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기에 대한 영매, 무장한 치유자다.
어쩌면 이토록 아프게 건강할 수 있을까. _신형철(문학평론가)
2025년 FCA 도로시아 태닝 상 한국인 첫 수상!
현대미술가 이피 신작 『이피세世』 출간
미국 현대예술재단(FCA)이 매년 1명 선정하는 도로시아 태닝 상(상금 45,000달러)의 한국인 첫 수상작가 현대미술가 이피의 책, 『이피세世』가 출판사 난다에서 출간되었다. 이피는 시카고미술대학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회화, 조각, 설치, 퍼포먼스를 가로지르며 고려 시대 불화 기법과 동시대 재료를 결합해 ‘멸종한 몸, 미래의 몸, 타자의 몸’을 제단 형식으로 시각화해온 작가다. 이피는 한국 불화 전통과 합성 점토, 강화 플라스틱, 말린 오징어 등 비전통적인 재료를 결합하여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곳에 기생하는 몸과 미래, 과거를 오가는 상상 세계를 구축해낸다. 『이피세世』는 이피라는 예술가의 내면을 기록한 미발표 에세이, 일종의 비문碑文인 1부와 자신의 작품들에게 보내는 편지인 2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의 작품세계를 조망할 수 있도록 도판 113점을 실었다. 번역가 정새벽과 협업해 일부 텍스트를 영어로 옮겼으며 이는 이피의 서유기, 안과 밖도 아닌 사이, 경계의 탐구에 걸맞은 질문을 읽는 이에게 남겨준다. 여지껏 본 적 없는 문장가의 출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그의 산문은 예술가 이피의 사유와 세계를 정밀한 언어로 날래게 넘나들며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이 책은 작가 이피의 세계가 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 이피세라는 지층을 엿보는 신선한 충격을 줄 것이다. “생각과 표현 사이에 어떤 미끄러짐도 없는 문장”(신형철)으로 사이를 자유롭게 주유하고 변용하는 활달한 상상력. ‘23세기에서 온, 들끓는 검정과 검정의 안과 밖을 금색으로 발굴하고 있는 『이피세世』는 귀하고 문제적이다’(이원).
언어로 명명되지 않는 언어와 언어 사이
기괴하게 생겼지만 선악도 미추도 참과 거짓도 벗어난 존재
이피는 한국미술의 변방이나 혹은 밖에서 자신의 미술 작업을 한다. 정치적, 추상적 유행 관념을 내세우기보다 미술은 우선 손안에서 유희적이고 미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작가에게 미술은 작가의 두 손과 함께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과 순간 속의 예술이다. 그 과정에서 컨셉이 발생하며 그것은 우리 시대나 사회 문제와 별개이지 않다. 이피 상상력의 원천은 매일 밤 읽고, 쓰고, 그리는 책상 위에서의 소박한 표현 행위에 있다. 그는 문학 작품, 신화, 철학 등의 서적을 읽으며 그날 치의 일기를 쓰고, 잠자기 전에 작은 드로잉을 한다(221쪽). 작가는 원숭이와 함께 천축국으로 가고 있는 삼장법사의 서유기를 통해 자신의 서유Journey to the West를 추체험하며 자신이 품은 검고 따뜻한 짐승 한 마리를 감각한다. 작가가 보는 서양과 작가 자신의 피부와 몸이 보여주는 이방이 늘 충돌하는 환경에서 눈을 감고 검은 거울 밖으로 멀리 가고자 한다(235쪽). 언어로 명명되지 않는 언어와 언어 사이, 형상과 형상 사이를 비추어보며 그 사이 숨어서 떨고 있는 생명을 끄집어내어 대면하려고(258쪽). 작가는 잠과 잠 밖에 있던 것들, 내부와 외부에 있던 것들이 연결되어 기관이 되고 하나의 살아 있는 생물이 되는 것을 본다. 채색하는 순간 생명의 호흡을 시작하는 ‘실물’. 심연에서 끌어올린 그것. 비록 기괴하게 생겼지만 선악도 미추도 참과 거짓도 벗어난 존재. 그렇게 작가는 이 세상 어느 것과도 완전하게 다른 어떤 존재를 품에 안는다(260~261쪽).
