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내 영혼을 밟으며” 사는,
저항마저 사치인 한 청춘의 자화상
제11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한 김의 작가의 『어느 철학과 자퇴생의 나날』은 그 어디서도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무력한 한 청춘의 자화상이 담긴 작품이다. 초라한 변두리 아파트에서 사회로부터 거부당한 엄마와 함께 사는 이 청춘에게, 저항은 사치다. 모멸감을 속으로 견디며 사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유령처럼, 식물처럼 살아도 이 모자의 마지막 인간으로서의 존엄마저 유린하는 손아귀가 들러붙는다. 게다가 그 손아귀의 주인공은 그 모자와 너무도 가까운 곳에 산다. 세상 끝으로 내몰린 자들의 거주지인 그 변두리 아파트 같은 층에 사는 이웃 소년인 것이다. 즉 김의 작가는 소외된 자들끼리의 공동체라는 우리의 느슨한 환상에 찬물을 끼얹으며 세상 끝에서 다시 짜이는 먹이사슬의 세계, 너무도 끔찍해서 슬쩍 구경하기도 불편한 한 편의 지옥도를 우리 앞에 재현해낸다. “죽은 내 영혼을 밟으며” 사는, 하루하루가 역겹고 더러운 악몽인 한 청춘을 통해.
심사평, 간만에 등장한 ‘밑바닥 소설’
『어느 철학과 자퇴생의 나날』은 성 소수자인 트랜스젠더를 엄마(혹은 아빠)로 둔 젊은이(혹은 소년)의 성장기로, 짐짓 위악적으로 느껴질 만큼 생생하고 처절한, 간만에 등장한 ‘밑바닥 소설’이었다. 거친 소재와 표현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삶에 대한 순정이 느껴지는 작품이라는 평이 있었다. -심사평 중에서
(박범신 김성곤 임철우 은희경 김형경 하응백 한창훈 김미현 김별아)
●책 속에서
형벌이다. 트랜스젠더의 자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때론 너무 힘들다. 신은 인간을 창조할 때 장난기가 발동했던 모양이다. 남자를 만들어놓고 여자의 살가죽을 입혔으니 말이다. 인간이 스스로 그 살가죽을 벗으려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하는지 정말 몰랐단 말인가. (34쪽)
나는 엄마가 이른바 신이 정한 윤리를 어기고 남자에서 여자가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는 그저 본래의 모습인 여자를 되찾은 것뿐이다. 신이 엄마에게 운명이란 이름으로 잘못 입혀놓은 남자의 옷을 벗은 것뿐이다.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워서 그 옷을 벗은 게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나는 엄마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트랜스젠더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시 가스토치의 파란 불꽃을 점화한다. 그리고 밤색 머리의 얼굴을 향해 불길을 갖다 댄다. 내가 인간이었을 때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고양이이므로 할 수 있다. 나는 파란 불꽃의 방향이 밤색 머리의 눈으로 향하게 한다. 밤색 머리의 눈이 또 한 번 타기 시작한다. 너덜해진 눈꺼풀이 마저 탄다. 이윽고 눈알이 타기 시작한다. 강렬한 파란 불꽃을 견디지 못한 눈알이 그만 터져버린다. 밤색 머리의 터진 눈알에서 지지직 소리와 함께 액체가 흘러나온다. 밤색 머리가 내게 흘리는 눈물이다. 용서를 구하는 항복의 백기다. 아, 이 벅찬 심장의 자유와 황홀감을 어디에 비할까.
개털 작업 아르바이트는 불쌍한 개들에게 몹쓸 짓을 한다는 죄책감만 빼면 다른 어떤 아르바이트보다 편하다. (…) 그렇다고 이 일이 다른 아르바이트보다 덜 고되다는 뜻은 아니다. 이 일이 편한 것은 대면하는 고객들로부터 받는 스트레스가 적어서다.
(…)
그 이전에 했던 다른 아르바이트들은 모두 고객들을 직접 상대하는 일이어서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모른다. 특히 개념을 상실했거나 양심이 불량한 손님들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은 아예 인간 이하로 대하는 손님들이 의외로 많다. 아무리 손님이 왕이라지만 아르바이트하는 사람이 노예는 아니잖은가.
