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독자 여러분! 오늘은 백만 순교자의 나라(Land of a Million Martyrs), 알제리(Algeria)로 떠나보겠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해적 제독 하이레딘 바르바로사(Hayreddin Barbarossa, 1478?~1546)는 1516년 형 오루치 레이스(Oruç Reis)와 알제(Algiers)를 장악했고, 1529년 항구 앞바다에 남아 있던 스페인 요새 페뇬 데 아르헬(Peñón de Argel)마저 함락시켰습니다. 이후 알제는 지중해를 넘나드는 해상 세력의 심장부로 이름을 떨쳤습니다만, 정작 이 나라 국토의 약 85퍼센트는 사하라 사막입니다.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까지 130여 년, 그리고 백만 명에 달하는 희생을 치른 알제리 독립 전쟁(1954~1962)의 아픈 역사를 지나온 이 나라는, 아랍과 베르베르, 프랑스와 오스만의 흔적이 층층이 겹쳐진 독특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1925~1961)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Les Damnés de la Terre, 1961)'을 옆구리에 끼고, 카스바의 좁은 골목길로 떠나보시겠습니까? 테마여행신문 TTN Korea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시리즈와 함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멋진 여행을!
▶ 오랑(Oran)이 낳고 세상이 훔쳐 들은 목소리, 라이(Raï, 아랍어 '의견' 또는 '견해') : 라이는 20세기 초 알제리 서부 항구도시 오랑에서 태어난 대중가요입니다. 원래는 세이흐(Cheikh)라 불리는 원로 가수들이 방언 아랍어로 시적인 가사를 노래하던 시골 음악이었지만, 이후 세이하(Cheikha)라 불리는 여성 가수들이 등장하면서 사랑과 자유, 욕망을 거침없이 노래하는 방향으로 변모했습니다. 프랑스 식민 통치 말기, 검열과 금기를 피해 은밀히 퍼져 나간 이 노래는 사회적 압박과 절망, 자유를 향한 갈망을 가감 없이 담아낸다는 점에서 202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 셰브 할레드에서 디스코 마그레브까지, 국경을 넘은 목소리(From Cheb Khaled to Disco Maghreb, a Voice That Crossed Borders) : 셰브 할레드(Cheb Khaled)와 셰브 마미(Cheb Mami) 같은 스타들이 등장하면서 라이는 알제리 국경을 넘어 프랑스와 아랍권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1985년 오랑에서 열린 첫 라이 페스티벌은 이 장르가 은밀한 뒷골목 음악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문화 자산으로 전환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1990년대 내전 기간에는 '감성 라이의 스타'로 불리던 가수 셰브 하스니(Cheb Hasni)가 암살당하는 비극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라이는 살아남았고, 지금도 프랑스어권 디아스포라 청년들 사이에서 새로운 리듬으로 계속 변주되고 있습니다.
▷ 같은 노래, 다른 대륙, 다른 언어(Same Song, Different Continent, Different Language) : 검열과 금기를 뚫고 살아남은 서민의 노래라는 점에서, 라이는 한국의 판소리(Pansori, 200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와도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판소리 역시 조선 후기 서민들의 애환과 풍자를 한 사람의 소리꾼이 북 장단에 맞춰 노래하는 형식으로, 지배 계층에 대한 은근한 비판을 담아내곤 했습니다. 대륙과 언어는 다르지만, 억눌린 목소리가 노래라는 형식을 빌려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두 장르는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셈입니다.
▶ 로마보다 오래된 새해, 옌나예르(Yennayer, a New Year Older Than Rome) : 옌나예르는 북아프리카 원주민 아마지그(Amazigh, 흔히 베르베르라 불리는 민족)의 농경력 새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원에 대해서는 아마지그어 '옌(하나)'과 '아유르(달)'가 결합되었다는 설과, 로마 시대의 '야누아리우스(Ianuarius)'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함께 전해집니다. 그레고리력 1월 12일, 알제리에서는 2018년 아마지그 신년 2968년을 맞아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Abdelaziz Bouteflika, 1937~2021) 대통령이 처음으로 이날을 공식 유급 휴일로 지정했습니다. 북아프리카 국가 중 옌나예르를 국경일로 삼은 것은 알제리가 최초였습니다.