내장이 밖에 나온 여자. 그만큼 예민한 여자. “내가 만든 여자”
봄과 보임 사이, 서양과 동양 사이, 피부와 피부 아래
오징어는 바다에서는 빛을 뿜으며 동료들과 대화하는 영리한 생물이지만 오징어잡이배의 빛에 이끌려 육지로 올라오면 냄새나는 갈색 흉물이 된다. 대학 생활을 위해 막 미국에 도착한 작가는 자신이 심해에서 끌어올려진 멍청이, 오징어사체가 된 것 같다고, 자신의 피부색은 좀더 누렇게 변한 것 같다고 감각한다(96쪽). 자기 몸이 노란색으로 칠해지는 기분이 들었다고(197쪽). 작가는 자기 삶의 시간들을 일기로 쓰기로 결심한다. 영어 공부를 위해 구독한 시카고 트리뷴의 기사를 스크랩하듯이 오리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일기에는 엄마가 보고 싶다고 썼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 멍청이로 취급받는 일이 있었다고 썼다. 작가는 자신에게 껍질이 생겨난 것 같다고 느낀다. 말 못하는 멍청이와 그 안에서 한국어로 세련된 정답을 외치는 나(172쪽). 작가는 이국에서 받은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나에게 가해지는’ 차별을 거대하고 그로테스크한 얼굴로 형상화해나갔다. 시카고 트리뷴은 한국에서부터 따라온 나방의 얼굴로 변해갔다(189쪽). “China Whore”라는 말을 듣는 여자. 내장이 밖에 나온 여자. 그만큼 예민한 여자. “내가 만든 여자”(197쪽).
서울을 떠나 외국에 체류할 때마다 서울에 있을 때보다 더 강렬하게 자신의 몸, 여자의 몸인 나를 느낀다. 아시아에서 온 낯선 여자, 그들의 시선으로 벗겨진 몸, 몸으로 판단당하는 나(222쪽). 밤에 만든 여신의 제단에 불을 켜면 피부 안쪽 세계의 오만한 주인이 나타났다. 이피는 아시아 여자의 외피 속에서 울고 있는 붉고 검은 덩어리를 꺼내 보여주었다. 봄과 보임 사이, 안과 밖 사이, 신과 인간 사이, 서양과 동양 사이, 피부와 피부 아래를 맴돌았다. 그는 두 존재로 갈라진 채 피부 안에도 있었고 바깥에도 있었다. 혹은 그 어느 것에도 있지 않았다.
작가는 이방인으로서의 나와 본래의 나가 분열하는 것을 감각하며 이 세상에서 없을 것 같은 작은 생물 형상들, 외로움과 분열의 작은 단위들을 창조하고 모아 큰 집적물을 제작했다. 작가의 손길은 시간 속에서 큰 형상을 이뤄갔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곳, 피부와 내장 사이 어두운 그곳에서. 작가는 심해의 어두운 빛 속에 숨은 경전을 찾으려 하는지 모른다. 어떻게 보면 없고, 어떻게 보면 있는 이 어둠 속에서 스스로 발광하는 생물의 눈빛, 그 무늬 같은 것을 언뜻 본 목격자로서.(「나의 서유기」)
또한 그는 여성의 몸에 대한 생각을 회화의 계속되는 화두로 가져가며 여성의 몸이라는 것을 입고 벗을 수 있다면 하고 상상해본다. 내 한몸이지만 여러 몸들인. 누가 나를 다치게 하면 또다른 몸을 입을 수 있도록. 그렇게 여성의 몸에 가해진 시선들, 금들, 억울한 누명들, 폭력들, 폭언들과 마음을 다치게 하는 무수한 차별. 그것들이 여성이 키울 수 있었던 가능성의 보따리들을 열어보지도 못하게 하는 현실을.
이피는 그림 속에서 일종의 메신저, 심부름꾼, 징조인 천사를 그린다. 남성들이 참여를 제한해온 여성들만의 제사, 제단을 설치한다. 천사를 자신의 몸처럼 사용하는 신보다 천사라는 몸을 중앙에 놓아주는, 색채와 내용을 전도시킨 제단화를 구상한다. 하늘과 땅,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 명사나 다른 품사들 사이의 조사나 전치사처럼 사이에 사는 메신저인 천사를 불러옴으로써 촛불 혁명의 광장에 있었던 우리의 손들을 클로즈업하는 신화를 선물한다.(「Fiminism Fnositicism」)
아픈 사람들은 안에 있다
나는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다
이피는 아픈 사람들은 안에 있다고 쓴다. 그들은 밖에 나오지 못한다고 쓴다. 이 당연한 사실을 할머니의 문병을 다니면서 알게 되었다고. 아픈 사람들은 침대에 누워 고개를 창 쪽으로 돌리고 있고 전자 창문이라고 할 수 있는 TV나 휴대폰 화면을 본다. 작가는 건물 밖에서, 창문 밖에서 그들이 누워 있는 방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건강한 사람들은 밖으로 나올 수 있다. 작가는 아픈 사람이 아니지만 안에 있다. 작가의 손은 아픔을 동력으로 종이 위에 선을 긋고, 조소의 재료를 떼어내어 굴리기 시작한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는 대신 창문을 만든다. 그림을 그리고 기괴한 형상을 빚고 글을 쓴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창문을 갤러리에 걸어놓는다. 사람들은 작가가 만든 창문을, 그 너머를 보려고 갤러리에 온다. 작가가 만든 밖을 보려고 그들은 온 것이다.
