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더미를 남기고 사라진 아버지를 찾아 헤매는 프로 알바생 ‘에스’
한국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사이족 예술단원 ‘레무’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로의 탈출을 꿈꾸는 두 사람의 특별한 우정
제13회 김유정소설문학상과 제2회 『세계의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경의 장편소설 『이렇게 바삭한 카사바칩』이 문학동네 플레이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이경은 그간에 한국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외국인들의 모습을 그려 “이방인의 정서와 물음을 체득”(문학평론가 권희철)했다는 평을 얻은 첫 소설집 『표범기사』(민음사, 2011), 재난과 질병으로 덮인 도시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공포와 생존 욕망을 펼쳐 보인 첫 장편소설 『소원을 말해줘』(다산책방, 2019), 청년 홈리스와 배달 플랫폼 노동자, 미혼모 등 사회에서 소외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낸 두번째 소설집 『비둘기에게 미소를』(문학동네, 2021)을 펴내며 꾸준히 자기 세계를 넓혀왔다.
그런 작가가 『소원을 말해줘』 이후 3년 만에 펴내는 반가운 신작 장편소설 『이렇게 바삭한 카사바칩』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아버지를 찾아 헤매는 이십대 여성 ‘에스’, 그리고 한국을 떠나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사이족 예술단원 ‘레무’ 두 사람의 특별한 우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개성 넘치는 소재를 택하는 안목, 속도감 있는 단문, 뛰어난 스토리텔링이 돋보이는 작가의 역량이 십분 발휘된 『이렇게 바삭한 카사바칩』은 성별도 국적도 성격도 다른 두 사람이 서로의 삶에 들어오게 되면서 빚어내는 활력을 통해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선사한다.
레트로한 감성의 ‘힙지로’, 주술적인 매력의 ‘아프리카박물관’
그 모두에 스며든 자본주의라는 어둠,
그곳을 가로지르는 두 사람의 강렬한 버디무비
소설은 에스의 집으로 발신자 미상의 편지 봉투가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봉투 안에는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전인 1990년대 초 유행한 의류 브랜드의 홍보 카피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가 쓰인 광고 전단지가 들어 있다. 난데없이 수수께끼 같은 전단을 받아든 에스는 엄마를 통해 그것이 아빠가 보낸 메시지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에스의 아빠는 을지로의 인쇄 골목에서 수십 년간 인쇄소를 운영해온 인쇄공으로,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인쇄 산업이 쇠퇴하자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 그후 빚쟁이들을 피해 종적을 감췄고, 그런 아빠를 에스가 찾아 헤맨 지 사 년째였다. 처음 전단이 도착한 이후 에스의 집으로 ‘여러분, 부자 되세요’ ‘사랑해요, 엘지’ 등의 카피가 적힌 광고 전단이 연이어 날아든다. 그것을 보낸 사람이 아빠가 맞는다면, 갑자기 왜, 어떤 의미로 그런 ‘레트로 전단’을 보낸 것일까?
한편, 에스는 우연히 홍대의 한 클럽에서 흑인 남성 레무를 만나 그와 가까워진다. 그는 한국에 파견 온 마사이족 예술단원으로 경기도 양주의 아프리카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다. 에스는 그가 박물관의 관장에게서 여권을 돌려받지 못한 채 삼 년째 근로 기간이 연장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계약직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온 에스는 레무의 처지에 공감하며 그를 돕기로 결심한다. 에스와 레무 두 사람이 함께 을지로의 인쇄 골목을 누비며 에스의 아빠의 실종을 추리하는 여정, 레무가 박물관장의 착취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펼치는 분투는 그 자체로 흥미진진한 한 편의 버디무비이다.
또하나의 이채로운 점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요 공간 배경들이다. 에스가 근무하는 홍제동의 피자 가게, 그 인근에 위치한 엄마의 옷가게, 박물관에서 도망쳐나온 레무가 임시로 머무는 방 탈출 게임방 등은 일터이자 생활공간인 우리네 평범한 동네의 한 귀퉁이를 생생하게 떠올리게 한다. 특히 을지로의 쇠락한 인쇄 골목의 풍경은 힙스터의 성지라 불리는 이른바 ‘힙지로’와 대비되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무너진 자본주의사회의 한 단면을 상기시키며 비애감을 자아낸다. 주술성과 원시성으로 넘실거리는 아프리카 원주민의 문화예술 작품들이 보존된, 자본주의사회와 가장 먼 것처럼 보이는 시 외곽의 아프리카박물관조차 불공정한 불법 고용 계약이 성행하는 공간이라는 점 또한 의미심장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렇게 바삭한 카사바칩』은 날카롭고도 서늘한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네가 궁금해지면 카사바칩을 먹고 있다고 생각할게”
이 세계에서 탈출하고 싶을 때 떠올리게 될
단 하나의 사람, 단 하나의 이야기
『이렇게 바삭한 카사바칩』의 미덕은 그러한 주제의식을 경쾌한 울림을 주는 특유의 제목처럼 가볍고도 청량하게 전함으로써 도리어 독자에게 긴 여운을 남긴다는 점이다. ‘카사바’란 아프리카 등지에서 주식으로 먹는 “고구마 비슷한 작물”(38쪽)이다. 레무는 흑단나무로 깎은 목각 인형을 보물처럼 가지고 다니는데, 실제 카사바를 조각해 만든 것이 아님에도 그것을 ‘카사바 인형’이라 부른다. “먼 여행을 떠날 때” “카사바 인형을 두고”(39~40쪽) 오면 그것이 자신을 대신하여 남겨진 사람들을 지켜준다는 마사이족의 주술을 믿기 때문이다.
에스와 레무는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카사바 인형이 되어주었다는 것, 서로가 서로를 구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험난한 여정 끝에 편의점에 마주앉은 두 사람은 “캔맥주”와 함께 “카사바칩”(224쪽)을 먹는다. “파삭파삭 파사삭 파삭”(211쪽) 하고 부서지는 카사바칩은, 에스와 레무 두 사람이 서로의 안녕을 비는 둘만의 애틋한 기도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바삭한 카사바칩』은 우리네 가족, 친구, 연인, 나아가 낯선 이방인의 안녕을 기원하게 하는 귀한 이야기이다.
“너도 떠나고 싶으면 이걸 두고 떠나. 카사바 인형이 있는 곳에서 만나면 되니까.”
“신박한 해결책이네. 좋아. 좌표 같은 거라고 해두자.”
서로의 좌표를 안다는 것은, 뭐랄까, 우주를 향해 열려 있는 내 방의 와이파이 신호 같다고 할까. 부질없게 들리지만 아예 가망 없는 것도 아니다. 살다보면 만나고 싶을 때도 있을 테고, 그때 기적처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누가 알겠나. 서로의 세계로 탈출하고 싶을 때 우연히 여행 경로가 겹칠지. _212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