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음이 생기고 있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두 손 가득 물을 쥐었다”
식물과 손잡고 슬픔이라는 물속으로
침잠해가는 우리들의 여름
문학동네시인선 217번으로 이승희 시인의 네번째 시집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를 펴낸다.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승희 시인은 첫 시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창비, 2006)에서 자신의 삶을 기반으로 하는 슬픔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두번째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문학동네, 2012)에서는 맨드라미로 대표되는 식물의 이미지와 일상의 풍경들을 통해 슬픔에 대한 더욱 깊어진 고찰을 보여주었다. “사물과 사람이 언제 문학을 포옹하는지, 문학은 어떻게 사물과 사람을 끌어당기는지에 대한 답을 기대할 수 있는 시”라는 평을 받으며 전봉건문학상을 수상한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문예중앙, 2017) 이후 8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어두운 곳을 들여다보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슬픔과 죽음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생명력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식물의 이미지와 섬약하고 민감한 감정이 만나는 순간 발생하는 감정의 울림, 요컨대 여름과 식물과 슬픔이 한자리에 모여드는 바로 그 순간을 이승희 시인은 차분하고 깊은 언어로 담아낸다.
밤이 되면 집은 불을 밝혀 물속으로 돌아간다
비로소 물속에도 꽃이 피고
나는 바깥을 견디지 않아도 좋았고
슬픔은 슬픔을 견디지 않아도 좋았고
세탁소 골목을 지나가는 몇몇 물고기들이
좋은 사람처럼 보여서 좋았다
(...)
작약이 이렇게나 피었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잘 찾아올 수 있을 것인데
물은 고요하고
대문 앞 가로등이
작약의 낯을 보고 있다
오래 만지고 있다
물속을 날아가는 나비 한 마리 같았다
_「헤어진 후」 부분
이번 시집에는 ‘물속’을 오래도록 가만히 들여다보거나 그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 시적 화자가 자주 등장한다. 그는 왜 물 가까이에 있으려 할까. 아마 슬픔과 물의 속성이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축축하고 물기가 묻어 있다는 것. 인상적인 점은 충분히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화자가 비관에만 빠져 있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화자는 되레 물속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초점을 맞춘다. 물속에도 “꽃이 피”며 “나비 한 마리”(「헤어진 후」)가 날아다닌다. “기차가 물속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당연히 물속에도 비는 온다”(「아름다운 버드나무 가지는 물에 잠겼네」). 그리고 무엇보다 화자는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헤어진 후」)하다는 점을 발견해낸다.
이처럼 슬픔에서 벗어나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슬픔에 깊이 빠져듦으로써 그 안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을 발견해내는 시인의 태도는 초연하고도 성숙하게 느껴진다. 사람이 물속에서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는 것과 달리 시인은 슬픔이라는 거대한 물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숨쉬고 일상을 살아간다. 오히려 시인은 “물 밖으로 나올 마음이 없”(「슬픔은 다할 수 없어」)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시인은 지금 “슬픔을 다하는 중”(같은 시)이기 때문이다. ‘슬픔은 다할 수 없어’라는 시의 제목처럼 슬픔에는 끝이 없기에 그저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슬픔 속에 있으면 되는 것이다.
연못가 버드나무에선
바람이 불 때마다
몇 마리의 물고기가 툭툭 놓여났다
공중을 물들이며 스르르 잠기는 물고기
나는 그것을 며칠씩 바라보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버드나무처럼 웃는데
공중으로도
물속으로도
잘 잠겨들었다
공중과 물속이 서로를 잘 이해하는 것 같았다
버드나무는
물속에 잠긴 발등을 오래 바라보며
고요하다
이게 버드나무의 마음이라면
연못 속에서도
나뭇잎에서도
물고기들이 태어나고 자란다
어느 저녁
나도 툭 놓여나겠지
밤이 연못 속으로 고이고
물속은 한없이 깊어지고
나를 데려다준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 텐데
살아 있는 것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할 때
_「초록 물고기」 전문
슬픔에 깊이 잠겨 있는 화자는 자신이 삶과 죽음의 교집합 속에 존재한다고 느끼는 듯 보인다. “잠시 살았다가 또 잠시 죽었다가 하였다”(「밤은 정말 거대하고 큰 새가 맞다네」), “살아 있는 것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할 때”(「초록 물고기」), “나는 어쩌면 아직 살아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물속을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면」) 같은 시구에서 화자의 그런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삶과 죽음은 각각 극과 극에 존재하며 삶은 밝은 것, 죽음은 어두운 것으로 여겨진다. 삶은 지향해야 하는 것이며 죽음은 피하고 싶은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화자는 반대로 “죽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사는 게 무”(「우리는 여수에서 하루를 살고」)섭다고 말하며 “죽음은 살아낼 수 없는”(「아름다운 버드나무 가지는 물에 잠겼네」) 것인지 고민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인이 ‘놓여난다’는 동사를 애정한다는 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시인은 화자의 입을 빌려 “놓여 있다와 놓여난다는 말을 좋아해요”(「백합의 일상」)라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화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결국 죽음이 ‘놓여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것에 묶여 있는 현실의 삶보다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죽음 쪽으로 몸을 트는 것. 하지만 그렇다고 화자가 삶을 아예 등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모든 것으로부터 놓여나는 상태인 죽음과 가장 가까이에 살기 위해 놓여난 상태에 있는 것들, 대표적으로는 자연물들을 ‘따라’ 한다. 화자는 “물의 흐름을 따라”가고 “목단 나무줄기를 따라”가고 “강물을 따라”(「안방 몽유록」)간다. “구름의 모양을 따라”(「여름이니까 괜찮아」) 해보기도 하고 “여름의 모양을 따라”(「여름의 모양을 따라 해보는 날」) 하기도 한다. 삶 쪽에 머물면서 죽음의 놓여남을 바라보는, 즉 삶과 죽음을 겹쳐볼 수 있는 자리에서 살아가는 나름의 방식을 터득한 것이다.
