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문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오늘의 한국적 서예문화 풍토 속에서 나는 감히 추사秋史를 비평하고, 소전素筌을 비평하고, 동강東江을 비평하고, 21세기 오늘의 한국적 서예문화 현실과 그 조류 등을 비평했다. 이에 혹자는 네 어찌 감히 추사를 비평하고, 소전과 동강을 비평할 수 있느냐며 따져 묻기도 할 것이다.
나는 본시 담소심약膽小心弱하고 숫기가 별로 없어 대중 앞에 선뜻 나서기를 주저하고, 세상살이 힘의 중심으로부터 저만치 비껴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러함에도 때로는, 그 어떤 사람이 자신의 학·예술적 입장과 다른 견해를 지나치게 비방하거나, 이미 보편·정설화된 학·예술적 이론을 지나치게 왜곡하고, 나의 인간다운 삶이 지나치게 옥죄이는 질곡桎梏에 처하는 경우, 그들 불편함을 차마 견뎌내지 못하고, 용감한 전사가 되어 저돌猪突하고픈 충동을 느낀다.
“학문은 마음의 자각에서 터득하는 것이 제일 소중하다. 학문의 참 뜻을 마음에서 탐구하여 그르다면 그 말이 비록 공자로부터 나왔다 할지라도 감히 옳다고 할 수 없다. 하물며 그 말이 공자보다 못한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더 말할 나위 있겠는가. 또한 학문의 참 뜻을 마음에서 탐구하여 옳다면 그 말이 비록 일반 서민으로부터 나왔다 할지라도 감히 그르다고 할 수 없다. 하물며 그 말이 공자로부터 나왔다면 더 말할 나위 있겠는가. …(중략)… 무릇 진리[道]란 세상 사람 모든 이의 진리요, 학문이란 세상 사람 모든 이의 학문이다. 주자朱子 한 사람이 독점하여 사유화할 것도 아니요, 공자 한 사람이 독점하여 사유화할 것도 아니다.”(王陽明, 『傳習錄·中』 「答羅整菴少宰書」)
“학문이란 그 참 뜻을 마음의 자각에서 터득하고 몸소 경험하여 정밀하게 판단·선택해야 한다. 요사이 나의 논저 중 그 학설이 내 뜻에 합치되면 설사 반대했던 송宋·원元 대의 서론일지라도 취하고, 내 뜻에 불합하면 설사 왕희지王羲之의 서론일 지라도 신뢰하지 아니한다.”(李匡師, 『書訣』 「後篇·下」)
윗글 중 첫 번째 문장은 중국 명나라 중기 왕양명王陽明의 말이요, 두 번째 문장은 우리나라 조선 후기 이광사李匡師의 말로, 내가 평소에 가끔 되새기며 곱씹어 보는 명언名言 중의 하나이다. 왕양명의 “학귀득지심學貴得之心(학문의 참 뜻은 마음의 자각에서 터득함이 제일 소중함)”과 이광사의 “학귀심득신행學貴心得身行(학문의 참 뜻은 마음의 자각에서 터득하고 몸소 경험하는 것이 제일 소중함)”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왕양명과 이광사의 “학귀심득”의 정신적 기조는 모든 인문활동 상에서 이루어지는 진위眞僞, 선악善惡, 시비是非, 호오好惡, 미추美醜 등 제반 가치의 근거와 기준이 개개인의 타고난 선천적 순수주체심에 있다는 입장이다.
특히 왕양명과 이광사의 “학귀심득”적 창작과 비평정신은 이미 기억하고 있는 지식이나 예술양식을 따르거나 반복해서 숙련하고 답습하는, 그리하여 지루하고 일상적·통속적인 예술 활동은 오히려 타인의 삶과 개성의 표절 행위요, 늘 새롭게 약동하는 자기개성·자기생명의 진정어린 유로流露에서 이루어지는 창작과 비평이 보다 참된 예술적 심미활동이라고 긍정하는 입장이다.
나는 과거 서예를 포함한 예술비평의 학문적 이론이나 방법론 등에 관한 커리큘럼(curriculum)을 이수하거나 학습한 바도 없고, 서예의 역사·창작·심미 등 서예문화에 관해 비평을 일삼는 서예비평가라고 내세운 바도 없다. 다만 서예문화에 관해 관심이 많은 사람 중의 하나요, “학귀심득”적 창작, 비평정신을 높이 새겨 따르고 싶은 사람 중의 하나일 뿐이다.
나는 서예를 창작하거나 서예비평문을 쓰는 경우 “학귀심득” 정신에 충실하고자 온 마음[一心]을 기울인다. 서예의 창작과 비평은 모두 자각적 주체심의 자발적 개념활동이요, 주체자아의 근원활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나의 서예 창작과 비평활동은 가능한 한 그 어떤 특정인의 철학적·예술적·윤리적 이론이나 방법 등을 수단으로 삼거나 그에 의거하지 아니하고, 가능한 한 내 열린 마음의 자유의지에 따라 마주하는 대상과의 화이부동적和而不同的 소통을 통해 나 자신의 생각을 적극 개진하고자 한다.
그동안 나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서예가나 또는 서예문화에 관해 종종 비평문을 써 온 바 있다. 이들 비평문은 대부분 “학귀심득” 정신의 기조 위에서 이룩한, 다소 무미無味하면서도 한자 용어가 많은 산문散文 형식의 글들이다. 이제 나이 갓 여든을 넘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이들 글들을 한 곳에 모아 약간의 수정과 첨삭을 거쳐 한 권의 책으로 엮고, 『한국 서예비평 산고韓國 書藝批評 散稿』라는 이름으로 슬며시 세상에 내 놓는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동호인 여러 분들의 많은 관심과 질정을 기대해 본다.
2022년 초여름
송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