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대파 한 단을 사 들고 와서 간신히 말했다
이런 꽃다발은 어떻노?”
어떻게 써도, 무엇을 써도 ‘시’가 되는 경지
쓸데없어 눈부신 우리 삶의 지문들
문학동네시인선의 244번째 시집으로 안도현 시인의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를 펴낸다. 1981년에 등단, 올해로 시력 45년에 육박하는 그의 12번째 시집이다. 시는 물론 동시, 동화, 산문, 평전에 이르는 전방위적 집필을 통해 한국 시단을 넘어, 한국문학장을 대표하는 불세출한 작가로 자리매김한 안도현. 그의 바탕이자 근간인 ‘시’를 5년 만에 한데 모은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는 긴 기다림에 보답할 만큼의 넉넉한 시편이 담겨 있어 더욱 반갑다. 오랜 타향살이를 끝낸 뒤 쓰이기 시작한 이번 신작 속엔 비로소 고향땅에서 마주한 쓸데없어 눈부신 우리 삶의 지문이, 불현듯 발견되는 생의 요체가, 무연하고도 무심하게 피어 있는 들꽃처럼 시의 길목마다 자리해 있다.
꽃밭에 들어가 돌을 골라내고 있는데 동무가 왔다
꽃밭을 높여보려고 한다니까
시인은 원래 이렇게 쓸데없는 일 하는 사람인가, 하고 물었다
꽃들의 키를 높이는 일, 그거
쓸데없는 일이지, 혼자 중얼거렸다
서리 오기 전에 배추나 서둘러 뽑으라 하였다
_「꽃밭을 한 뼘쯤 돋우는 일을」 부분
안도현의 시를 한 편이라도 읽어본 이라면, ‘평범함 속의 비범함’이라는 표현을 어렵지 않게 그의 시와 연결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시집의 제목이 된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 역시 이러한 그의 시세계를 압축해놓은 문장이자 연장선상으로 읽힌다. 평범함 속의 비범함, 비속함 속의 고귀함을 자유자재하게 부려놓는 그의 한끗은 ‘쓸데(모)없음’의 무가치함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목적성의 아름다움과 갸륵함에 가닿기에 더욱 울림이 크다. “이 세상에 시가 되지 못하는 일은 거의 없어요. (…) 무의미한 것 속에도 얼마든지 의미 있는 게 많습니다”(「인터뷰」에서)와 같은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세계에서 ‘시가 될 수 없는 것’이란 없기에, 비약하자면 볼품없이 느껴지는 우리의 삶도 시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는, 너와 내가 각기 다르게 의연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위안마저 건네는 듯하다.
쓸모없는 역이라고 했다 너는
쓸모없는 것을 기억하는 것도 쓸모없는 일이라고
기억할 줄 아는 사람만 아픈 거지
그 사람은 밤이 철길만큼 길 거야
_「고평역」 부분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의 4부 구성 속에는 고향에서 마주한 질박한 삶의 풍경, 만날 수는 없지만 그릴 수는 있는 어머니와 북, 매번 처음인 듯 인사를 건네는 계절, 시민과 시인을 넘나드는 고뇌의 순간 들이 주를 이루며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1부 ‘자꾸 물어도 좋은 질문’에는 절제된 감정으로 어머니를 떠올리는 나날과 그럼에도 꽃은 피고 눈이 내리는 자연의 안부를 담았다. “별안간의 이별과 망각의 농도를 예측하면서”(「모래무덤」) “가늘고 연약한 것들을 위해”(「순간 정지」) “백지 위에 한 줄을”(「연민」) 쓰는, 그러다 “쓸모없는 걱정을 하다가 가장 쓸모없는 일이 가장 귀한 일이라는 생각도”(「흰목물떼새」) 하는 맑은 슬픔의 순간들을 모았다. 2부 ‘꽃들의 키를 높이는 일, 그거’에서는 고향 예천에서 닭을 키우고, 풀을 뽑고, 장에 나가 열무씨를 사는 등의 생활 시편들이 이어진다. “책에 밑줄 긋는 일보다는/ 풀 뽑는 일이 천배 만배나 성스러워서/ 나는 이놈의 풀을 퍼낼 바가지가 어디 없나 두리번거리는 중”(「풀 뽑는 사람」)이라지만, 이곳에도 시는 도사리고 있기에 “시를 잘도 쓰는 후배가 벌에 쏘인 이야기를 먼저 쓰면 어떡하나 먼저 발표를 하면 어떡하나 (…) 부랴부랴 종이 위에 볼펜으로 몇 줄 적어두”(「벌에 쏘인 이야기」)는 일을 멈출 수 없다.
