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독자 여러분! 오늘은 동서양의 문명이 교차하는 지중해의 보석, 레바논(Lebanon)으로 떠나보겠습니다. 기원전 3000년경 고대 페니키아인(Phoenicians)들은 붉은빛 삼나무(Cedar)를 깎아 만든 배를 타고 지중해 전역을 누비며 위대한 해상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들이 사용했던 알파벳은 현대 서구 문자 체계의 시초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주요 교역 거점이었던 비블로스(Byblos)는 오늘날 '책(Book)'과 '성경(Bible)'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침략과 내전이라는 아픈 역사의 풍파를 견뎌낸 레바논은 18개에 달하는 종교 공동체가 공존하며 만들어낸 독특하고 풍성한 문화적 스펙트럼을 자랑합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바알베크(Baalbek, 1984)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보존 상태가 뛰어난 로마 신전 유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고대 건축술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레바논의 시인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의 예언자(The Prophet, 1923)를 옆구리에 끼고, 레바논으로 떠나보시겠습니까?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시리즈와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여행을!
▶ 글자의 기원을 새긴 페니키아의 항구, 알아브자디야(Al-Abjadiyya: The Phoenician Port Where Letters Began) : 첫 번째 키워드 '알아브자디야'는 아랍어로 문자를 의미합니다. 해당 어휘의 기원이 가장 뚜렷하게 남겨진 장소는 수도 베이루트 북부 해안에 위치한 비블로스, 즉 현대의 주바일(Jbail) 지역입니다. 기원전 8800년경부터 인류가 단 한 번의 단절 없이 끊임없이 정착해 온 이 항구 도시는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지구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연속적으로 거주가 이뤄진 구역 중 하나로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청동기 시대 이래 이집트와 활발한 교역을 전개하며 파피루스 뭉치와 질 좋은 삼나무를 수출입했던 조그만 기항지 내부에는, 실로 놀랍게도 인류 문자 발전사 전체를 뒤흔든 결정적인 전환점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1923년 무렵, 프랑스 출신 고고학자 피에르 몽테(Pierre Montet, 1885~1966)는 비블로스 왕가 묘역에서 역사적인 돌관 하나를 세상 밖으로 꺼냅니다. 대략 기원전 1000년경 비블로스를 통치했던 군주 아히람(Ahiram)의 소유로 밝혀진 이 유물 표면에는, 완벽하게 보존된 최고(最古)의 페니키아어 알파벳 비문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선왕을 기릴 목적으로 그의 아들 이토바알(Ittobaal)이 조각한 총 서른여덟 개 남짓의 단어는 다음과 같은 강력한 경고로 마무리됩니다. "비블로스를 침공하여 해당 관의 뚜껑을 강제로 개방하는 통치자가 있다면, 그의 권위는 꺾이고 통치권은 전복될 것이다." 문제의 석관은 현재 베이루트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Beirut) 내부에 안전하게 보관 중입니다.
당시 등장한 페니키아 알파벳은 불과 22개 안팎의 자음 기호만으로 구성된, 당대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이고 간결한 표기 체계를 자랑했습니다. 지중해 전역을 종횡무진 누비던 페니키아 상인들의 폭넓은 교역로를 따라 해당 문자는 사방으로 확산되었고, 이후 고대 그리스인들이 모음을 새롭게 추가하며 오늘날의 독자적인 체계를 완성해 냅니다. 현대 지구 인구의 과반수가 일상적으로 활용하는 라틴어, 키릴어, 히브리어, 아랍어 등 다양한 문자 체계의 근본을 추적하다 보면 종국에는 비블로스라는 조그만 항구 도시에 다다르게 됩니다. 덧붙여 영어 단어 '바이블(Bible)' 또한 해당 도시의 명칭, 나아가 그곳을 경유하여 그리스 권역으로 유입된 파피루스 두루마리 무역에서 파생되었다는 견해가 정설로 받아들여집니다.
