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독자 여러분! 오늘은 새우의 강(Rio dos Camarões), 카메룬(Cameroon)으로 떠나보겠습니다. 카메룬이란 국명은 1472년 포르투갈 탐험가 페르난두 포(Fernão do Pó)가 우리강(Wouri River)에서 넘쳐나는 카메룬유령새우를 보고 지칭한 ‘새우의 강’ 리오 두스 카마롱스(Rio dos Camarões)에서 유래했습니다. 적도 부근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카메룬은 남부의 열대우림부터 북부의 헬 사바나, 서부의 화산 고원과 대서양 해안선까지 대륙의 모든 지형을 품은 아프리카의 축소판(Africa in miniature)입니다. 특히 원시림의 형태를 완벽히 유지하여 서부저지대고릴라(Western lowland gorilla)와 침팬지의 안식처가 되어주는 ‘자 동물보호구역(Dja Faunal Reserve, 1987)’은 카메룬이 자랑하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죠. 새우가 펄떡거리는 아프리카의 축소판, 카메룬으로 떠나보시겠습니까?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시리즈와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여행을!
▶ 권력과 백성이 소통하는 거버넌스의 미학, 응구온(Nguon: The aesthetics of governance where power and people communicate) : 전근대 군장 사회(Chiefdom Society)에서 통치자의 권위는 대체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으며, 권력은 태생적으로 독점을 지향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하지만 카메룬 서부에 터를 잡은 바뭄 족은 권력의 타락을 방지하고 공동체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진보적인 정치 제도를 고안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202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오른 '응구온'입니다.
응구온은 14세기 무렵 바뭄 왕국을 창건한 엠폰 은차레(Mfon Nchare) 시대부터 이어져 온, 600년 역사의 거버넌스 축제입니다. 2년 주기로 푸반(Fumban) 시에서 7일간 개최되는 이 의식의 정수는, 백성들이 통치자인 음폰(Mfon, 군주)의 실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책임을 묻는 제도적 장치에 있습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군주는 절대 권좌에서 내려와 백성과 동등한 눈높이에 섭니다. 평민을 대표하는 비밀결사는 지난 2년간 군주가 집행한 정책을 철저히 검증하며, 부당한 과세나 억압이 없었는지 예리하게 추궁합니다. 명백한 실정이 확인되면 군주는 과오를 시인하고 벌금을 납부하거나 쇄신을 약속해야만 다시 왕위에 복귀할 수 있습니다. 이는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라는 현대 민주주의의 근간이 수백 년 전 아프리카 심장부에서 이미 제도화되었음을 방증합니다.
▷ 지식의 해방과 문자의 창제(Liberation of knowledge and creation of a writing system) : 이처럼 혁신적인 정치 철학이 찬란한 만개를 이룬 것은 17대 술탄 이브라힘 은조야(Ibrahim Njoya, c. 1860~1933)의 치세기였습니다. 그는 단순한 통치자를 넘어선 탁월한 지식인이자 창조자였습니다. 1888년 아버지 은산구(Nsangu) 왕이 은소(Nso) 족과의 격렬한 전투 중 전사한 뒤, 1895년경 왕위를 계승한 그는 식민 지배의 광풍 속에서도 부족의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고유의 기록 매체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그는 '바뭄 문자(Bamum Syllabary)'와 '슈몸어(Shümom language)'라는 독창적 언어 체계를 발명하는 업적을 세웠습니다. 문자를 확보한 바뭄 족은 응구온의 의식 절차는 물론, 의학 지식과 역사서까지 치밀하게 기록하여 후대에 온전하게 물려줄 수 있었습니다. 약 1,200명의 부인을 두어 주변 부족과 혈연적 동맹을 공고히 하는 전통적 리더십을 구사하는 동시에, 기록과 지식의 분배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방식으로 공동체의 존속을 도모한 셈입니다.
▶ 척박한 대지에 새겨진 생명력, 디이기드비이(Diy-Gid-Biy: Vitality carved into barren lands) : 카메룬 최북단(Far North Region) 마요-차나가(Mayo-Tsanaga) 지역의 만다라 산맥(Mandara Mountains)으로 시야를 넓히면, 척박한 대자연을 극복한 인류의 또 다른 기적과 조우하게 됩니다. 바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디이기드비이(Diy-Gid-Biy)' 문화경관입니다. 마파 족의 언어로 '군주 거주지의 폐허' 혹은 '정상에 위치한 군주의 눈'을 뜻하는 이 유적은, 험준한 산악 지형에 요새처럼 축조된 16개의 웅장한 석조 건축물 군락을 지칭합니다. 12세기에서 17세기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은 접착제나 모르타르 없이 오로지 건조한 돌을 정교하게 맞물려 쌓아 올린 건식 석축(Dry-stone) 기법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쿠바(Kuva), 비기데(Bigide) 등 7개 촌락을 아우르는 방대한 규모의 이 유적 안에는, 오랜 세월 풍파를 견뎌낸 돌계단과 미로 같은 회랑, 곡물 저장소(Silo), 주거용 테라스가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건축 공학적 성취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 수직적 적응과 상향식 생존의 건축학(Architecture of vertical adaptation and bottom-up survival) : 이들이 이토록 험난한 고산지대에 정착한 까닭은 생존을 향한 치열한 적응의 발로였습니다. 과거 이 일대는 이슬람 세력의 팽창, 노예무역, 부족 간 무력 충돌이 쉴 새 없이 발생하던 격전지였습니다. 평지의 참상을 피해 산기슭으로 피신한 민중들은 방어에 최적화된 산꼭대기에 거대한 돌요새를 구축하여 적의 위협으로부터 공동체를 지켜냈습니다. 나아가 척박한 비탈을 일궈 계단식 농경지(Terraced agriculture)를 조성함으로써 제한된 식수와 토양 유실 문제를 통제하고 자급자족 생태계를 완성했습니다. 이 경이로운 환경 적응력을 201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상가 트라이내셔널(Sangha Trinational)'과 대비해 보면 그 의미는 더욱 깊어집니다. 콩고 분지 북서부에 걸친 거대한 열대 우림인 상가 트라이내셔널이 풍부한 수자원을 바탕으로 한 '수평적 보존'의 결과물이라면, 디이기드비이는 흙 한 줌 구하기 힘든 메마른 고산지대라는 악조건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 바위를 깎아 이룩한 '수직적 적응'의 승리입니다.