▷ 쿠스쿠스와 닭고기, 그리고 자존심의 회복(Couscous, Chicken, and the Restoration of Pride) : 이날 알제리의 카바일(Kabyle) 지역을 비롯한 여러 마을에서는 쿠스쿠스(Couscous)와 닭고기로 차린 잔칫상을 나누고, 전통 의상을 입은 채 말 퍼레이드와 민속놀이를 즐깁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축제가 단순한 명절을 넘어, 1980년대부터 이어져 온 아마지그 정체성 인정 운동의 결실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랫동안 아랍어 중심 정책 아래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베르베르 문화가 국가 공식 달력에 자리를 얻기까지, 수십 년에 걸친 사회적 요구가 있었습니다.
▷ 농경의 새해를 기념하는 또 다른 대륙(Another Continent Marking an Agrarian New Year) : 아프리카 대륙에는 옌나예르와 비슷한 결의 축제가 또 있습니다. 에티오피아 남부 시다마(Sidama) 민족의 새해 축제 피체-참발랄라(Fichee-Chambalaalla, 2015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가 그것입니다. 결혼한 딸이 매년 친정을 찾아가 이웃과 음식을 나누던 풍습에서 비롯된 이 축제는, 옌나예르와 마찬가지로 공동체의 화합과 세대 간 연대를 확인하는 자리로 기능합니다. 대륙 하나에서 이토록 다른 두 민족이 각자의 방식으로 새해를 통해 공동체를 다잡는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 미소로 정권을 흔든 사람들, 히라크(Hirak, the People Who Shook a Regime With Smiles) : 히라크(الحِرَاك, '움직임' 또는 '운동'을 뜻하는 아랍어)는 2019년 2월 22일 알제리 전역에서 시작된 대규모 평화 시위를 가리킵니다. 발단은 당시 대통령이던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가 뇌졸중으로 공식 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다섯 번째 임기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한 일이었습니다. 시위는 매주 금요일마다 이어졌고, 결국 2019년 4월 2일 부테플리카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습니다. 20년 가까이 이어진 한 정치 체제가 거리의 목소리 앞에 무너진 순간이었습니다.
▷ 거리를 청소하며 행진한 사람들(A March That Cleaned the Streets It Walked Through) : 히라크가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놀라운 비폭력성이었습니다. 시위대는 지나간 거리에 쓰레기 하나 남기지 않으려 자발적으로 청소에 나섰고, 실업자부터 중산층, 노년층부터 청년층까지 사회 모든 계층이 한데 섞여 행진했습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히라크는 '미소의 혁명(Revolution of Smiles)'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립니다. 부테플리카의 퇴진 이후에도 시위대는 해산하지 않고, 군부 중심 체제 자체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며 2021년까지 산발적으로 행진을 이어갔습니다.
▷ 손뼉은 혼자서 칠 수 없다는 오래된 지혜(An Old Wisdom That One Hand Cannot Clap) : 알제리 남부 구라라(Gourara) 지역에는 아헬릴(Ahellil of Gourara, 2008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이라는 전통 시가 예술이 전해집니다. 한 명의 독창자가 선창을 하면 여러 사람이 손뼉을 치며 합창으로 화답하는 이 폴리포니(polyphony, 다성음악) 형식은, 오아시스 공동체가 오랫동안 지켜온 집단적 화합의 표현입니다. 개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여러 목소리가 겹쳐야만 완성되는 이 노래의 구조는, 히라크가 보여준 다계층 연대의 풍경과 묘하게 겹쳐 보입니다.
▶ 세 개의 단어가 남긴 것(What Three Words Leave Behind) : 라이는 노래로, 옌나예르는 달력으로, 히라크는 거리로 각자의 방식으로 알제리 사람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해왔습니다. 세 단어 모두 표현의 형태는 다르지만, 억눌린 것을 억누른 채로 두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밖으로 꺼내 놓았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노래로 못다 한 말을 하고, 달력으로 잊혔던 정체성을 되찾고, 거리로 나서 침묵을 깼습니다.
يد واحدة لا تصفق
One hand cannot clap.
한 손으로는 박수를 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