▶ 신들의 숲에서 국기까지, 불멸을 상징하는 나무 알아르즈(Al-Arz: The Tree of Immortality, From the Forest of the Gods to the National Flag) : 두 번째 키워드는 바로 삼나무를 지칭하는 '알아르즈'입니다. 레바논 북단 고산 지대에 위치한 '카디샤 계곡과 신의 삼나무 숲(Ouadi Qadisha the Holy Valley and the Forest of the Cedars of God, Horsh Arz el-Rab)'은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성소입니다. 카디샤 계곡은 초기 기독교의 은둔 수도원 문화가 가장 원형에 가깝게 보존된 장소 중 하나로 꼽히며, 과거의 수도승들은 험준한 암벽에 동굴을 뚫고 엄격한 고행을 실천했습니다. 해당 계곡 상단부의 험준한 능선에는 수천 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레바논 삼나무(Cedrus libani) 원시림이 군락을 이루며 오늘날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 수목은 인류가 최초로 문자를 발명한 초창기 무렵부터 이미 숭고함을 부여받은 영적인 존재였습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문학 작품인 길가메시 서사시(Epic of Gilgamesh)에는 신들이 거주하는 숲과 그곳의 삼나무를 엄격히 수호하는 신수(神獸) 훔바바(Humbaba)에 대한 묘사가 등장합니다. 구약성경 열왕기상 5장 구절에는 티레의 군주 히람 1세(Hiram I, 재위 기원전 1000~947년경)가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에게 최고급 삼나무 자재와 숙련된 건축 장인들을 파견하여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 축조를 지원했다는 일화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뗏목 형태로 벌채된 나무들을 험난한 해상 경로로 운송했다는 이 유서 깊은 교역 기록은, 단 한 그루의 나무가 국가 간의 외교적 연대와 종교적 신앙을 결속시키는 중대한 매개체로 작용했음을 방증합니다.
신화와 성서의 시대를 관통한 삼나무의 굳건한 위상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변함없이 이어집니다. 1943년 12월 7일 프랑스 통치령으로부터 벗어나 주권 국가를 선포할 당시, 해당 국가의 국민들은 새롭게 제정한 국기의 정중앙에 푸른 삼나무 한 그루를 당당히 도안했습니다. 상하를 가로지르는 붉은 띠는 독립 투쟁 과정에서 희생된 선조들의 선혈을, 순백의 바탕은 평화와 만년설로 뒤덮인 웅장한 산맥을 상징하며, 그 중심부에 확고히 자리 잡은 삼나무는 민족 특유의 불멸성과 강인한 회복 능력을 의미합니다. 국가의 명칭 대신 특정 수목 자체를 국기의 핵심 상징물로 채택한 사례는 세계사적으로도 극히 드문 경우입니다.
▷ 유일신 세 종교가 함께 우러른 나무, 경계 없는 신성함(A Tree Revered by Three Faiths at Once, a Sanctity Without Borders) : 레바논 삼나무가 지니는 독특한 가치는 그것이 단일 종교 집단의 배타적 소유물로 전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합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 속에서는 신들이 거주하는 성스러운 숲으로, 유대교 및 기독교 경전에서는 웅장한 성전 축조를 위한 거룩한 건자재로, 이슬람교의 각종 문헌 속에서는 천상 낙원에 뿌리내린 생명의 나무로 빈번하게 묘사되어 왔습니다. 이처럼 세 개의 거대 유일신 종교가 각자의 철학적 언어로 찬미해 온 자연물은 대단히 희귀한 사례입니다. 카디샤 계곡에 자리한 여러 수도원이 현재까지도 기독교 마론파(Maronite) 신자들의 영적 고향으로 굳건히 기능하는 까닭 역시, 교리의 장벽을 초월하여 산과 숲 자체에 내재된 보편적 신성함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한 그루의 거목이 특정 종파를 편 가르지 않고 모두의 하늘을 향해 평화롭게 가지를 뻗은 셈입니다.
