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독자 여러분! 오늘은 ‘호수와 화산의 땅(Land of Lakes and Volcanoes)’, 니카라과(Nicaragua)로 떠나보겠습니다. 니카라과라는 국명은 16세기 스페인 정복자들이 이 땅에 첫발을 내디뎠을 당시 니카라과 호수 주변을 다스리던 지혜로운 부족장 ‘니카라오(Nicarao)’와 스페인어 ‘아구아(Agua)’가 결합하여 탄생하였습니다. ‘니카라오의 물’ 혹은 ‘그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물가’라는 뜻입니다. ‘화산의 땅’ 니카라과는 1610년 모모톰보 화산의 대폭발로 매몰되었다가 300여 년 만에 기적적으로 발굴된 ‘중남미의 폼페이’ ‘레온 비에호 유적(Ruins of León Viejo, 2000)’, 바로크에서 신고전주의를 아우르는 건축 미학의 정수 ‘레온 대성당(León Cathedral, 2011)’ 등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품고 있습니다.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니카라과 호수(Lago Cocibolca)의 땅, 니카라과로 떠나보시겠습니까?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시리즈와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여행을!
▶ 옥수수와 카카오가 빚어낸 긍지, 피놀레로(Pinolero, the pride brewed from corn and cacao) : 현지인들을 지칭할 때 가장 널리 쓰이는 대중적 단어이자 첫 번째 핵심 어휘는 다름 아닌 ‘피놀레로(Pinolero)’입니다. 이 용어는 니카라과 사람들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역사적 정체성과 그들이 발 디딘 대지에 바치는 숭고한 자부심을 상징하는 영혼의 표식입니다. 이 수려한 명칭의 뿌리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랑받는 전통 음료인 ‘피놀리요(Pinolillo)’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옥수수를 알맞게 볶아낸 가루(Pinole)에 약간의 구운 카카오를 섞고, 계피와 정향 및 올스파이스 등 다채로운 향신료를 첨가해 전통 절구로 정성스레 빻은 뒤 물이나 우유에 섞어 마시는 피놀리요는, 유럽 침략자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총포를 들이대기 훨씬 앞선 시기부터 선주민의 육신과 정신을 지탱해 준 거룩한 생명의 양식이었습니다. 현대의 매끄러운 가공 음료와 달리 다소 거친 질감을 자랑하는 피놀리요는 카카오와 옥수수 특유의 쌉쌀하면서도 구수한 풍미가 입안을 가득 채웁니다. 매일 아침 이 음료로 하루를 여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내포한 피놀레로는, 곧 척박한 화산재 토양에서 옥수수와 카카오를 재배하며 연명해 온 짙은 토착적 근원을 영원히 부정하지 않고 끌어안겠다는 선언입니다.
▶ 식민 지배를 조롱하는 유쾌한 저항, 투아니(Tuani, a cheerful resistance mocking colonial rule) : 현지의 번화한 식당가나 젊은 층이 밀집한 해변에서 세대를 불문하고 가장 빈번하게, 그리고 쾌활하게 접할 수 있는 두 번째 핵심 어휘는 바로 ‘투아니(Tuani)’입니다. 이 단어는 영단어 'Cool(멋진, 훌륭한, 끝내주는)'이 내포한 긍정적이고 경쾌한 감각과 정확히 맞닿아 있는 니카라과만의 독자적인 은어(Slang)입니다. 어떤 상황이 몹시 흥겹거나 타인의 행동거지가 훌륭할 때, 현지인들은 지체 없이 밝은 미소와 함께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투아니!”라고 환호합니다. 얼핏 가벼운 유행어처럼 치부될 법하지만, 이면에는 삶의 팍팍함과 외부의 끔찍한 탄압에 맞서는 니카라과인 특유의 철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수세기에 걸쳐 이어진 수탈과 빈곤, 참혹한 내전 앞에서도 결코 희망의 끈을 놓거나 유머를 상실하지 않은 채 오히려 기지와 재치로 국면을 180도 뒤집어버리는 굳센 긍정의 에너지가 바로 투아니의 참된 시대정신입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현지 민중의 투아니 정신이 단순히 일상어를 넘어 고도의 무대 예술이라는 틀 안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로 응집된 역사적 산물이 존재하니, 그것이 바로 2005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엘 게겡세(El Güegüense)’입니다. 엘 게겡세는 과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스페인 식민 당국의 위선과 권위주의를 예리하면서도 익살맞게 비판하는 거리 극이자, 유럽산 악기와 토착 악기가 융합된 선율, 그리고 전통 탈춤이 한데 버무려진 종합 예술 작품입니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엽 사이 제국주의의 횡포가 절정에 달했던 무렵, 스페인어와 원주민의 고유어인 나와틀어(Nahuatl)가 섞인 형태로 창작된 이 극은 중남미 전역을 통틀어 가장 이색적이고 유서 깊은 식민지 시대의 문학적 저항 예술로 칭송받습니다.
