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독자 여러분! 오늘은 유럽의 슈퍼마켓(Europe's Supermarket), 안도라 공국(Principality of Andorra)으로 떠나보겠습니다. 안도라란 국명은 '덤불로 덮인 땅'을 뜻하는 고대 나바라어 '안두리알(Andurrial)'에서 유래했습니다. 안도라는 1278년 파레아주 협정(Paréage of 1278)을 통해 확립된 영토와 주권을 바탕으로 700년 넘게 평화를 유지해 온 장수 국가로, 스페인 우르젤 주교(Bishop of Urgell)와 프랑스 대통령(President of France)이 국가 원수직을 공유하는 세계 유일의 공동 영주국(Co-principality)입니다. 해발 약 1,023m로,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도 안도라라베야(Andorra la Vella)를 품은 나라로, 마드리우-페라피타-클라로르 계곡(Madriu-Perafita-Claror Valley, 2004)은 인류와 자연의 완벽한 공생을 보여주는 안도라만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입니다. 스페인과 프랑스의 접경지대에 자리잡은 유럽의 쇼핑천국, 안도라로 떠나보시겠습니까?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시리즈와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여행을!
▶ 두 명의 주군, 하나의 나라! 파리아셰(Two Rulers, One Nation! Pariatge) : 프랑스와 스페인이라는 거인들 사이에 끼인, 서울 면적(약 605제곱킬로미터)보다도 작은 468제곱킬로미터의 나라가 어떻게 700년 이상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이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이 바로 ‘파리아셰(Pariatge)’라는 단어에 담겨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옛 문서가 아니라, 안도라의 생존을 가능케 한 외교적 발명품이자 현재까지 살아 숨 쉬는 정치 시스템의 근간입니다. 13세기 안도라 계곡은 스페인 우르젤(Urgell) 교구의 주교와 프랑스 푸아(Foix) 백작 사이의 치열한 세력 다툼의 장이었습니다. 양쪽 모두 이 전략적 요충지를 포기할 수 없었죠. 끝없는 분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바로 1278년과 1288년, 두 차례에 걸쳐 체결된 ‘파리아셰’ 조약입니다.
▷ 당시 우르젤의 주교였던 페레 두르그(Pere d'Urg)와 푸아 백작 로제 베르나 3세(Roger Bernat III)는 칼 대신 펜을 들고 역사적인 합의에 이릅니다. 조약의 핵심은 ‘공동 통치’였습니다. 어느 한쪽이 독점하는 대신, 두 군주가 동등한 권한을 갖고 안도라를 함께 다스린다는, 그야말로 세기의 빅딜이었죠. 이로써 세계 역사상 유일무이한 ‘공동 대공국(Coprincipat)’이 탄생했습니다. 이 독특한 시스템은 시대를 넘어 유연하게 진화했습니다. 푸아 백작의 지위는 프랑스 왕에게, 그리고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프랑스 대통령에게로 계승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안도라의 두 공동 대공(Co-prince)은 스페인의 우르젤 주교와 프랑스 대통령이 맡고 있습니다. 프랑스 대통령이 국민투표가 아닌 계승된 직위로 다른 나라의 군주가 되는, 현대 정치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진풍경이 펼쳐지는 셈입니다. 2026년 기준 제108대 우르헬교구장은 주제프류이스 세라노 펜티나트(Josep-Lluís Serrano Pentinat, 1977~)이며, 그는 세상에 단 2명 뿐인 가톨릭 성직자 국가원수입니다. 또 한 명은 누구냐구요? 바티칸 시국의 교황 레오 14세(Leo XIV, 1955~)! 프랑스 대통령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1977~)입니다.
▶ 마을이 곧 국가다, 파로키아(The Village is the Nation, Parròquia) : 안도라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나라를 하나의 단일체가 아닌 일곱 개의 고유하고 유서 깊은 공동체 연합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 핵심 단위가 바로 ‘파로키아(Parròquia)’, 우리말로는 ‘교구’ 혹은 ‘행정구’로 번역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현재 안도라는 카닐료(Canillo), 엥캄(Encamp), 오르디노(Ordino), 라마사나(La Massana), 안도라라베야(Andorra la Vella), 산줄리아데로리아(Sant Julià de Lòria), 그리고 1978년에 분리된 가장 젊은 파로키아인 에스칼데스엔고르단(Escaldes-Engordany)까지 총 7개의 파로키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파로키아들은 중앙 정부가 편의를 위해 나눈 현대적 행정 구역이 아닙니다. 이들의 존재는 ‘파리아셰’가 체결되기 훨씬 이전인 9세기 문헌에도 등장할 만큼 뿌리가 깊습니다. 즉, 안도라는 ‘파로키아’라는 마을 공동체들이 먼저 존재했고, 이들이 모여 국가를 형성한 ‘상향식(Bottom-up)’ 국가에 가깝습니다. 안도라 의회인 ‘총회(Consell General)’의 기원 역시 1419년에 설립된 ‘땅의 의회(Consell de la Terra)’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각 파로키아의 대표들이 모여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던 기구였습니다. 지금도 각 파로키아는 자체적인 지방 정부(Comú)와 선출된 시장을 두고 상당한 자치권을 행사하며, 공동체에 강력한 발언권을 부여합니다.
