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을 ‘대상화’하고 ‘텍스트화’한
바르트의 유일무이한 실험적 에세이”
롤랑 바르트를 읽는 가장 바르트적인 방법!
★★ “비평가로서 마침내 자신을 연구 텍스트로 삼은 롤랑 바르트.
때로는 찬란하게 때로는 당혹스럽게 우리를 매혹한다.” _「워싱턴 포스트」★★
◎ 도서 소개
★ 글쓰기와 창작이 재정의되는 시대, 다시 주목받는 포스트구조주의의 거장 ★
★ 자아와 언어의 경계를 허무는 혁신적 ‧ 자전적 실험 ★
★ 전 세계 지식인들이 찬사한 20세기 문학비평의 고전 ★
“나는 텍스트 하나를 쓴다.
그리고 그것을 R. B.라 부른다.”
AI가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시대, 인간의 창작이란 무엇일까?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의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는 이런 질문에 흥미로운 답을 제시한다. 바르트는 이 책에서 놀라운 실험을 시도한다. 자신에 대해 글을 쓰면서도 마치 남을 관찰하듯 ‘R.B.(롤랑 바르트)’, 혹은 ‘그’라고 3인칭으로 지칭하며 짧은 단편들로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조각조각 그려낸다. 보통 자서전은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일관된 자아상을 제시하고 선형적 서술 방식을 택한다. 하지만 바르트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그는 ’나라는 존재는 하나로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며, 전통적인 글쓰기 규칙을 깨뜨렸고 작가와 작품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책은 20세기 문학사에서 새로운 형태의 자서전으로 기록되었다.
바르트의 글쓰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자신의 일관성 없는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단편에서는 한 가지 생각을 드러내고, 다른 단편에서는 완전히 다른, 심지어 모순되는 생각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존재인지를 드러낸다. 글을 쓰면서 ‘내가 누구인지’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지’를 발견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즉 글쓰기를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닌, 자신을 탐구하는 여행으로 바라본 것이다.
바르트에게 글쓰기는 삶의 수수께끼와 마주하는 행위였다. 그가 말한 ‘쓰기의 쾌락’은 완벽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있지 않았다. 대신 글을 쓰는 과정에서 언어와 만나고,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거나 기존의 의미를 파괴하며, 지금까지 시도해보지 않은 표현 방식을 탐험하는 순간에 있었다. 그래서 진정한 창작의 가치는 완성품이 아니라, 실패할 수도 있지만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모험적 정신에 있다고 보았다. 바르트의 실험은 인간 창작의 특별함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것은 완벽함이나 일관성에 있지 않다. 오히려 미완성되고 모순적이며, 끝없이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 있다. AI가 빠르고 정확한 답을 제시하는 시대에, 바르트의 이 책은 글쓰기를 인간의 고유한 탐구 정신의 발현이자 실존적 질문을 던지는 행위로 재정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 21세기북스 추천 도서
좋은 죽음에 관하여 | 미셸 몽테뉴 지음, 박효은 옮김, 정재찬 기획┃256쪽(양장)┃19,800원
원칙 없는 삶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김용준 옮김, 박혜윤 기획┃264쪽(양장)┃19,800원
