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어떤 공간은 답답하고 지루하지만
어떤 공간은 살고 싶은 곳이 되는가?
도시의 리듬을 설계하는 조경가가 알려주는
온몸을 사용해서 도시를 경험하는 법
◎ 도서 소개
“조경은 단순한 나무 심기가 아니다!”
우리가 무심코 느끼는 편안함 속
치밀하게 계산된 조경의 배려
오늘 걸은 바닥의 재질이 몇 가지였는지 한번 생각해보자. 아스팔트, 대리석, 보도블록, 마루… 아마 열 가지 이상 떠올리기 힘들 것이다. 반면 홍대입구역에서 나와 경의선숲길로 간다고 상상해보자. 흙길과 나무 데크, 철로의 침목과 자갈 도상… 오 분만 걸어도 열 가지 이상의 촉감을 느낄 수 있다. 도시인이 상실하기 쉬운 감각의 경험을 되찾게 해주는 것,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하고 숨 쉴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 조경이다. 왠지 발길이 이끌리는 곳, 무의식적으로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에는 섬세하지만 치밀하게 설계된 조경의 배려가 있다.
고려대학교 환경생태공학부 · 생태조경융합전공 전진형 교수는 ‘나무 심고 정원 가꾸는 일’ 정도에 머물러 있는 조경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 힘쓴다. 사람이 아프면 의사를 찾듯이 병든 도시는 조경가를 찾는다. 예를 들어, 고령화가 심화하며 국가적 의료비 부담이 커지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고 해보자. 이때 더 많은 의사를 뽑고 병원을 짓는 것은 근본적 해결이 되지 않는다. 이럴 때는 걷고 싶은 거리를 더 많이 조성하고 노약자도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설계를 하는 것이 우선이다. 사람들을 자가용에서 내리게 하고 걷게 만들어 생활 속 운동량을 늘리면 병원을 찾는 사람이 줄고 공공보건 비용이 감소한다. 이것이 조경가의 문제 해결법이다.
이처럼 조경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흔히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접하게 된다. 남산이 아껴주는 서울의 에어컨 요금은 얼마일까? 강남은 매번 침수되지만 광화문은 침수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북촌이 예전만큼 ‘핫플’이 아닌 이유가 뭘까? 등 도시 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조경가의 입장에서 풀어낸 도시 해석은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올 것이다. 동시에 경주와 로마의 조경을 비교하며 두 도시가 역사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를 인문학적으로 풀어내기도 하고, 오늘날 대단지 아파트의 조경을 분석하여 전체 공사비 대비 조경비가 높은, 조경 수준이 높은 아파트가 대장 아파트일 가능성이 높다는 흥미로운 의견도 전한다. 또한 한 마리의 새를 따라가며 서울 전체의 생태 네트워크에 대해 점검하며 우리 도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 또한 놓치지 않는다.
조경이란 무엇인가?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조경은 나무 심는 일보다 더욱 폭넓고 우리 삶에 밀접하다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대답을 머뭇거리게 될 것이다. 이에 저자는 20년간 조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느낀바, ‘조경이란 인간에게 자연을 돌려주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들을 위해 묵묵히 일하고 있는 조경의 배려를 깨닫고 일상 속 스며들어 있는 조경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얻을 기회가 될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우리가 매일 걷는 길에도 이런 경관이 있다. 출근길 지하철 계단 옆 녹지, 점심시간에 산책하는 가로수길, 퇴근 후 들르는 공원. 그곳의 나무는 계절마다 다른 빛을 드리우고 화단의 풀들은 비를 머금으며 자라며 벤치는 지친 이에게 잠시 쉬어갈 자리를 내어준다. 우리는 이미 그 안에서 살고 있다. 다만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익숙함 때문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때, 도시는 다른 언어로 말을 건넨다.
【57쪽_가로수와 시민공원 뒤에 숨겨진 설계】
선유도공원이 남긴 가장 중요한 가치는 ‘보존적 재생’의 모델이었다. 과거 도시재생의 공식은 낡은 것을 철거하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선유도는 기존의 구조물을 존중하면서 그 위에 새로운 의미를 덧입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부수지 않고, 새로운 이야기를 더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이후 유행처럼 서울 곳곳에서 이어졌다. 석유저장탱크를 문화 공간으로 바꾼 문화비축기지, 폐철로를 산책로와 녹지로 탈바꿈시킨 경의선숲길 모두 선유도의 실험이 남긴 파급 효과였다. ‘기존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새로운 삶을 불어넣는다’는 생각이 서울의 도시재생에서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85-86쪽_조경가의 눈으로 본 선유도공원】
개인 정원을 갖기 어려운 도시 환경에서, 공유 정원과 커뮤니티 조경은 도시민의 자연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작은 텃밭 한 구획, 함께 가꾸는 화단 하나가 이웃을 만나고 관계를 형성하는 소중한 매개체가 된다. 정원은 이제 참여와 관계, 치유가 이루어지는 일상의 무대다. 공간에 스며든 세심한 배려가 바쁜 도시 생활 속에서도 이웃이 될 수 있는 순간들을 만들어준다.
【153쪽_문화–정원은 공동체를 싹틔운다】
회복하는 도시는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동네의 작은 공원에서, 아파트 단지의 조경 공간에서, 직장 근처의 가로수에서도 경관의 여섯 층위를 발견할 수 있다. 감각으로 느끼고, 생태적 기능을 이해하며, 문화적 의미를 발견하고,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며, 경제적 가치를 인식하고, 과학적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다. 작은 관심에서부터 변화는 시작된다. 지역 공원에 대한 관심, 동네 가로수에 대한 애정, 지역 정책에 대한 참여. 이런 작은 관심이 모여 도시의 회복력을 만든다.
【212쪽_자연에 맞서지 않고 협력하기】
기후적응형 조경은 경제적으로도 효과적이다. 코펜하겐의 블루·그린 인프라가 보여주듯, 자연 기반 해법은 비용 대비 효과가 월등하다. 이러한 투자는 미래의 손실을 줄이는 ‘보험’이자 ‘저축’이다.
2022년 강남역 침수 피해를 떠올려 보자. 만약 강남 전체에 충분한 빗물정원과 투수성 포장이 갖춰져 있었다면 피해의 상당 부분은 줄었을 것이다. 여기에 대기 정화, 도시 냉각, 미세먼지 저감, 생물다양성 증진 효과까지 더해지면 경제적 가치는 더욱 커진다. 즉, 한 가지 시설이 다층적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자연 기반 해법의 가장 큰 장점이다.
【223쪽_강남이 침수될 때 광화문은 멀쩡한 이유】
도시의 회복은 기억의 형성으로 완성된다. 상처를 덮거나 잊으려 하지 않고, 그 경험을 통해 배우고 성장한 기억이 쌓일 때 도시는 진정으로 회복된다. 그리고 그 기억을 만들어가는 주체는 바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다. 오늘 길에서 발견한 작은 변화, 공원 벤치에서 느낀 계절의 전환, 이웃과 나눈 대화. 이 일상적 순간들이 도시의 기억을 만들고, 미래의 회복력을 키운다.
【271쪽_조경이 기억을 다루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