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신하는 무신론자’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신이 ‘거의(just as unlikely)’ 없다고 유화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만, 그의 불온한(?!) 사상은 당대의 학계와 종교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러셀이 제안한 반증 할 수 없는 비유(non-disprovable analogies)는 이후 칼 에드워드 세이건(Carl Edward Sagan)(1934~1996)이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The Demon-Haunted World)(1995)에서 제안한 내 차고 안의 용(The dragon in my garage)을 비롯해 보이지 않는 핑크 유니콘(Invisible Pink Unicorn),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the Flying Spaghetti Monster) 등의 패러디 종교(Parody religion)로 확장되며, 유신론자를 비판하거나, 때론 조롱하는 논리 체계로 발전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스승 : 분석철학의 창시자(the founders of analytic philosophy)로 버트런드 러셀을 비롯해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고틀로프 프레게(Friedrich Ludwig Gottlob Frege)(1848~1925)와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1889~1951), 삼인을 꼽습니다. 버트런드 러셀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1889~1951)을 제자로 받아 박사과정을 지도하였으며, 비트겐슈타인의 스승이자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학문적 동반자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우수한 학업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8남매 중 장남과 차남, 삼남이 각각 자살하는 등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적 문제가 많았습니다만, 러셀은 그가 이를 잘 극복할 수 있도록 개인적인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아버지가 사망한 후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떠나 노르웨이에서 은둔하며, 자신의 대표작이자 생전에 출판한 유일한 철학서 논리철학 논고(論理哲學論考,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1921)를 출간하였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World War I)(1914~1918)이 발발하는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군에 자원입대해 군인으로 복무해 완성이 늦어졌지요. 러셀이 직접 서문을 썼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이 책을 통해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제1차 세계 대전(World War I)(1914~1918)으로부터 십여 년이 흐른 1929년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World War I)(1914~1918) 반전 운동가(active pacifist) : 러셀은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반전 운동가(active pacifist)로 왕성하게 활동하였습니다. 이는 당대 유럽의 분위기에서 매우 드문 사례로 반애국적인 주장으로 여겨졌습니다. 이에 따라 왕국방위법(the Defence of the Realm Act 1914)에 의거 유죄판결을 받아 대학교 강단에서 쫓겨났습니다. 1916년 벌금 100파운드를 선고받았으나, 이를 일부러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교도소에 수감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그의 재산을 압류해 경매로 판매함으로써 벌금을 회수하였고, 그의 지인들이 경매로 나온 책을 사들인 것은 러셀에 관한 가장 유명한 일화가 되었습니다. 러셀은 이후에도 반전에 관한 대중 강연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1918년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가 대학교 강단에 복직한 것은 6개월간의 수감을 마친 1919년으로, 이후 사임과 재직을 반복하며 1949년까지 교수로 활동하였습니다. 인도의 독립을 위한 인도 리그의 의장직(chaired the India League)(1932~1939)을 맡아 인도의 고위공직자들과 교류하였으며, 인도에서는 1972년 그의 초상화를 새겨 넣은 우표를 발행하여 고마움을 표시하였습니다. 또한 1967년 개봉한 반전 영화 아만(Aman)에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하였으며, 이는 그의 유일한 ‘출연작’이기도 합니다.
서양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1945) : 버트런트 러셀은 원자폭탄이 발명된 1945년, 자신의 대표작이라고 꼽을 수 있는 서양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1945)를 출간하였고, 이를 통해 학계 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러셀은 러시아 혁명(Russian Revolution)(1917~1923) 이후 급변하는 중국에서 연인 도라 블랙(Dora Russell)(1894~1986)과 함께 북경에서 1년간 머무르며 철학 강의를 하였습니다. 당시의 체류를 통해 중국과 중국의 철학에 대해 접할 수 있었죠. 지금이야 ‘서양’철학사라는 책 제목이 어색하지 않지만, 당대 대부분의 철학사가 서양에 국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사(A History of Philosophy)란 제목으로 출간되는 관행을 비추어 본다면, 러셀이 중국을 비롯해 동양의 철학사를 인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지식이 서양이란 지리적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한 것이지요. 그러나 폐렴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1921년 8월 영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러셀은 9월 27일 임신 6개월인 도라 블랙(Dora Russell)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치름으로써 첫 번째 아내와 공식적으로 이혼하였습니다. 국내에는 ‘러셀 서양철학사’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