풀 한 움큼을 들고 서서
거름더미로 가져갈까
모아서 닭장에다 던져줄까
잠시 망설였죠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
감추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았죠
손톱이 없는 손가락으로
기타를 치고 밥을 먹었고요
_「손톱」 부분
3부 ‘겨울은 길고 가창오리떼는 단순하지 않다’에서는 이제는 갈 수 없는 곳으로의 시간 여행을 떠난다. 시인의 눈에는 사라진 것일수록 더욱 선명하기에, 꽃과 단풍과 밤눈은 그때와 한결같기에 ‘물음과 묻음’ 사이를 왕복하며 “꿈의 해변에서, 곱아서 오그라든 손을 펴서/ 눈발처럼 길게”(「죽변항」) 써내려간다. “헛되어서 실한 날”(「밤눈」) 속의 “도렷하고 실다운 그 문장”(「역무원」)이 우리 역시 그가 그리는 풍경 속으로 데려갈 것이다. 4부 ‘자작나무들은 먼 북쪽을 가리켰다’에서는 과연 백석의 재림이라 일컬을 법한 담박한 시편들과 시인-시민으로서의 그의 진면모가 아로새겨져 있다. 특히 마지막 시편인 「어떻게 세계를 구할 것인가」에서 “어떻게 세계를 구할 것인가/ 고심하는 사이/ 세계는 힘없이 허물어졌다”고, “나는 나를 최대한 줄여서 입고/ 세계에 편입되려고/ 걷고 가끔 지하철을 탔을 뿐”이라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는 짐짓 깊은 회한이 느껴지기도 한다. 시인은 “귓구멍으로 들어가기는커녕 귓가에 내려앉지도 못하는 뱁새 부리 같은 말을 지껄이느라 한평생을 보냈다”(「역무원」) 하지만, “서로 생각한다는 것 때문에 서러운 날들이 있었”(「서릿고기」)다 하지만, “당신에게 내 마음을 보이고 당신이 내게 마음을 보여주시는 동안은 참으로 행복했습니다”(「적막강산」)라고 가까스로 덧붙이고 있기에 가슴을 쓸어내리게도 한다.
나의 비천한 가계에는
사상을 구하기 위해 월북한 큰아버지도 없고
사랑을 구하기 위해 첩을 둔 할아버지도 없다
어떻게 좋은 시를 쓸 것인가
오래 궁리했으나
나쁜 시를 쓸 생각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 한 편
써보지 못했다는 거
후회는 눈보라처럼 세차다
_「어떻게 세계를 구할 것인가」 부분
“가능하면 의도를 뒤로 밀쳐두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자는 마음도 눕혀두고” 그저 “시를 붙잡고 있었던” 지난 5년, “말 하나하나의 빛깔과 물기를 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마주할 수 있게 된 것 같”(「인터뷰」에서)은 회심 속에서 마주한 삶의 지문, 시를 살고 시와 놀고 시로 보는 이가 힘을 빼서 더욱 힘있는 71편의 시. 어떻게 써도 무엇을 써도 ‘시’가 되는 경지가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에 있다. “서로 이름을 불러보기만 해도/ 혀 밑에 연애의 침이 고”(「맨발」)이듯 “좋아요? 자꾸 물어도 좋은 질문이 세상에는 많”(「맨발」)고, 여전히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지천이기에 그는 시를 쓰고 우리는 그의 시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