▷ 한국의 도, 시, 군, 구와 같은 중앙집권적 행정 구역과 비교해 보면 안도라 파로키아의 독특함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한국의 지방 자치 단체들도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안도라의 파로키아 시스템은 국가 형성의 근간을 이루는 훨씬 더 근본적이고 자치적인 권력과 정체성의 단위입니다. 각 파로키아 주민들은 자신들을 부르는 고유한 명칭, 예를 들어 카닐료 주민은 ‘카닐롕(Canillencs)’, 오르디노 주민은 ‘오르디넹(Ordinencs)’ 등으로 부르며 강한 지역적 유대감을 드러냅니다. ‘안도라인’이라는 국가적 정체성은 획일적인 문화가 위에서 아래로 덧씌워진 것이 아니라, 이 일곱 개의 개성 강한 공동체 정체성이 모자이크처럼 엮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안도라에 로마네스크 예술이 꽃피웠던 11~12세기는 우르젤 주교와 주변 백작들 간의 주권 다툼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혼란기에 각 마을 공동체가 막대한 자원과 노동력을 투입해 아름답고 견고한 석조 교회를 세운 행위는, 단순한 종교적 열정을 넘어선 정치적, 문화적 선언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는 외부의 압력에 맞서 자신들의 땅에 물리적, 정신적 닻을 내리고, 독자적인 피레네 기독교 공동체로서의 정체성과 영속성을 확립하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늘을 향해 솟은 수많은 로마네스크 종탑들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엄숙한 선언문인 셈입니다.
▶ 산은 우리의 것, 코무날(The Mountains are Ours, Comunal) : 안도라와 자연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마지막 열쇠는 ‘코무날(Comunal)’이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사유지나 국유지가 아닌, 특정 공동체가 대대로 함께 소유하고 관리해 온 ‘공동의 땅’을 의미합니다. 안도라 전체 영토의 약 90%가 개발되지 않은 자연 공간이며, 이 광대한 영토의 상당 부분이 바로 이 코무날 시스템 아래 관리되고 있습니다. 안도라인에게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터전이자 공동의 자산인 것입니다. 코무날 정신의 정수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바로 안도라의 유일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마드리우-페라피타-클라로르 계곡(Madriu-Perafita-Claror Valley)입니다. 이곳은 단순한 자연유산이 아닌 ‘문화 경관(Cultural Landscape)’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이 지정의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유네스코는 이 계곡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 자연이 아니라, 수 세기에 걸쳐 인간과 환경이 조화롭게 상호작용하며 빚어낸 살아있는 공간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 이 계곡의 풍경을 정의하는 것은 빙하가 깎아낸 절벽과 드넓은 목초지뿐만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양치기들의 돌 오두막(Bordes), 척박한 땅을 개간해 곡식을 심었던 계단식 밭, 숯을 생산하던 가마터, 그리고 카탈루냐 전통 방식의 제철소 유적 등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이는 수동적인 보존이 아닌, 능동적이고 지속 가능한 ‘이용’의 역사를 증명합니다. 이곳의 땅은 중앙 정부가 아닌 4개의 파로키아 공동체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관리하며, 700년 이상 이어진 전통적인 토지 관리 시스템을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이 계곡에 의도적으로 도로를 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상업적 개발과 관광객의 편의보다는 문화 및 자연유산의 가치를 우선시하겠다는 강력한 현대적 선언입니다. 한국의 산간 지역이 대부분 사유지로 묶여 있거나, 강원도처럼 스키 리조트와 관광 시설이 빠르게 들어서고, 국립공원은 국가가 관리하는 모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철학입니다. 안도라의 코무날은 땅이 공동체의 지속 가능한 이익을 위해 존재하며, 과거와 미래를 잇는 청지기 정신의 산물임을 보여줍니다.
▶ 안도라의 ‘파리아셰’는 균형의 지혜를 통해 안전한 국가라는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파로키아’는 그 그릇을 활기찬 공동체 정신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코무날’은 땅과의 깊은 조화를 통해 이 모든 것을 지속 가능하게 합니다. 이 세 기둥이야말로 작지만 강한 나라, 안도라의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입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작은 산악 국가는 잠시 멈춰 서서 우리가 잊고 있던 가치들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피레네의 산자락에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카탈루냐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은 만나지만, 산은 그러지 못한다(Les persones es troben, però les muntanyes no/People meet, not in the mountains).” 인간의 만남은 덧없이 지나갈 수 있지만, 저 거대한 산맥처럼 안도라의 핵심 가치들은 변치 않고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Moltes gràcies!(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