이렇듯 이승희의 시에서는 살기 위해 죽음의 방식을 행하는 역설이 발생한다. 시인의 이러한 태도는 ‘여름’이라는 계절과도 연결된다. 이승희의 시에서 ‘여름’은 삶과 죽음, 슬픔을 잠시 잊고 초연해질 수 있는, 즉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처럼 보인다. “여름은 찬란했고 비로소 폐허가 되었다”(「외딴집」)나 “슬프다는 말을 데려와 잘 재워주자/ 여름이 지난 것을 모르도록”(「유령에게」) 등의 시구를 보면 시인에게 슬픔에서 잠시 벗어나는 여행과도 같은 계절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름은 잠깐의 일탈과 같이 짧게 지속된다. 그렇지만 이승희 시인은 조급해하지 않고 성숙하고 유연하게 여름을 기다린다. 당장의 절망에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슬픔에 몸을 맡기며 여름을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 역시 이 시집을 읽다보면 각자의 슬픔을 자신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여름이 오고 가듯 자연스러운 속도와 방식으로 말이다.
여름의 모양으로
슬플 땐 더 슬픈 노래를 듣고
슬플 땐 더 슬픈 노래를 듣고
절벽에서 떨어지듯 자는 잠처럼 옥수숫대 사이로 여름이 스쳐지나가고 함께 걸어다니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생각하면 한 세계가 다 지난 것처럼 외로웠다 여름은 그렇게 캄캄한 것들을 잠시 닫아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했다 손가락으로 내 몸을 자주 만져보는 버릇이 생겼다 어떤 모양도 되지 못하는 나는 또다른 나의 생일을 믿기로 했다
사실은 처음부터 함께 있었다 감춘 것들을 아직 보여주지 않는 세계가 있을 뿐이고 우리는 그 세계를 끝내 만나지 못하고 동화는 그렇게 끝나겠지만 여름이 오고 다시 같은 기억으로 괴로워하다가 여름으로 버려질 테고 거의 정지 화면처럼 한없이 느리게 여름을 걸어가는 사람이 되겠지 여름의 모양을 따라 또 함께 걷고 싶었던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겠지 나는 여름을 다 살지도 못한 채 여름의 폐허만을 사랑한 채
_「여름의 모양을 따라 해보는 날」 부분
슬픔이 결국 존재의 무력함이나 죽음으로 귀결한다면, 이승희 시인은 그 어두운 곳으로 향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역설은 생겨난다. 그는 자신을 버리는 만큼 그가 바라는 존재를 얻을 것이다. 병드는 만큼 깊어질 것이다. 시집 전반의 식물 이미지와 미적인 풍경은 환부를 부드럽게 감싸지만, ‘놓이고’ ‘돌아가고’ ‘따라’ 흐르는 서술어 속에서 마음의 요동은 감지된다. 슬픔에 충분히 흔들릴 때, 최초의 ‘나’는 사라지고 그는 오롯이 슬픔으로 건축된 하나의 존재를 획득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슬픔을 다할 수 있는 것인지, 또한 이 슬픔의 서사시가 마침내 어딘가에 도달할 것인지는 답하기 어렵다. 다만 시인이 ‘무언가’라고 말한 그 타자성과 직면하는 순간처럼, 이 또한 사람이 이룰 수 있는 기적이라고 말해볼 뿐이다.
_박동억, 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