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거대한 힘,
‘속도’의 구조를 해부한 전방위 문명 비평
기술과 사물의 세계를 독창적으로 해석해온 미학자 이영준 교수의 신작 『속도비평』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현대 문명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인 ‘속도’를 정면으로 탐구한 비평서로, 단순한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속도가 아닌 인간, 기계, 도시, 제도, 노동, 자연이 서로 얽혀 만들어내는 거대한 사회적 구조 전체를 아울러 탐구했다.
이영준은 증기기관을 이용한 기관차와 자동차 등 초기 이동수단부터 KTX와 항공기, 초음속 제트기와 최첨단 로켓까지 수많은 속도기계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몸속 혈류의 속도와 강과 바다의 속도 등 자연의 속도를 경유해 도로망과 물류 시스템, 배달앱과 플랫폼까지 우리 삶의 거의 모든 부분에 깊숙이 침투한 속도에 대해 다각도로 분석한다. 또한 근대 이전의 인류가 속도를 어떻게 인식하고 생각했는지에 대해 서예와 그림, 무예 등을 통해 풀어내기도 한다.
인류가 만들어낸 수많은 기술과 시스템을 가로지르며 추적한 속도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속도가 수많은 요소가 연결되어 작동하는 하나의 거대한 체인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려 하지만, 공항까지 가는 도로는 막혀 있다. 게다가 탑승을 위한 수속 절차에도 긴 시간이 걸린다. 조종사는 승객이 다 탑승하기를 기다리고, 주기장에서 기체 점검을 마치고, 출발해도 좋다는 신호를 받아야 마침내 이륙할 수 있다. 다양한 병목 현상이 겹치면 경우에 따라 승용차를 타고 가는 것이 오히려 빠를 수도 있는 셈이다. 이처럼 비행기에 달린 제트엔진의 속도만 중요한 것이 아니듯이, 오늘날 속도는 네트워크 전체가 만들어내는 집단적 산물이라고 봐야 한다.
짜장면이 불기 전에 도착해야 하는 세계, 클릭 한 번으로 다음날 새벽이면 집 앞에 물건이 도착하는 세계, 상대방의 답장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초조하고 불안해지는 세계. 우리는 지금껏 경험해본 적 없는 속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 속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되는지, 또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속도비평』은 바로 그 질문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왜 이토록 빨라졌는가
『속도비평』은 속도를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현상으로 바라본다. 카메라, 철도, 자동차, 항공기, 스마트폰 등 근대 이후 등장한 기술들이 ‘점’에서 ‘선’으로, 다시 ‘공간’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추적하며 속도가 어떻게 우리 삶 전체를 뒤덮게 되었는지를 분석한다. 속도는 더이상 특정 교통수단이나 기계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출퇴근 시간, 배송 시간, 생산 시간, 응답 시간, 심지어 인간의 집중력과 감정까지도 ‘속도의 체인’ 안에 편입된다. 현대인은 속도를 이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속도라는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이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출발해 불과 수십 년 만에 세계 최고 수준의 교통·통신 인프라를 갖춘 초고속 사회로 변모한 한국 사회는 압축성장과 개발주의가 만들어낸 특유의 속도 문화를 가지고 있다. 군인 출신 박정희의 경부고속도로 건설, ‘불도저’로 불린 김현옥 서울시장의 청계고가도로, 여전히 건설과 조선업계에 남아 있는 ‘돌관공사’, 21세기에도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밀어붙이기식 업무 방식은 우리가 속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이영준은 속도를 둘러싼 다양한 장면들을 예리하게 포착해 더 풍부한 사유를 펼쳐나간다. 미국의 사진가 윈스턴 링크가 증기기관차의 찬란한 마지막 순간을 담은 한 장의 사진, 롤랑 바르트의 「제트 인간」에 대한 비판적 독해, 발터 벤야민의 ‘역사의 천사’에 대한 재해석 등은 단순한 기술사의 해설을 벗어나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까지 넓혀준다. 속도는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역설적으로 속도를 제한하고 통제하려는 시도 또한 다룬다. 과속방지턱, 보행자 중심 도시계획, 교통 정온화 정책 등은 더 빠른 사회를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속도를 억제해야 하는 현대 문명의 모순을 드러낸다. 속도로 인한 눈부신 발전 이면에는 플랫폼 노동과 물류 산업, 지역 간 격차와 글로벌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짚어낸다.
속도의 승리인가, 속도의 역습인가
이영준은 전작 『기계비평』에서 자동차, 카메라, 컴퓨터, 비행기 같은 기술적 사물들을 단순한 도구로서가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구성하는 문화적 맥락으로서 읽어낸 바 있다. 『속도비평』에서는 그 문제의식을 한층 확장하여 기계 자체의 분석에서 더 나아가 자연과 인간, 그리고 기계가 서로 연결되어 만들어내는 속도의 체계 전체를 탐구한다.
속도를 다룬 기존의 담론들은 대개 가속화된 자본주의의 병리나 인간 소외의 문제를 비판하는 데 집중했다. 폴 비릴리오는 속도를 전쟁과 권력의 문제로 읽었고, 하르트무트 로자는 사회적 가속화가 인간의 삶을 잠식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영준은 속도를 추상적 개념이나 철학적 은유로 다루는 데 머물지 않는다. 철도와 공항, 선착장, 물류 시스템과 플랫폼, 스마트폰 같은 구체적 장소와 기계와 기술의 작동 원리를 추적하면서 속도가 실제로 어떻게 생산되고 유지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더 빠른 이동수단을 만들고, 더 빠른 통신망을 구축하며, 더 빠른 서비스를 요구해왔다. 그러나 이영준은 바로 그 성공이 새로운 문제를 낳고 있다고 지적한다. 모든 공간이 속도의 체인으로 가득찰 때, 속도는 오히려 스스로의 장애물이 된다. 교통 체증, 물류 병목, 플랫폼 노동의 과부하, 끊임없는 시간 압박은 속도가 만들어낸 새로운 역설이다.
특히 책 후반부에서 다루는 물류 노동과 속도의 불평등에 대한 분석은 인상적이다. 누구나 빠른 서비스를 원하지만, 그 속도를 떠받치는 노동은 잘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는 초고속 인터넷과 KTX의 세계에 살고, 누군가는 여전히 지체된 시스템 속에 머문다. 속도는 더이상 중립적인 기술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권력과 불평등을 드러내는 척도이기도 하다.
『속도비평』은 단순히 ‘느리게 살자’고 말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속도를 둘러싼 낭만적 환상과 단순한 비관론을 동시에 넘어선다. 이 책은 현대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거대한 힘인 속도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문명의 구조를 새롭게 이해하도록 이끈다.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필요한 가장 입체적이고도 도발적인 문명 비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