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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와 일본이 전쟁으로 얽힌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호주에 공부하러 가 있는 동안 처음 알게 됐다. 그런데 그런 과거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난 호주 사람들은 일본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 놀랐던 기억이 있다. 책 속에 묘사된 일본군의 혹독하고 잔인한 만행은 읽기 힘들 만큼 생생했다. 작가의 아버지가 바로 일본군 포로로 강제노역을 견디다 살아 돌아온 참전용사였다니, 그 참혹한 묘사가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군의관으로서 극한 상황에 놓인 동료 병사들을 살리려 애쓰지만, 일본군이 요구하는 노동 인원을 채우기 위해 상태가 좋지 못한 동료들마저 죽음의 노역으로 보내야 했던 도리고. 그는 그때의 선택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옥 같은 포로생활 속에서도 에이미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은 그를 버티게 하는 희망이지만, 폭발 사고로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에 그 희망마저 무너진다.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은 그를 전쟁 영웅으로 칭송하지만, 그의 마음속은 죄책감과 상실감으로 복잡하기만 하다. 결혼생활에서도 충만함을 느끼지 못한 채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쾌락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시드니의 다리 위에서 에이미와 우연히 마주하고,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시간과 되찾을 수 없는 사랑 앞에서 또 한 번 괴로워한다. 얼마 전에 읽은 《아무튼, 메모》에서 접했던 조선인 전범의 이야기도 떠올랐다. 일본군 아래에서 포로들을 감시하고 구타했던 조선인이 전후 사형에 처해지는 반면, 그에게 명령을 내렸던 일본군 장교는 처벌을 피해 좋은 아버지이자 평범한 사회인으로 살아간다. 소설 속 이들의 엇갈린 운명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식민지 조선인이라는 처지가 그가 저지른 폭력을 없애주지는 않겠지만, 책임이 돌아가는 방식은 과연 공정했을까. 호주 작가의 눈에도 이러한 불합리가 보였다는 것인지,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을 뜻밖의 자리에서 마주한 기분이었다. 모든 것을 전쟁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고, 전쟁으로 엇갈린 운명 때문에 죽을 때까지 마음을 붙잡지 못한 채 방황하는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가.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이전의 삶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고와 동료들의 모습을 보면서, 살아남은 뒤의 시간을 견디는 일 또한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하게 됐다. 그런데 그 지옥 속에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살리려 애쓴다. 좋아하지 않는 동료라도 버릴 수는 없다. 한 사람을 포기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 모두를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잔혹한 폭력과 인간을 향한 선의가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끔찍했던 기억이 조금씩 희석되고, 끝내 사람에 대한 선의가 남는 것. 아흔네 살에 이르러서야 포로생활의 구체적인 기억에서 벗어나 인간의 선의를 믿게 된 인물의 모습은 그래서 더욱 먹먹했다. 고통을 잊는 일과 역사를 잊는 일은 다르겠지만, 상처 입은 사람이 다시 인간을 믿을 수 있게 되는 순간에는 분명 회복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비극을 기억하면서도 사람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는 것. 그렇게나마 인간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이런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게 하는 힘이기를 바란다. 한 사람의 생애에 걸친 긴 시간을 담아내면서 사건의 시점을 앞뒤로 옮기고, 여러 사람의 삶을 교차해 보여주는 입체적인 소설이다. 읽는 내내 마음도 과거와 현재, 사랑과 폭력, 연민과 분노 사이를 오가며 복잡해졌다. 최근 읽은 외국 소설 가운데 상당히 충격적이면서도 오래 기억에 남을 작품이었다. _______ 그가 시선을 들자 자신이 죽음의 선고를 내린 사람들이 그를 둥글게 에워싸고 서 있었다. 그들이 그에게 저주를 퍼붓고, 돌아서서 욕설을 내뱉을 것 같았다. 그것이 죽음의 행군이 될 것임을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 지미 비글로가 앞으로 나섰다. 건강하세요, 대령님. 그가 이렇게 말하면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동안 해주신 모든 것 감사합니다. 자네도 조심하게, 지미. 도리고 에번스가 말했다. 그렇게 백 명의 남자들이 한 명씩 차례로 그와 악수하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인사가 끝나자, 그는 사열장 한편의 정글로 걸어들어가 울었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 리처드 플래너건, 김승욱 저 #먼북으로가는좁은길 #리처드폴래너건 #문학동네 #2014맨부커상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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