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독자 여러분! 오늘은 동유럽의 파리(Paris of the East), 부다페스트(Budapest)를 품은 헝가리(Hungary)로 떠나보겠습니다. 헝가리란 국명은 7세기경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온 마자르족(Magyars)을 포함한 부족 연맹체 ‘열 개의 화살’을 뜻하는 투르크어 ‘온 오구르(On-Oghur)’에서 유래했으며, 헝가리인들은 스스로를 ‘마자르인의 나라’ 마자르오르사그(Magyarország)라 부릅니다. 흔히 아틸라(Attila) 왕이 이끌던 훈족(Huns)의 땅이라 오해받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인도유럽어족 사이에서 고유한 언어 체계를 유지해온 ‘유럽 속의 독특한 섬’과 같은 국가죠.
헝가리는 1000년 성 이슈트반 1세(Saint Stephen I)의 대관식과 함께 기독교 국가로 거듭난 이래, 로마 제국의 국경선인 리메스(Limes)부터 오스만 제국의 흔적, 그리고 화려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Austro-Hungarian Empire)의 영광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한국인 여행자에게는 2009년 안방극장을 사로잡았던 KBS 드라마 아이리스(IRIS, 2009)의 긴박한 추격전이 펼쳐진 이국적인 배경지로도 친숙하죠! 다뉴브의 진주(Pearl of the Danube)이자 온천의 수도(Spa Capital of the World), 부다페스트(Budapest)로 떠나보시겠습니까?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시리즈와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여행을!
▶ 푸스타: 지평선 끝에 머무는 유목의 영혼(Puszta: The Nomadic Soul Lingering at the Edge of the Horizon) : 헝가리어로 푸스타는 본래 '황량한', '비어 있는'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에서 파생된 단어이지만, 오늘날에는 헝가리 동부에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알칼리성 대평원(Alföld, 알푈드)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이자 헝가리인의 영혼을 대변하는 대명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푸스타의 원초적인 생태와 문화적 진수를 가장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는 곳이 바로 199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호르토바지 국립공원(Hortobágy National Park)입니다.
▷ 지평선과 신기루가 빚어낸 생명의 캔버스(A Canvas of Life Forged by Horizon and Mirage) : 1973년 헝가리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호르토바지는 단순한 야생 동식물 보호구역이 아닙니다. 이곳은 2,000년이 넘는 아득한 세월 동안 전통적인 목축 사회가 척박한 자연환경에 어떻게 순응하고 조화롭게 공존해 왔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인류의 탁월한 '문화 경관(Cultural Landscape)'으로서 세계유산 기준(iv)와 (v)를 충족했습니다. 푸스타의 한가운데 서면 시야를 가로막는 산맥이나 숲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둥근 하늘과 평평한 대지가 맞닿은 아스라한 지평선, 그리고 그사이를 일렁이며 채우는 신기루(Mirage)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 부쇼야라슈: 겨울을 불태우는 강렬한 마스크의 향연(Busójárás: The Intense Feast of Masks Burning the Winter Away) : 두 번째로 여러분의 시선을 사로잡을 헝가리의 문화 키워드는 남부의 작은 도시 모하치(Mohács)에서 매년 2월이면 어김없이 부활하는 광란의 겨울 축제, '부쇼야라슈(Busójárás)'입니다. 헝가리어로 '부쇼(Busó)들의 행진'을 뜻하는 이 기괴하고도 매혹적인 카니발은, 그 문화적 고유성과 공동체적 결속력을 인정받아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 모하치의 어둠을 가르는 기괴한 카니발(The Bizarre Carnival Piercing the Darkness of Mohács) : 기독교의 사순절(Lent)이 시작되기 직전, 이른바 파르샹(Farsang, 카니발 기간)의 끝자락 목요일에 시작되어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전날인 참회 화요일(Shrove Tuesday)까지 6일간 이어지는 이 축제 기간 동안, 모하치의 거리는 현실의 법칙이 철저히 유보된 이계(異界)로 변모합니다. 축제의 주인공인 '부쇼'들은 양가죽 코트를 뒤집어 입고, 염색되지 않은 리넨 바지에 여성용 털실 양말을 덧신은 채 등장합니다. 하지만 가장 압도적인 것은 동물의 피로 붉게 물들인 듯한 버드나무 조각 마스크입니다. 기괴하게 튀어나온 이빨과 짐승의 뿔이 달린 이 무시무시한 가면을 쓴 채, 부쇼들은 거대한 소방울(Cowbells)과 나무 곤봉을 흔들며 다뉴브강을 건너 광장으로 들이닥칩니다. 이들의 몸짓은 거칠고, 구경꾼들에게 밀가루나 재를 뿌리는 등의 짓궂은 장난을 서슴지 않습니다. 화요일 밤, 거대한 밀짚 인형으로 만든 겨울의 관을 광장 한가운데 모닥불에 던져 넣고 맹렬하게 불태우며, 마을 주민들이 손을 맞잡고 전통 춤인 콜로(Kolo)를 추는 순간 축제는 폭발적인 절정에 달합니다.