작가에게 죽음은 우리의 밖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그러나 저기 있는 자연으로서의 밖. 그 밖에서 작품이 온다. 언어, 의식, 작품, 건강, 시간의 밖. 그 밖이 작품에 개입하기를 원하지만 늘 밖은 작가의 해석이 가닿는 지점 밖에서 죽음처럼 똬리를 틀고 있을 뿐이다. 작가는 밖을 상실해도 병을 얻고, 가까이 다가가도 병을 얻는다. 그 길항과 허무 속에서 작품이 탄생한다. 아픔에 지면 작가는 밖을 만날 수 없다. 작가의 작품들 역시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갇혀 있게 된다. 작가는 창문을 만든다. 밖으로 다가가려는 창문, 밖이 다가온 창문. 그는 안에 있지도 밖에 있지도 않다. 그는 아프면서 건강하고 그의 작품은 밖도 안도 아닌 창문, 어떤 경계가 된다. 작가는 인간의 감각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비가시광선이나 주파수, 음역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는 작업실에서 자신의 감각으로는 감지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여 아프게 하던 습기를 고려 불화의 선과 색채를 원용해 금빛 안료로 그린다.(「나는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다」)
명랑한 죽음, 시끄러운 천국
더이상 살아 있지 않은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외할머니와의 사별 후 소리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작가는 이를 회화에 밀착시켜 할머니의 부재에 주파수를 맞추고 들려오는 모든 소리를 색채 감각으로 환원했다. 감각의 받아쓰기를 하듯 색채를 받아쓰며 어떤 소리가 어떤 색을 불러오는지 느끼려고 애쓴다. 작가는 사랑하는 할머니라는 매체를 통해 시각과 청각이 동시에 일어났던 개인적 기억이 이끌어낸 청각의 육체화, 시각화, 색채화를 경험한다. 이피의 감각은 ‘사라진 할머니’라는 매체를 통과하며 죽음이 알록달록해지고 명랑해지고 할머니의 반짇고리처럼 다채로워지는 것을 경험한다. 이는 다른 한쪽이 발전하면 다른 한쪽을 구속하고 마취하는 현대적이고 기술적인 매체들과 다른 것이다. 작가는 ‘부재’라는 투명한 인터페이스를 사이에 두고 상호작용하는 경험을 통해 이 감각의 영역을 저 감각의 영역으로 확장하게 된다. 이 경험의 시간들은 인간의 영역을 확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세상뿐만 아니라 부재와의 소통도 생생한 미술 행위가 된 것이다.(「명랑한 죽음, 시끄러운 천국」)
작가의 몸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 자체이자 그 사물들이 전해주는 떨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떨림을 주는 사물을 내 안의 타자로 감각하며 만져지는 사물과 만지는 사물인 나의 몸 사이를 순수한 사물성으로 교감하고 감동한다. 그때 사물은 하나의 바뀐 몸, 나의 몸이라는 사물과 자신의 사물성으로 떨림을 교환한 존재가 된다. 그것은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것, 부은 몸으로 힘겹게 의자에 앉아 있는 할머니, 화분에서 살아 있는 꽃을 뽑아버리는 여자, 등에 이빨이 가득 솟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생물들로 작품에 등장한다. 순간을 영원히 살고 있으나 그 순간이 영원하기에 죽어 있다고도 할 수 있는 미술적 오브제들. 작가는 삶과 죽음 사이에 아주 얇은 막이 있다고 생각하고 연필과 붓으로 그 간극을 따라간다. 그렇게 작가의 모든 작품은 일상이라는 현실을 딛고 변용되고 환기되어 공동체를 향해 약진한다. 기억 속에 인형의 솜털 속에 살아 있으나 더이상 살아 있지 않은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생사물生死物’들을 작가는 심해에서 건져올리고 풀어준다. 이피에게 퍼포먼스는 목격자로서의 작가를 현장에 초대하며 서로 달라붙은 근거리 감각으로서 만짐이라는, 만져지는 대상과 만지는 몸 사이에 일어나는 작용을 펼치며 퍼포먼스를 한다.(「나는 작가 김끼라와 같이 그리고, 만들고, 전시한다」)
나는 지금 내 속에서 ‘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나의 캄브리아기를 지나가고 있다
작가 이피는 새로운 존재들이 합하여 새로운 개체를 만들어내는 데 관심이 있다. 그 생물 종을 현시하는 촉매제는 작가의 몸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열이다. 열은 작가에게 포착된 두 동물 종을 끌어당겨 하나의 몸으로 합생시키며 존재하고, 존재했던, 존재할 자들을 뻗어나가게 한다(31~32쪽). 이피는 관계의 산물인 인종과 젠더를 나라는 몸 위에 껴입는 또다른 몸으로 감각하며 그 표피의 경계, 감춤과 벗음, 형체 없는 형상을 조각하려는 칼에 대해 드로잉한다(47~48쪽). 내가 되고자 나에게 닥쳐오는 겹겹의 ‘나’들의 밀려나감과 떠남을 조각하며 이전의 나를 지우면서 지금의 나를 만들어간다(53쪽). 그들의 몸에 검은 찰흙을 붙이고 금분을 칠한다(61쪽). 그의 글과 작품 속에서 괴로움과 건망증, 부주의는 의인화, 의동물화, 의물화를 거쳐 스케치된다(73~77쪽).
