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권정생문학상 수상작
오실랑가 오실랑가
우리 손님 오실랑가
기별 없이도 오는 손님
오늘은 오실랑가
아무도 수고했다고 말하지 않는,
이름 없는 할머니의 마지막 노래
“할머니의 삶은 그 자체가 아프고 어두운 우리의 근현대사이자, 맨얼굴이었습니다. 할머니 이야기를 들은 후, 단단하게 뭉쳐진 뭔가가 제 마음속에 얹혔습니다. 달이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썼습니다.” _임정자
동백나무 우거진 섬마을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할머니는, 오늘도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며 흥얼흥얼 노래를 부른다. 일제강점기, 해방, 이념 갈등, 산업화 등 혼란스러운 근현대사를 헤쳐 나가며 할머니는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겪고 가족을 하나둘 떠나보냈다. 홀로 섬마을에 남은 할머니는 마을의 수호신인 당할머니 나무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동안 많은 소원을 들어주느라 힘들었을 당할머니를 위해 소원을 빈다. “당할머니, 부디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시오이.”
제8회 권정생문학상을 수상한 『할머니의 마지막 손님』이 10여 년 만에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내 동생 싸게 팔아요』 『무지무지 힘이 세고, 대단히 똑똑하고, 아주아주 용감한 당글공주』 『하루와 미요』 『어두운 계단에서 도깨비가』 『물이, 길 떠나는 아이』 『흰산 도로랑』 등 굵직한 작품으로 아동문학계에 한 획을 그은 임정자 작가가 수년간의 취재로 써 내려간 작품이다. 장마다 반복되는 할머니의 노래는 『할머니의 마지막 손님』을 하나의 리듬으로 읽도록 만든다. 독자들은 할머니의 가만한 흥얼거림 속에서 작가가 채록한 실제 할머니들의 모진 세월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새롭게 그림을 그린 이인아 화가는 노래와 함께 흘러가는 할머니의 삶을 하나의 거대한 물길로 포착해 작품에 깊은 의미와 생동감을 더했다.
“집에서 기르는 개에게도 이름을 줬으면서
우째 사람인 나에게는 이름을 안 줬어라?”
할머니는 이름이 없다. ‘가이나’, 여자아이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다. 이름이 없다고 사는 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는 모두가 할머니를 ‘가이나’라고 불렀다. 결혼하고 나니 시아버지는 ‘며늘애기’, 남편은 ‘여보’라고 불렀다. 동네 사람들은 ‘새댁’이라고 부르다가 아들을 낳으니 ‘정수 엄마’라고 불렀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지금은 ‘할머니’가 되었다. 오롯한 이름이 없어서였을까. 할머니는 평생을 자기 자신보다는 가족을 위해 살아야 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할머니의 남편도, 시댁 식구들도 영문을 모른 채 끌려간다. 할머니 곁에 남은 건 벌벌 떠는 아이 넷과 넋을 잃은 손위 동서뿐. 할머니는 이들을 이끌고 천신만고 끝에 아는 이 하나 없는 섬으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갖은 고생을 견디며 서서히 정착한다. 젖은 낙엽처럼 들러붙은 가난, 이어지는 가족의 죽음에도 할머니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하루하루를 살아 낸다. 지금의 어린이들에게는 어쩌면 옛이야기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할머니의 삶은 우리 이웃과 선대의 이야기로 여전히 지근거리에서 숨 쉬고 있다.
“가이나야, 너는 내 손님이었느니라.
그것도 아주 귀한 손님.”
마지막 손님이 오시기 전, 할머니는 뒷산 들머리에 있는 오래된 나무인 ‘당할머니’를 찾아간다. 당할머니는 섬사람들의 수호신이자 기댈 곳 없던 할머니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남들보다 몇 배로 일하며 가족을 지켜야 했던 할머니가 마음껏 울 수 있는 곳은 오직 당할머니 앞뿐이었다. 당할머니는 예나 지금이나 할머니를 향해 굵직하고 긴 두 팔을 펼쳐 든다. 그리고 말한다. “가이나야. 고생 많았다. 사느라 용썼다.” 당할머니가 할머니에게 건넨 위로의 말은, 임정자 작가가 우리 할머니들께 드리고 싶었던 말일 것이다.
“사람은 역사적 존재”라고 임정자 작가는 말한다. 삶의 고단함을 버틴 할머니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살아간다. 작가는 할머니들을 향한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담아 『할머니의 마지막 손님』을 정성 다해 썼다. 이인아 화가는 동백꽃빛 물길을 할머니의 노래와 함께 작품 전반에 흐르도록 했다. 하나의 리듬으로 흘러가는 이야기와 그림은 자연스럽게 독자들을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으로 초대한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쉽지만 진중하게 다루며, 한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아름답게 그렸다. 어느새 도착한 영원한 안식 앞에서 할머니는 평온하게 웃는다. 가장 춥고 황량할 때 피어나는 동백꽃을 닮은 웃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