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라는 말은 건강을 위해 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바꾸어, “손발이 고생해야 몸이 낫는다.”라는 말로 머리의 생각이 아닌 몸의 행위로서 건강을 이해할 때가 되었다.
이것은 몸이라는 구조와 기능을 이해하는데 비롯된 결론이다. 자연스럽고 건강한 몸을 갖는 다는 것은 각각의 위치에서 제 기능을 최대한 발휘할 때이다. “악, 꼼작할 수가 없어!” 삐끗한 목과 허리를 부여잡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극심한 통증을 느낄 때, 머리는 그와 같은 경험을 두 번 다시 원하지 않을 뿐이다. 목과 허리는 통 깁스를 한 것처럼 움직임을 고정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극심한 통증은 온 전신을 타고 머리끝까지 전달된 공포가 되어 진정될 때까지 몸은 얼음이 된다. 한손은 아픈 허리에, 또 다른 한 손은 잔득 긴장한 채 잡을 수 있는 무언가를 부여잡고 조심스럽게 다리로 이동한다. 갑자기 뻣뻣하고 무거워진 몸에 다리는 평상시보다 묵직한 힘을 내야 한다. 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았던 행위가 처음 하는 동작처럼 어색해진다. 움직임 과정 하나하나를 놓치면 안 돼는 고도의 집중을 이 때 하게 된다.
자연스럽고 건강한 몸은 이 같은 동작을 통증이 있기 전부터 원했을 것이다. 건축가이며 의사인 브레드보오그는 자연을, 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자연은 최고의 설계를 했다. 자연의 모든 설계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우리는 자연이 일하는 방법을 공부해야 하고 독단적이며 꼴사납게 우리 자체의 것을 만들어 내기 보다는 그것을 흉내 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자연의 설계를 발전시킬 수 없다. 우리에겐 단지 그것에 대한 이해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행동들을 지적한다. 몸이라는 자연의 피상적 설계에 따라 가슴을 활짝 펴라고 한다. 무거운 물건을 들 때는 그 물건에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구부려 천천히 들어 올리라고 하지만 아프기 전에는 귓등으로도 듣질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허리가 아파 본 경험자 역시 통증이 사라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예전의 습관대로 돌아가니, 아직 성한 우리네들의 몸에게 바른 자세란, 올바른 물건을 드는 자세란 그때그때마다의 찜찜한 뒤끝일 뿐이다.
통증의 어원이 ‘벌(punishment)’인 것처럼, 잘못된 자세의 응징으로 극심한 통증을 느낄 때가 아니면 바른 자세란 먼 남의 이야기다.
자연의 본질적 설계는 이렇다. 머리에서 엉덩이까지 이어지는 원통형 구조인 몸통을 구부리는 것은 독단적이고 꼴사납게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과 다르지 않다. 머리는 원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머리가 있는 이유이며 일하는 방식이다. 몸통은 그 머리를 떠받치며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한다. 굵고 짧고 휘어져 볼품없어 보이는 다리의 위대한 쓰임은 부단한 움직임이다.
하지만 게으른 두 다리 때문에 목과 허리는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 움직인다. 목과 허리를 구부렸던 것은 자연의 설계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독단적이며 꼴사납게 우리 자체의 것을 만들어 낸 것에 대한 벌 또한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몸의 설계가 완벽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몸은 그 나름의 위치와 목적에 따라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몸의 설계목적을 잃고 몸에 대한 왜곡된 이해가 지금의 건강을 흔들어 놓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머리와 척추, 몸통, 그리고 팔다리의 설계를 바탕으로 몸이라는 자연에 대한 이해만이 지금 필요할 때이다.
이러한 과정을 쫓다보면, 사람이라는 자연에서 몸과 마음을 보게 된다. “나무에 등을 퉁퉁 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TV를 보면서 운동하는 것이 정말이지 운동일까?”, “올바른 자세란 존재할까?”, “측만증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어깨의 높이는 똑 같아야 하는가?”, “배가 나와 윗몸일으키기를 하는데 허리는 왜 아플까?”, “뱃살은 옆구리가 먼저일까 아니면 앞배가 먼저 나올까?” 등의 수많은 의문점들에 대한 해답도 몸이라는 설계목적을 이해한다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을 덮게 될 때 “손발이 고생해야 몸이 낫는다.”라는 의미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