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는 샅샅이, 어느 때는 듬성듬성
이는 시인 이원의 기묘한 산책기!
산책은 지도를 들고 길을 잃는 풍경.
산책은 침묵의 안쪽, 어떤 외마디 길.
산책은 눈이 등에 가 있는 셈.
기억은 어디에서 흘러나오는가.
기억을 산책하는 일,
잃어버린 시간은 마지막까지
잃어버릴 수 없는 시간이다.
1992년 『세계의문학』을 통해 등단하여 현대시학작품상, 현대시작품상, 형평문학상 등을 수상한 시인 이원의 산문집 『어슬렁과 기웃거림』이 출판사 난다에서 출간된다. “발 없는 마음에 발을 달고”(『물끄러미』, 2024, 난다) 지도를 들고 길을 잃어버리는 재미를 찾으며 글을 써온 이원 시인의 산책기 69편을 6부로 엮은 책이다. 시인에게 산책은 침묵의 안쪽. 어떤 외마디 길. 또한 시인을 간명하게 만들어주는 일. 산책은 시인을 간명해진 몸으로 삶 속에 머물게 하며 빛이 사라지지 않게 해준다. 시인에게, 산책 예찬, 또는 산책에의 매혹이 어떻게 계속 지속되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나를 벗어나는 나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라 답한다. ‘목적 없이 걷기’는 내가 나를 벗어나는 행위의 반복. 산책이란, 유용에서 무용으로, 일상에서 일상 너머로 걸어보는 일이다(「새벽을 향해 걷기」). 이른 아침 인적이 드문 길을 걸을 때, 동은 텄지만 데워지지 않은 아침의 진관사까지 이르는 길이 좋았다. 소나무로 폭 싸인 진관사. 집에서 나와서 거기로 가는 동안 하나씩 하나씩 잊고 잃어버린 것 같다. 진관사에 이르렀을 때 가벼웠다(48쪽). 그렇게 산책하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곧 혼자로 돌아간다는 것. 문을 닫으면 적막이 찾아온다는 것. 적막 속에 빛을 켤 수 있다는 것. 다만 그 빛은 밖의 빛과 동일하다는 것. 웅크리고 잠든다는 것. 동네는 한 마리 고슴도치 같다는 것. 같은 햇빛 속 뾰족뾰족한 바늘이라는 것과, 나는 그 바늘 중 하나라는 것. 그러한 돌아옴에는 고독. 고독보다 큰 연대가 있다(39쪽). 그러므로 시인에게, 어떤 것을 잊고, 잃고 싶을 때, 고요해지고 싶을 때, 벗어났다 다시 일상이라는, 유용이라는 제자리로 돌아오고자 할 때, 최종의 결심은 “산책하자”. 어느 때는 작정하고 샅샅이, 어느 때는 듬성듬성. 그를 위해 필요한 것은 어슬렁과 기웃거림.
소환되지 않는 시간이 있다. 환원되는 시간이 있다. 잊히지 않는 시간이 있다. 보내지 않았고 보낼 수 없고 보내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눈빛은 오로지 내게 한 방향을 가리킨다(176쪽). 그런 식으로 무언가를 가만히 들여다볼 때, 시인은 무수한 속도와 번짐과 시간을 역행하며 시간을 온전하게 만나게 된다(164쪽). 지금, 여기.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을. 시인에겐 시를 쓸 때, 언제나 ‘지금, 여기’가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현존이라는 그 뜨거운 말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얼마나 위태로운 시간인가를 알아버렸고, 그 위태로운 존재가 바로 ‘나’라는 사실에 늘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라진 그 시간들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남아 있는 기시감 같은, 몇몇 기억이라는 것을 내가 경험한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태어나는 순간 사라지는 것이 시간이라면, 사라지지 못하는 시간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138~140쪽) 그리 질문을 던지며. 사라진다는 건 생이라는 시간을 받치고 있는 유일한 받침대이므로, 시인은 나타나는 순간 사라지는 운명을 가진 시간의 풍경을 시를 씀으로써 포획하고자 한다. 그것은 곧, 세계의 안으로 좀더 깊이 들어가겠다는 그의 열망이자, 세계의 안쪽을 향한 한없는 걷기와도 같다(「저물녘에 쓰는 편지」).
엄마는 하루에 한 번 꼭 산책을 간다.
걸어야 얼굴이 밝아지는 사람이다.
나도 그렇다.
세상에 나와 첫 산책은 엄마와 했을 것이다.