▶ 폐허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마음, 알수무드(Al-Sumud: The Heart That Refuses to Fall Even Amid Ruins) : 마지막을 장식할 세 번째 키워드는 절망 앞에서도 결단코 좌절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 '알수무드'입니다. 2026년 현재의 현지 정세를 논할 때 결코 배제할 수 없는 중대한 핵심 개념이기도 합니다. 2026년 7월 대한민국 부산광역시에서 성황리에 개최된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남부 지역에 위치한 아멜산 성채군(Mount Amel Castles)을 새로운 세계유산으로 공식 등재했습니다. 중세 십자군 원정 시기에 축조된 보포트 성(Beaufort Castle, 아랍어 명칭 칼라아트 알치키프 Qalaat al-Chqif)을 필두로 토론 성(Qalaat Tibnin), 두비에 성(Qalaat Chakra), 마론 성(Qalaat Deir Kifa), 그리고 칼라아트 차마(Qalaat Chama') 등 총 다섯 개의 거점으로 구성된 해당 성채군은, 목록에 추가되는 바로 그 순간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명단에도 동시에 이름을 올리는 비운을 겪었습니다. 지역 내 격화된 군사 분쟁에서 파생된 심각하고 즉각적인 훼손 위협 때문이었습니다. 동일한 회의 기간 동안 고대 페니키아 항구 도시인 티레(Tyre) 유적 또한 위험 유산 카테고리에 편입되었습니다. 2024년 이후 지속된 인접 구역의 무력 충돌 여파로 유적지에 실질적인 물리적 타격이 가해진 결과였습니다.
바알베크(Baalbek)에 위치한 거대한 로마 시대 신전 단지 역시 아슬아슬한 존폐의 고비를 간신히 넘겼습니다. 2024년 하반기 무렵, 유적지 반경 불과 수백 미터 앞까지 무차별적인 공습이 단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 시대에 축조된 역사적 건축물 다수가 형체도 없이 붕괴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당시 정부의 문화부 장관은 공식 성명을 통해 주요 신전 구조물 자체는 기적적으로 보존되었으나, 그 안전망이 몹시 취약한 한계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거듭 호소했습니다. 그 결과 2024년 11월 18일 자로, 유네스코 산하 무력분쟁 시 문화재보호협약 위원회는 바알베크와 티레를 위시한 국가 전역의 주요 문화유산 서른네 곳에 대해 '강화된 보호(enhanced protection)' 지위를 전격 부여했습니다. 이는 해당 유적지를 겨냥한 폭격이나 군사적 목적의 징발을 국제법령으로 엄격히 통제하는 긴급 구제 조치였습니다.
▶ 부러지지 않는 손, 레바논이 전하는 마지막 인사(The Hand That Will Not Break, Lebanon's Final Word) : 지금까지 우리 모두는 알아브자디야, 알아르즈, 알수무드라는 세 가지 아랍어를 길잡이 삼아 레바논이라는 협소하지만 서사 깊은 대륙을 꼼꼼히 탐험했습니다. 비블로스의 오래된 항만에서는 세상의 모든 알파벳이 첫숨을 내쉰 기적적인 찰나를 목격했고, 카디샤 계곡의 짙은 녹음 속에서는 무려 삼천 년의 세월 동안 군주와 신앙인들이 한마음으로 경외해 온 웅장한 수목을 마주했습니다. 아울러 2026년 현재진행형으로 위험 유산 목록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 중인 바알베크와 티레, 그리고 아멜산 성채의 굳건한 유적 앞에서, 덧없이 무너져 내리는 파편 사이를 뚫고 힘차게 솟아오르는 인류의 결연한 음성을 두 귀로 확인했습니다.
الجبل ما بيهزه ريح
The wind does not shake the mountain.
거센 바람도 산을 뒤흔들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