침묵의 서 |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 지음, 성귀수 옮김┃232쪽(양장)┃19,800원
◎ 책 속에서
그는 승리하는 대화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그 누구에게든 굴욕감을 주면 힘든 그는 승리가 보일라치면, 당장 다른 곳에 가 있고 싶어진다(만일 그가 신이었다면, 계속해서 승리를 뒤엎었을 것이다—게다가, 신이 하는 게 그런 거니까!). 대화의 차원으로 넘어가면, 가장 올바른 승리조차 언어적으로는 가장 나쁜 승리가 된다. 오만이므로. 이런 단어를, 바타유를 읽다가 만났는데, 어느 책에선가 그는 과학의 오만에 대해 말했다. 그가 말한 오만은 승리를 구가하지 못해 안달인 모든 대화들로까지 확장되었다. 나는 따라서 세 가지 오만을 감내한다. 과학의 오만, 독사(Doxa)의 오만, 열혈 투사의 오만. _p. 68, 「오만」 중에서
나는 나의 저 옛 조각을 지치도록 찾는 것을 포기한다. 나는 나를 복원하려는 게 아니다(기념물처럼).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를 묘사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 “나는 텍스트 하나를 쓴다. 그리고 그것을 R. B.라 부른다.” _p. 90, 「우연의 일치」 중에서
나는 발신자들의 사회에 살고 있다(나 자신도 그 한 사람이고). 내가 만나거나 내게 글을 써 오는 사람은 내게 책을, 글을, 명세서를, 안내서를, 항의서를, 연극 및 전시회 초대장을, 또 기타 등등을 보내온다. 성적 쾌감에 가까운 쓰기와 생산의 쾌락이 도처에서 절박하다. 하지만 상업적 회로로 인해 자유로운 생산은 정체되고, 거의 미치고 날뛴다. _p. 139, 「발신자들의 사회」 중에서
글쓰기란 건조한, 금욕적인 쾌락이다. 절대 다 쏟아내서는 안 되는 쾌락이다. _p. 151, 「셀린과 플로라」 중에서
파편들로 글을 쓴다는 것. 파편들은 둥근 원의 둘레에 있는 돌들이다. 나는 그 위에 내 몸을 둥그렇게 펼친다. 내 모든 작은 세계가 부스러기들이다. 그 중심에는 뭐가 있을까?
그의 첫 또는 거의 첫 텍스트(1942)도 파편적 글쓰기다. 이런 선택은 당시 지드적인 방식에 따른 것이었다. “왜냐하면 무질서가 왜곡하는 질서보다 낫기 때문이다.” 이후 실제로, 그는 짧은 글쓰기를 수행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_pp. 164-165, 「파편들의 순환」 중에서
자신을 타자로 여기지 않고 글을 쓰기 시작할 수 있을까—적어도 예전에는 쓸 수 있었다. 근원의 이야기를 형상의 이야기로 대체해야 한다. 작품의 기원, 그것은 작품에 미치는 첫 영향이 아니라, 첫 자세이다. 하나의 역할을 모방한다. 이어 환유적으로 한 예술을 모방한다. 나는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재생산함으로써 생산하기 시작한다. _pp. 177-178, 「압그룬트」 중에서
(자기) 비평보다 더 순수한 상상계는 없다. 결국, 이 책의 실체는 완전히 소설적이다. 에세이 같은 담론에 3인칭이 끼어드는 것은, 어떤 가공적 피조물을 지시하려는 게 아니라 이른바 장르들을 개혁할 필요가 있어서다. 에세이라고 말하면서 사실상 거의 소설임을 자백하는 것이다. 고유명사 없는 소설. _p. 215, 「’나‘의 책」 중에서
내가 글을 쓰는 동안 내 글은 경쟁하듯 써야 하는 작품에 비해 그저 납작하고, 하찮고, 왠지 죄를 지은 것처럼 초라하다. 작품이라는 집합적 상이 나에게 자꾸 따라붙는데, 이런 함정을 다 거치면서 어떻게 글을 쓸까? 글쎄, 그냥 눈 딱 감고. 작업하는 매 순간, 나는 길을 잃고, 미칠 것처럼 괴롭고, 쫓기면서도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속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닫힌 방』에 나오는 마지막 말. 계속 갑시다(continuons). _pp. 249-250, 「글쓰기에서 작품으로」 중에서
그러니까 각자가 내일, 나, 거기 같은 말만 사용한다면. 굳이 법으로 정한 것 같은 것을 참조하지 않고 말을 한다면. 사랑의 액체성과도 유사한 한 집단 내의 유동성을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분명한 차이에서 미세함이 나오고, 그 미세함에서 끝없는 반향이 나와 차이가 존중받는 것이긴 하지만) 모호한 차이가 언어의 가장 비싼 가치 아닐까? _p. 302, 「유토피아로서의 시프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