해마다 첫 달이 되면 디리암바(Diriamba) 일대에서 개최되는 산 세바스티안(San Sebastián) 기념일의 거리를 장식하는 해당 공연의 주연 '엘 게겡세'는, 스페인 당국의 가혹한 조세 징수에 맞서 영악한 꾀를 부리는 몹시 교활하고 우스꽝스러운 원주민 늙은 상인입니다. 작품의 전개는 당대 최고 권력자인 스페인 출신의 타스투아네스 총독(Governor Tastuanes)이 주인공을 고압적인 관청으로 불러들여 부당한 세금과 뇌물을 강압하는 장면에서부터 본격화됩니다. 단연 압권인 대목은 총독 일행이 막대한 양의 은화, 즉 페소스 두로스(Pesos Duros)를 오만방자하게 징수하려 들 때 벌어집니다. 엘 게겡세는 이를 발음이 묘하게 흡사한 '단단한 치즈', 곧 케소스 두로스(Quesos Duros)로 착각한 척 능청을 떨며 뻔뻔하고 황당한 변명을 늘어놓아 권력자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듭니다. 그의 두 아들 돈 포르시코(Don Forsico)와 돈 암브로시오(Don Ambrosio)마저 가세해 극의 혼란을 부추기며, 종국에는 연극의 막이 내릴 때까지 스페인 총독은 단 한 닢의 은화도 거둬들이지 못한 채 평민들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맙니다.
심지어 결말부에 이르러서는 주인공의 아들과 총독의 여식 도냐 수체 말린체(Doña Suche Malinche)가 혼인을 맺게 되는 기상천외한 반전이 연출되며, 식민 지배층의 혈통마저 토착민의 삶 내부로 포섭해 버리는 통쾌한 전복이 달성됩니다. 유혈이 낭자한 무력 항전이라는 절망적 방식을 택하기보다 언어적 마술과 민초들의 걸쭉한 농담을 무기 삼아 지배층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신명 나게 판을 벌인 엘 게겡세의 자태야말로, 현지인들이 역사적 상흔을 극복해 낸 가장 ‘투아니’다운 저항 방식인 것입니다.