작가는 매일 일기를 쓰듯 자신이 경험한 하루라는 시간을 어떤 형체로 변용해 스케치한다. 우리는 지구 자연 환경이 급속도로 파괴되는 인류세Anthopocene를 지나고 있다고 주장한 폴 크뤼첸의 견해를 이피는 자신의 ‘일기적 형상’으로 감각한다.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들 사이에서 생겨난 에이리언 같은 형상들에 이름을 붙여주면서 작가는 자신 또한 ‘이피세Leeficene’라는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를 억압하고, 공포에 짓눌리게 하고 분노케 하는 것이 자신을 차별하는 시선, 편견에 찬 문화적 토양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차츰 그 낯선 것의 패러독스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 에이리언들은 어떤 곤충이나 동물, 이름 붙일 수 없는 형상들과 비슷했다. 그 정체를 홀로 앉은 밤에 대면하며 작가는 차츰 그것을 나와 섞인 나의 외부 혹은 나와 낯선 타자의 혼합물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작가는 그 곤충이 자신 안에 숨은 언어 이전의 존재이며, 따로 날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의 엄청난 곤충이라는 것을 깨닫는다.(「이피의 진기한 캐비닛」)
이는 작품과 작가는 별개로 존재하는가, 작가는 작품으로 어떻게 구현돼 있는가, 감상자와 작가가 ‘본다’는 행위로 교감할 수 있는 부분은 어느 만큼인가, 작가는 작품 속에서 제 존재의 알리바이를 어떻게 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피는 그 답을 부분과 전체, 부분 속의 전체 속에서 찾고자 한다. 그의 작품은 몸처럼 한 덩어리의 전체이지만 각 부분을 들여다보면 작은 부분들 각각은 독립된 전체로서 완결성과 풍성함을 지니고 있다. 하나의 작품이지만 부분으로서는 몇백 개의 작품인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몸을 복잡다단한 시간과 사건, 인물, 관계, 사회구조가 새겨진 장소의 몸으로 구축한다. 내 몸이라는 장소에 기생하는 수천의 몸을 단일 형상 안에 혼합, 병렬 조각한다. 작가는 타자에 의해 나를 감응할 수 있는 몸이 되었다고 말한다. 몸이 어떻게 이 세계의 존재 방식으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다른’ 삶이 솟아오르는 비가시적인 장소가 되는지 밖을 나와 접촉, 충돌시키는 방식으로 드러내며 그것을 다시 손의 주물럭거림이라는 노동 행위를 통해 현상시킨다.(「내 얼굴의 전세계」)
신문에서 읽은 기사나 정치적, 사회적 이슈들은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그러나 이제 작가 이피의 손을 통해서 존재할 새로운 생물의 몸이 되었다. 작가는 그들의 몸에 모두 이름을 붙이고 종species별로 분류했다. 온몸이 뜯어진 택배상자로 덮여 있는 다리가 많은 사람, 백 개가 넘는 혀를 내밀고 있는 조개 등. 그들의 모습을 드로잉하거나 찰흙으로 빚으며 큰 회화 작업이나 조소 작업의 일부로 만들었다. 그렇게 이피의 작업은 멀리서 보면 하나의 개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수십, 수백 개의 몸들로 이루어져 있어 보이지 않는 지층을 형성한다. 빙하기 이후 유례없이 빠르게 수많은 생물종들이 멸종되는 이 인류세 시대에 이피의 동식물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피는 이 지질시대에 ‘현생누대 신생대 이피세’라는 이름을 붙이고 식탁을 차린다. 생물들이 죽었다가 다시 환생한 식탁,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로 새로 태어나고 다시 죽고 또 태어나는 전위, 또다른 생명체 같은 공간을 상상하기를 작가 이피는 『이피세世』를 통해 제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