어둡고 습한 동굴이다. 햇볕도 바람도 들지 않는다. 매우 습하고 칙칙하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그저 지독한 어둠뿐이다. 죽음보다 더 어두운 동굴이다. 불안하고 우울한 동굴이다. 그 동굴 속엔 우주로부터 버려진 온갖 쓰레기들이 가득하다. 그래서 햇볕도 들지 않고 바람도 들지 않고 은빛 날개를 가진 새는커녕, 박쥐 한 마리도 날아들지 않는다. 나는 그 쓰레기들을 하나씩 파헤친다. 지독한 피해의식, 자퇴생의 늦잠, 아침마다 불안한 눈빛, 휘청대는 발걸음, 무죄의 허허벌판에서 눈보라를 맞으며 엉엉 우는 사람, 쓰다 만 일기장, 밤색 머리와 그 패거리가 로마군 병사처럼 몰려와 체포해 간 나의 노래하는 새들, 어릴 때 할아버지가 기르던 털 많은 똥개, 바로 그 똥개를 잡아서 양은솥에 끓이던 친척 아저씨, 그가 피워대던 담배 연기, 똥개가 죽어서인지 더 지독하게 울어대던 미루나무의 매미들, 자라며 내가 피워대던 담배 연기, 푸른 약국의 밥맛없는 여자 약사, 보리가 내 곁에 벌렁 드러누워 세상모르고 잠을 자던 달콤한 오후, 그 오후를 깨뜨리며 울리던 악마의 초인종 소리, 능멸하듯 내 엉덩이를 밀고 들어오던 악마의 더러운 성기, 집에 오면서 게워대던 골목길, 그 골목길을 몰래 엿보던 숙명여고 여고생들에게 나도 모르게 보였던 망신스러운 눈물, 운명의 저주라고 밤낮으로 믿는 피해의식, (...)
필균이 아저씨는 술에 취하자 노래를 부른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옛날 노래 같은데 나는 잘 모르는 노래다. 필균이 아저씨가 일어나서 춤까지 춘다. 나는 옆집과 아래층 사람들에게 소음 피해를 줄까 봐 아저씨를 말린다. 아저씨가 미안하다며 다시 자리에 앉다가 책상 위의 휴대용 가스토치를 발견한다. 이런 게 왜 방에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영화네식당 아르바이트 얘기는 하지 않고 그냥 잠깐 누구한테서 빌린 거라고 말한다. 그러자 필균이 아저씨가 가스토치를 손에 들더니 갑자기 가야농원 최 사장을 욕한다. 아까와는 달리 사장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최 사장 그 개새끼라고. 아마 최 사장이 휘두르는 롱가스토치 불꽃에 자주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아픈 기억이 떠올라서일 것이다. 나도 술김에 밤색 머리 얘기를 꺼낸다. 남 앞에선 처음으로 악마를 욕한다. 그러자 필균이 아저씨가 대뜸 그 밤색 머리 아이가 누구냐고 눈에 불을 켜며 묻는다.
나는 죽은 내 영혼을 밟으며 집으로 몇 걸음 옮기다가 뒤를 돌아본다. 밤색 머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악마는 여자아이와 함께 1505호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노닥거리고 있다. 담배를 다 피우면 집에 들어갈 모양이다.
저 악마는 도대체 누구인가.
갑자기 눈물이 쏟아진다. 그리고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추운 겨울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엄마는 악마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참담했을까.
세상은 무슨 이유로 저 악마를 내버려두는지 모르겠다. 응당한 형벌을 가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세상도 악마가 두려운 것일까. 아니면 애초부터 악마에겐 관심조차 없었던 것일까. 그래서 내 엄마를 잡아먹은 저 악마를, 또 다른 엄마들을 잡아먹을 수도 있는 저 악마를 내버려두는 것일까.
도저히 그냥 집에 들어갈 수가 없다. 나는 뒤로 돌아선다. 그리고 아직도 1505호 앞에서 여자아이와 노닥거리고 있는 저 밤색 머리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끝내 처참하게 죽은 내 젊은 날의 영혼을 아프게 밟으며 달려간다.
●추천사
이 소설은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어둡고 우울하다. 가난, 청춘, 트랜스젠더, 강간, 폭력, 죽음, 자살 등 가능한 모든 불행과 슬픔의 기호들이 난무한다. 때문에 이 소설을 현재의 현실에 대한 기록이나 비판으로만 읽으면 그냥 부정적 결말에서 끝나버리는 ‘한 겹’의 소설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과연 ‘인간다운 삶’이 과연 권리인지 아니면 의무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그리고 불편하게 질문한다. 사건의 중심에서 주변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소설 속 ‘악마’가 죽어도 여전히 지옥은 지옥이고 타인은 이리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결말에서부터 다시 읽어야 하는 ‘두 겹’의 소설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악무한적인 현실 속에서 인간 은 과연 자퇴할 수 있는가. 대답이 곤란한 이런 질문에 의해 이 소설을 다시 읽게 된다.
―김미현(문학평론가. 이화여대 교수)
이것은 ‘바닥’의 이야기다. 낮고 어둡고, 거칠고 비리다. 개 같은 청춘이 개털을 그슬리며 개 같은 인생을 짓부순다. 그 낯선 혼돈과 파괴에 몰입할수록 불편하고 역겨워지지만, 바야흐로 그때부터 ‘바닥’이 진동한다. 비정하게 얼어붙었던 마음이 동정이든 혐오 때문이든 밑둥치로부터 흔들려 마침내 아릿하고 뻐근해진다. 그것이 외면하고프나 뿌리칠 수 없는, 이 소설의 감동이다. ―김별아(소설가, 세계문학상 1회 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