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의 나라, 기록의 시대 조선에서
일기 없이는 나도 없고 가문도 없다고 여긴
12명 조선인의 삶의 궤적을 좇다
생의 끝머리에 들어선 이들을 돌보며 쓴 치병 일기
글씨 잘 쓴다고 서울로 뽑혀 올라간 영리들의 출장 기록
참혹한 전란의 와중에 사대부가 여인이 남긴 『병자일기』
사대부 경화사족이 지닌 문예취향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흠영』
양반 아닌 ‘상놈常漢’이 남긴 기록 『하재일기』
이국땅의 사건과 유배지의 민란을 기록한 『음청사』
규장각 교양총서 제8권 『일기로 본 조선』 출간
인생의 궤적軌跡, 일상의 기록-조선시대 일기와 소통하다
증자가 말했다. “나는 하루에 세 가지로 나 자신을 반성한다. 남을 위해 일을 꾀함에 충실히 하지 않았는가? 친구와 사귀는 데 신의가 없지 않았는가? 스승에게 배운 것을 열심히 익히지 않았는가?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일기를 쓴다는 것은 바람에 흩어지는 구름처럼 소소한 일상을 선명하게 바라보고 소중히 간직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는 한번쯤은 일기를 씀으로써 속내를 털어놓고 새로운 세상으로 첫발을 내디뎠던 경험이 있다. 어느 하루도 나와 똑같은 삶을 사는 이는 없으니 나의 일상은 유일무이한 것이다. 그러니 삶의 조각을 어딘가에 남기는 행위는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일기가 빛을 발하는 때는 대중과 소통하는 순간이다. 일상의 기록이 사회적 소통의 주인공이 되려면 시간이라는 인내가 필요하다.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몸과 마음으로 쓴 일기는 우리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할 뿐 아니라 삶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어느 면에서 일기에 기록된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을 바라본 당시 사람들의 마음이며, 이를 다시 기록으로 남긴 옛사람들의 뜻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는 일이다.
규장각 교양총서 제8권으로 나온 『일기로 본 조선』에서 다룬 열두 편의 일기는 세 편을 제외하고는 개인의 일상생활 전반을 기록한 생활일기다. 일기를 쓴 기간은 짧게는 1년 여부터 68년에 이르고, 일기가 시작될 때의 연령은 10세부터 80여 세까지 각기 다르다. 우리는 열두 편의 일기가 지닌 독특한 맛과 향을 풀어내어 옛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한다.
예나 지금이나 질병과 죽음은 인생에서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다. 치병일기는 조선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과 애쓴 노고의 흔적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정청일기』는 내의원 어의들이 고위 관료로 재직 중인 노수신을 치료한 일기이고, 『가대인시탕시일기』에는 왕진을 거절당하자 노모에게 단지혈斷指血을 드린 효자 하진태의 절절함이 배어 있다. 생의 끝에 선 이들의 모습을 담은 일기에서 질병의 고통과 이를 지켜보는 아픔은 마찬가지였으리라.
소현세자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분조分朝를 이끌며 국정을 처리했고, 병자호란 때는 심양에 볼모로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었다. 소현세자는 강학講學에서 배운 내용을 100번 이상 읽어 통달하도록 공부했다. 『소현동궁일기』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의 죽음과 비운의 생애를 살다 간 소현세자의 삶과 서연書筵활동이 기록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63세의 나이로 피란길에 오른 남평 조씨는 1년에 서른 번이 넘는 제사를 주관하고 농사를 경영하면서 심양에서 돌아올 남편을 기다렸다. 그녀는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죽은 두 아들과 며느리들에 대한 그리움을 『병자일기』에 한글로 섬세하게 표현했다.
노상추는 혼인하던 해인 17세 때 아버지의 명을 받아 일기를 쓰기 시작해 68년간 지속했다. 그의 아버지는 장남이 사망하자 세상일에 흥미를 잃고 일기 쓰기를 노상추에게 맡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상추일기』는 집안의 대표로서 쓴 일기였기에 주인공 노상추를 비롯해 그의 부모, 자식, 손자에 이르는 4대 가족의 생과 사를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 되었다.