▷ 비극적 역사와 이교도적 다산 의식의 융합(Fusion of Tragic History and Pagan Fertility Rituals) : 이 혼돈의 카니발을 해독하려면 모하치의 비극적인 역사와 이곳에 정착한 슬라브계 크로아티아 소수민족인 쇼카치(Šokci) 사람들의 심연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모하치는 1526년, 헝가리 왕국이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과의 전투에서 궤멸적인 패배를 당하며 기나긴 식민 지배의 서막을 열었던 역사적 트라우마의 현장입니다. 주민들은 부쇼야라슈의 기원에 대해 두 가지 전설을 믿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터키군의 억압을 피해 늪지대와 숲속으로 숨어 살던 쇼카치 사람들이, 어느 폭풍우 치는 밤 신비로운 노인의 계시에 따라 나무로 끔찍한 괴물 가면을 깎고 무기를 만들어 마을로 진격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굉음과 함께 나타난 뿔 달린 괴물들을 본 터키군은 악마의 군대로 착각해 혼비백산 도망쳤고, 이로써 고향을 되찾았다는 전설입니다. 역사학계는 쇼카치 인들이 모하치에 정착한 시기가 터키군이 물러난 17세기 후반이므로 역사적 사실일 수 없다고 일축하지만, 이 이야기는 패배의 땅에서 소수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을 지켜내고자 했던 민중의 치열한 정신적 승리 기제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두 번째 전설이자 근원적인 인류학적 의미는, 길고 척박한 겨울을 쫓아내고 대지의 풍요와 봄을 맞이하려는 이교도적인 다산 의식에 뿌리를 둡니다. 카니발 기간 동안 모하치에서는 일상의 도덕적, 사회적 규범이 철저히 붕괴됩니다. 가면의 장인 안탈 엥글레르트(Antal Englert)가 "가면은 사람의 겉모습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숨은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킨다"고 말했듯, 마스크가 부여하는 강력한 익명성 뒤에서 사람들은 억눌렸던 본능을 자유롭게 분출합니다. 성별의 경계마저 무너져 여성들도 남성 부쇼의 복장을 하거나 오스만 제국의 여성을 묘사한 화려한 셰페 부쇼(Beautiful Busós)로 참여하여 금기를 조롱합니다. 과거에는 축제 중 잉태된 아이의 친부를 묻지 않을 정도로 극단적인 해방이 허용되었는데,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집단적 일탈과 카타르시스가 혹독한 시기 쇼카치 공동체가 인구를 유지하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치유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 마초: 악마를 속인 붉은 장미의 예술(Matyó: The Art of the Red Rose that Deceived the Devil) : 마지막으로 헝가리의 영혼을 읽어내기 위해 살펴볼 키워드는, 캔버스 위에 눈이 시리도록 화려한 삶의 환희를 수놓은 자수 예술, '마초(Matyó)'입니다.
▷ 악마를 굴복시킨 장미와 백송이 장미의 여인(The Rose that Defeated the Devil and the Lady of a Hundred Roses) : 이 화려한 꽃무늬 탄생 배경에는 마초 마을 여인들 사이에서 구전되어 내려오는 전설이 존재합니다. 몹시 추운 한겨울, 결혼을 준비하던 소녀의 약혼자를 악마가 납치해 갔습니다. 악마는 "너의 앞치마에 한여름 들판에 피어나는 가장 아름다운 꽃들을 가득 담아 온다면 이 남자를 돌려주마"라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눈풀조차 찾을 수 없는 절망적인 계절, 소녀는 기지를 발휘했습니다. 그녀는 다채로운 실을 긁어모아 하얀 앞치마 위에 영원히 시들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여름의 장미들을 빽빽하게 수놓았습니다. 이 찬란한 앞치마를 본 악마는 굴복하여 약혼자를 놓아주었고, 그날 이후 마초 사람들은 악마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고 사랑을 지키기 위해 화려하게 수놓아진 옷을 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지금까지 우리는 헝가리라는 국가의 가장 깊은 내면을 여는 세 가지 열쇠인 '푸스타', '부쇼야라슈', 그리고 '마초'의 문화적 층위를 탐험해 보았습니다. 아득한 지평선 너머로 끊임없이 이동하며 우주의 섭리와 야생의 자유를 체화했던 푸스타의 유목적 영혼, 가장 척박한 겨울과 두려운 외세의 억압 앞에서도 기괴한 가면 뒤에 숨어 광란의 해학으로 삶의 봄을 쟁취해 낸 쇼카치 사람들의 결속력, 그리고 뼈저린 가난 속에서도 자아의 존엄을 잃지 않기 위해 새까만 앞치마 위에 시들지 않는 여름의 붉은 장미를 피워냈던 마초 여인들의 처절하고도 눈부신 자부심까지. 이 모든 것은 헝가리 민족이 어떻게 시대의 폭력에 맞서 자신들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직조해 냈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서사시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이 더욱 빛나듯, 시련이 가혹할수록 영혼의 꽃은 더욱 붉게 피어납니다. 헝가리인들의 이러한 숙명적이고도 결연한 삶의 태도를 완벽하게 대변해 주는 강렬한 전통 격언 한 구절을 소개하며, 이 길고 깊었던 여정의 마침표를 찍습니다. "Aki a Dunából vizet iszik, saját hazájának vágyik vissza."(다뉴브의 물을 마신 자는, 결국 그곳을 다시 그리워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