▶ 펜을 쥐고 문맹의 어둠을 밝힌 청춘, 차발로(Chavalo, the youth lighting the darkness of illiteracy) : 세 번째 핵심 어휘는 바로 ‘차발로(Chavalo)’입니다. 일상 스페인어에서 어린 소년소녀 혹은 혈기 왕성한 청년들을 친근하게 일컫는 이 낱말은 겉으로 보기엔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는 젊은 세대를 지칭하는 평범한 단어 같지만, 니카라과 현대사의 치열한 격동 속에서 이 명칭이 발휘하는 묵직한 중량감과 감동의 너비는 남다릅니다. 왜냐하면 강대국들의 이권 다툼이 초래한 끊임없는 내전의 상흔, 농민들의 지독한 궁핍, 그리고 반세기를 지배한 무자비한 독재 권력의 사슬을 마침내 절단하고 국가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도 아름다운 휴머니즘의 금자탑을 쌓아 올린 주역들이 다름 아닌 이 젊고 열정 가득한 '차발로'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오로지 조국의 앞날을 위해 헌신하며 일궈낸 경이로운 성취의 발자취는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에 등재된 ‘국가 문맹 퇴치 운동 기록물(Archives of the National Literacy Crusade)’을 통해 만국인들에게 영원토록 잊히지 않을 벅찬 서사시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1979년 7월, 수십 년간 이어지며 강토를 피와 눈물로 얼룩지게 했던 소모사(Somoza) 가문의 부패하고 극악무도한 독재 체제가 현지 민중들의 거대한 무장 항쟁에 의해 마침내 역사의 뒤안길로 허물어졌습니다. 해당 혁명을 주도했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Sandinista National Liberation Front)은 20세기 초반 미군의 자국 점령에 맞서 민족 자결을 부르짖으며 게릴라 부대를 지휘했던 전설적 영웅, 아우구스토 세사르 산디노(Augusto Nicolás Calderón Sandino, 1895~1934)의 반제국주의 정신을 계승한 세력이었습니다. 허나 승전고를 울린 기쁨도 잠시, 쫓겨난 독재 체제가 남긴 국가의 실상은 참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당시 전체 국민의 절반인 50%가 자기 이름 석 자조차 적지 못하는 심각한 문맹 상태에 처해 있었으며, 특히 험준한 산간 오지나 농촌 지역의 글을 모르는 비율은 재앙 수준에 다다랐습니다. 지식을 통제함으로써 대중을 우민화하려 기획했던 구정권의 끔찍한 잔재인 이 문맹률은, 새롭게 출범한 공화국의 재건 및 진정한 민주주의 정착을 가로막는 가장 거대하고도 절망적인 걸림돌이었습니다.
바로 이 절체절명의 위기 국면 속에서, 혁명의 총구에서 뿜어져 나오던 화염을 숭고한 교육의 빛으로 치환시키기 위해 무려 6만 명을 헤아리는 전국의 젊은 차발로들이 자발적으로 총 대신 펜을 쥔 채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1980년 3월부터 8월까지, 단 5개월에 불과한 짧고도 치열했던 기간 동안 수도 마나과를 비롯한 도심의 중산층 가정에서 유복하게 자라난 10대 후반에서 20대 무렵의 어린 학생 및 청년들은 안락한 잠자리와 가족의 품을 등진 채, 난생처음 마주하는 모기떼 들끓는 험악한 정글과 가파른 산골짜기,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는 농촌 부락으로 과감히 파고들었습니다. 이 앳된 차발로들은 한낮에는 가난한 농부 및 원주민들과 더불어 억센 밭을 일구며 구슬땀을 흘렸고, 짙은 어둠이 깔리는 밤이 되면 흔들거리는 촛불이나 조그마한 호롱불 불빛 하나에 의탁해 글자 한 자 한 자를 짚어가며 노구의 굳은 손을 맞잡고 글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지식 이양을 넘어, 도시와 농촌, 부유층과 빈민층으로 양분되어 있던 국가의 두 파편화된 세계가 생전 처음 만나 서로의 핏기를 이해하고 끌어안는 거대한 사회적 치유의 과정이었습니다.
▶ 오랜 지혜로 엮어낸 니카라과의 찬란한 내일(Nicaragua's brilliant tomorrow woven with ancient wisdom) : 지금까지 우리는 피놀레로, 투아니, 차발로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탐구했습니다. 척박한 토양과 외세의 무력 침탈이라는 뼈저린 상흔을 마치 옥수수와 카카오처럼 묵묵히 빻아 생명의 음료로 치환해 낸 피놀레로의 단단한 자긍심, 제국주의의 억압과 고단한 시련의 연속임에도 결코 미소를 잃지 않고 유쾌한 풍자와 해학으로 권력자들을 조롱했던 투아니의 눈부신 긍정, 그리고 기나긴 독재의 낡은 사슬을 끊어내고 글자 및 지식이라는 가장 평화로운 병기로 무지몽매한 어둠을 몰아낸 청년 차발로들의 뜨거운 연대 의식까지. 이 모든 어휘의 결 속에는 니카라과 민초들이 오랜 세월 온몸으로 버텨낸 상처의 깊이와, 이를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해 낸 경이로운 치유 및 승전의 과정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습니다.
El que porfía, mata venado.
He who perseveres, kills the deer.
끈기를 잃지 않는 자가 결국 사슴을 쓰러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