조선의 관료제, 행정체제, 경제체제에 편입되어 있었던 인물의 일기는 조선 사회의 구조와 실상을 꾸밈없이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다. 조선의 17세기는 사림의 공론인 사론士論이 높은 권위와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인데, 김영의 『계암일록』에서는 이 시기 중앙 정계의 동향과 지방 유생들의 활동에대해 살펴볼 수 있다. 김영이 살던 시대는 성리학적 의리를 실천하는 사림들의 상소인 유소儒疏, 사림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처벌인 유벌儒罰이 주요 활동으로 자리잡았다.
황사우는 경상감사의 수석보좌관 격인 도사都事로서 지낸 1년의 시간을 『재영남일기』에 상세하게 담았다. 도사는 감사 유고시에 감사의 직임을 대행하기 때문에 아감사亞監司로 불렸다. 감사는
도내 군현을 순력巡歷하면서 향교의 훈도와 유생에 대한 평가, 관리들의 근무 평정, 민원 해결 등을 처리했다. 당시는 감영監營에서 업무를 관할하는 유영留營 체제가 아닌 순력를 통한 행영行營 체제였기 때문에 지방 관료의 고단한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정조가 명한 『오경백편』 선사 프로젝트에 참여한 경상감영의 영리 권계만은 규장각 출장에서의 견문을 『내각선사일록』으로 남겼다. 이 일기는 1797년 경상감영 선사영리들의 규장각 출장 배경과 감회, 『오경백편』의 선사 과정과 시상 등을 담고 있다. 『오경백편』을 목판으로 간인할 때 사자관寫字官이 아닌 영남서리의 글씨를 선택한 정조의 확고한 신념을 이 일기는 말해준다.
지규식은 궁중에 필요한 그릇을 만들어 사옹원에 조달하는 공인貢人이었기에 『하재일기』에는 그릇의 납품과 매매, 공가貢價의 수취 등에 관한 내용이 있다. 공인활동은 대동법 시행 이후 각 지역에서 중앙에 납부한 쌀이 공물을 상납한 공인에게 공가로 지급되는 체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이 일기에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사옹원 분원 운영의 변화와 서울의 금융 거래에 대한 정보도 자세하다. 『하재일기』는 양반이 아닌 미천한 신분의 보통 사람이 남긴 일기로서 희소가치가 있다.
같은 시기 외교와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김윤식을 세상에서는 ‘진개화眞開化’로 불렀는데, 그가 당시의 관습과 체면에 구애받지 않고 파격적인 행동을 한 내력은 『음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81년 학도들을 이끌고 무기제조법을 배우기 위해 중국을 찾은 영선사領選使로서의 경험이나 제주도로 유배되어 이재수의 난을 목격한 사건들은 소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이재수의 난은 소설과 영화로 이어져 과거와 현재를 소통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윤치호는 일본, 중국, 미국의 11년 유학생활에서 견문을 넓히고 세계사의 흐름인 제국주의의 약육강식 논리를 체득했다. 1895년 귀국한 윤치호는 한말 개화·자강운동의 핵심 인물로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대한자강회를 이끌었다. 조선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 개화·자강운동의 대명사, 일제강점기 조선 기독교의 원로, 일제강점기 말 친일파의 대부로 살았던 그는 60년간의 영문 일기에 자신의 속내와 시대의 모습을 다각도로 기록했다.
18세기 조선의 학술과 문화 지형을 보여주듯 오직 자신의 학문적 열정과 예술 애호를 갈망하며 평생을 추구한 이들이 있었다. 『이재난고』를 남긴 황윤석은 십대 후반부터 천문역산학을 비롯한
과학기술과 관련된 서학서를 열람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재난고』는 서학에서 천주교와 과학기술을 구분해 선택적으로 수용했던 황윤석의 세계관과 18세기 후반 서학서의 유통 현황을 보여준다.
자식이 없던 유만주에게 분신과도 같았던 『흠영』은 18세기 서울에 거주한 양반 가문의 예술 취향과 서화가들의 활동 등을 담고 있다. 서화애호가 유만주는 중국에서 유입된 서화에 관한 저서와
기록을 통해 역대 서화가와 그들 작품에 대한 지식을 탐색하면서 여러 경로로 서화를 축적해나갔다. 유만주는 『흠영』에서 “일기는 가까운 일을 상세하게 하고 멀어진 일은 잊지 않게 하는 자신의 역사이니 소홀히 할 수 없다”며 일기 쓰는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