▶ 물의 정령이 전하는 저항과 치유, 응곤도(Ngondo: Resistance and healing from water spirits) : 아프리카 역사에서 대자연은 언제나 경외의 대상인 동시에 성스러운 수호자로서 기능해 왔습니다. 카메룬 서부 해안과 두알라(Douala) 지역의 우리 강(Wouri River) 유역에 뿌리를 내린 사와(Sawa) 족에게 물은 단순한 물리적 생존 자원을 넘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영적인 통로였습니다. 이들의 심오한 물의 철학이 투영된 의식이 2024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응곤도'입니다.
본래 응곤도는 풍성한 수확에 감사하며 물의 정령 젱구(Jengu)에게 제례를 올리고 신탁을 구하는 전통 종교 의식이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불어 닥친 제국주의의 폭압적인 역사는 이 평화로운 제전의 성질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습니다. 1884년 독일 제국이 카메룬을 강제 병합한 뒤, 1910년 해안가의 비옥한 영토를 백인 전용 거주지로 전환하고자 강가에 살던 원주민들을 내륙으로 무자비하게 강제 이주시켰던 것입니다. 이 참담한 억압의 시기에 민중을 이끌고 나선 인물이 두알라(Duala) 부족의 국왕 루돌프 두알라 망가 벨(Rudolf Duala Manga Bell, 1873~1914)입니다. 유럽 유학을 거치며 서구의 법과 제도를 깊이 이해한 그는 1908년 아버지 망가 은둠베 벨을 이어 즉위한 이래, 독일 총독부의 불법적인 토지 강탈에 맞서 치밀한 법리적 논거를 바탕으로 합법적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하지만 식민 당국이 이를 폭력적으로 묵살하자, 그는 평화적 저항을 거두고 카메룬 전역의 족장들을 규합하여 범부족적 항일 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훗날 카메룬 민족주의(Nationalism)의 맹아로 평가받습니다.
▷ 자연을 매개로 한 초부족적 연대(Cross-tribal solidarity mediated by nature) : 이 치열한 과정에서 흩어진 해안가 부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은밀하게 저항의 메시지를 유포하는 구심점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응곤도 축제였습니다. 물의 정령을 모신다는 종교적 명분 아래 모여든 수많은 사와 족은 열띤 축제의 이면에서 강고한 항전의 결의를 다졌습니다. 비록 바뭄 족 술탄 이브라힘 은조야가 망가 벨의 계획을 독일 측에 밀고하는 비극이 겹치며 망가 벨은 1914년 반역죄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나, 그가 뿌린 저항의 씨앗과 응곤도에 아로새겨진 연대의 정신은 결코 소멸하지 않았습니다. 특정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고 폭력에 맞섰다는 측면에서, 응곤도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카 피그미족 다성 음악'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합니다. 아카 피그미족이 한 치 앞을 가늠하기 힘든 밀림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복잡한 화음을 엮어 심리적 결속을 극대화했다면, 두알라 부족은 강과 바다라는 탁 트인 공간을 매개로 영적인 연대망을 구축했습니다. 또한, 물이라는 공간을 통해 억압적 시대를 돌파한 궤적은 한국의 대표적 유산 '제주 해녀 문화'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일제강점기 거친 바다를 개척하며 경제적 주체를 넘어 항일 운동의 주축이 되었던 제주 해녀들처럼, 사와 족 역시 강과 바다를 무대로 제국주의의 거대한 폭력에 맞서는 초부족적 연대를 이루어냈습니다. 강물과 바다가 국경을 넘어 흐르듯, 응곤도에 깃든 평화와 저항의 메시지는 폭력을 뛰어넘어 대륙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상징으로 도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 오랜 지혜가 깃든 땅, 미래를 향한 카메룬(A land imbued with ancient wisdom, Cameroon toward the future) : 지금까지 우리는 세 가지의 고유어 키워드를 통해 카메룬이라는 국가의 내밀한 영혼과 역사적 궤적을 세밀하게 분석해 보았습니다. '응구온'을 통해 통치자와 피지배자가 수평적으로 소통하며 권력의 균형을 맞추는 성숙하고도 진보적인 정치적 지혜를 확인했습니다. '디이기드비이'를 통해서는 흙 한 줌 없는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이성의 힘과 빈틈없는 협동으로 생존의 터전을 일궈낸 강인한 생명력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응곤도'를 통해 물의 영성에 기대어 식민 통치의 폭력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민족의 연대를 이끌어낸 숭고한 저항 정신을 기렸습니다. 이 세 가지 문화적 유산은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잉태되었으나, 종국에는 '공존과 포용'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과제에 대한 카메룬인들의 명확한 해답으로 귀결됩니다. 강압적 폭력과 독단으로는 결코 공동체를 온전히 결속시키거나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낼 수 없음을, 이들은 무자비한 역사적 시련 속에서 온몸으로 체득했습니다.
L'eau qui coule doucement creuse profondément.
Gently flowing water digs deeply.
부드럽게 흐르는 물결이 가장 깊은 자국을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