어느 여름날, 엄마는 그날도 산책 나가고 시인 혼자 마루에 누워 있다가 설핏 잠이 들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어린 엄마와 나를 보았다. 우리는 함께 허공의 반달에 나란히 걸터앉아 있었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사방은 푸른빛이었다. 이렇게 조그만데 어떻게 엄마가 되려고 해? 어린 시인이 물었다(30쪽). 엄마와의 첫 산책에는 풀도 바람도 구름도 하늘도 함께했다. “이것 봐” 하면 엄마는 신기하게 그것을 함께 보고 있었으며, 구름을 손으로 가리키면 이미 구름을 잡아두고 있었다(146쪽). 그것은 최초의 혼자 걷기. 그때 시인은, 엄마 있는 소리가 나면 거기로 갔다. 엄마의 두 손을 믿었을 것이다. 아니 믿기 이전 엄마가 그곳에 있었다(142쪽). 그러니, 엄마와 목적 없는 산책을 자주 해야겠다. 최소한은 꼭 해야겠다. 그리 마음먹는다. 엄마가 굽은 허리로 펴지지 않는 무릎으로 마른 몸으로 걷다가 “이 꽃 좀 봐” 그럴 때, 내가 애기 때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이미 보고 있는 시선이 되어야겠다. 엄마의 산책 어딘가에 그늘을 가진 나무로, 나무의 바람으로 있어야겠다(31쪽). 그렇게 엄마와 산책을 나서는 시간은 천천히 걸어야 한다. 엄마는 뒤에서 따라온다. 시인은 누군가에게 등을 보이는 것에 예민하다. 등은 벗어나는 순간을 가지고 있기에. 또한 등은 헤어지는 순간을 내포하고 있기에(70쪽). 엄마가 앞에 가, 시인이 그리 말해도 엄마는 한사코 그를 앞세우고 한 두 걸음 뒤에 따라온다. 나란히 걷고 있으면 어느새 뒤에 가 있다. 시인이 빨리 걸었는지 엄마가 더 느리게 걸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엄마가 점점 멀어지는 꿈을 꾼 적이 있다. 내가 모르는 사이 내 등 뒤에서 멀어지는 엄마를 보게 되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엄마는 등을 보고 따라온다. 등에 눈이 달린다는 말을 알 듯도 하다(191쪽). 그러므로, 산책은 눈이 등에 가 있는 셈.
헤어지고 나서 뒤에서 오래 지켜보는 사람은 헤어지는 사람에게 마음이 많이 와 있는 사람, 누군가를 알고 싶다면 등을 보면 안다. 헤어지고 난 뒤의 등은 얼굴보다 훨씬 더 많은, 솔직한 표정을 보여준다(71쪽). 그러므로 선생님들이 가신 너머를 생각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곳이 자주 궁금하다. 선생님들께 바싹 붙어 있었던 시인에게 너머라는 공간이 생겨났다는 것. 선생님들은 이곳을 어떻게 넘어가셨을까. 이곳에서 저곳 사이 무엇을 보며 건너가셨을까. 소리 하나 없는 침묵으로 내게 무엇을 보라고 하셨던 걸까(59쪽). 태어나고 자라고 다시 소멸해가는 방향을 ‘자연(自然)’이라고 하는데, ‘자연’은 ‘그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족(自足)의 방향을 이미 내장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곳은 가장 끝이 아니라 가장 처음은 아닐까.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시작되는 시간이 다시 있는 것일까(139쪽). 다만 내가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지 계속 모르는 것이야말로, 시인을 살게 하는 어떤 힘이 되기도 한다(101쪽). 알지 못한 채로, 오지 않은 시간에 먼저 가보는 것. 한 번이고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가보는 것. 있지도 않은 시간에 가보는 것. 그보다 먼저 그의 먼 시간에 가보는 것. 가서 살이 타고 뼈가 타는 것을 경험하는 것. 그리고 혼자 간 길을 혼자 돌아오는 것, 사랑의 안쪽으로 걸으며, 무수하게 걸으면서(102쪽).
지금 어두운 제 몸을 통과하는 제 언어는 불투명하고 가라앉지도 않았습니다. 이 어둠 속에서 밝음과 나직하게 몸을 바꾸는 시간은 아직 생각해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둠의 대척점으로서 밝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둠의 몸인 밝음을 기다리다보면 어느 순간 저물녘처럼 가장 나직하며 가장 격렬한 언어를 갖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제 눈앞은 어느덧 어둠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어둠은 출렁이지 않아 창에 제 얼굴이 흐르지도 못한 채 떠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은 얼굴을 제 안에 새기는 것을 늘 잊지 않습니다. 선생님께 편지를 쓰기 시작할 때는 무겁게 쓰지 말아야지 했는데, 써놓고 보니 비장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제 자신이 못마땅하지만, 그러나 바로 여기가, 제 몸이, 제 언어가 서 있는 지점입니다. (…)
저는 여전히 저물녘이 되어서야 편지를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날도 제 몸은 언제나처럼 밝음과 어둠이 몸을 바꾸는 경이의 순간이 어떻게 저토록 나직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 휩싸여 있을 것입니다.
_「저물녘에 쓰는 편지」 중에서
※ 이 책은 산문 『산책 안에 담은 것들』(2016)의 전면 개정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