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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다음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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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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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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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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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00원
출간 정보
  • 2025.05.29 전자책 출간
  • 2025.05.06 종이책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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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 EPUB
  • 약 19.7만 자
  • 21.8MB
지원 환경
  • PC뷰어
  • PAPER
ISBN
9791172132729
ECN
-
죽은 다음

작품 정보

■ 책 소개

‘일하다 다치고 병든 이들의 삶과 노동’을 이야기해온 기록노동자 희정이 이번엔 죽음과 애도를 둘러싼 노동의 세계에 노동자로, 기록자로 선다. 직업병과 산업재해로 사라져간 사람들과 매해 치솟는 자살률, 거듭되는 참사 소식, 혼자 죽을 가능성을 걱정하게 된 비혼·비출산 가구의 증가로 우리 사회 ‘죽음’ 문제에 주목하게 된 저자는 타인의 죽음을 ‘관음’하는 마음을 경계하며 장례 노동자가 되기로 한다. 장례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해 염습실에서 직접 고인을 마주하고, 의전관리사, 시신 복원사, 화장기사, 수의 제작자, 묘지 관리자, 상여꾼, 반려동물 장례지도사 등 각 분야 장례업 노동자들을 인터뷰하여 점차 산업화되어가는 장례 문화와 다변화된 가족 구성을 포괄하지 못하는 장례 제도를 경유해 이 시대의 죽음과 애도 문제를 탐구한다.
나아가 한국과 사뭇 다른 타국의 장례 문화와 ‘생전장례식’ ‘공영장례’ ‘여성 노동자가 이끄는 장례’ 등 국내에서 시도된 색다른 장례도 살펴본다. 우리 사회가 죽음과 애도를 대해온 방식을 탐구하는 것은 물론, 사회가 장례 노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장례업 노동자 개인에게 삶과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지, 생의 마지막 의례에서 고인이 소외되지 않을 방법이 있을지 등의 이야기를 장례 노동자와 예비 사별자, 예비 고인의 시점을 오가며 풀어낸다.


■ 추천의 말

타인의 죽음과 장례를 숱하게 보거나 간여하다가 정작 자신의 죽음 이후는 자신만 전혀 모르고 가는 것이, 사람과 뭍 생명의 결국이다. 죽음은 그 자체로 당사자에게 종결이다. 생애의 모든 긍과 부, 기쁨과 고통과 걱정은 죽음을 통해 완벽하게 끝나고, 나머지는 산 자들의 몫이다. 죽음과 장례를 관음하고 있는 자신을 알아챈 저자는 차라리 그 안으로 들어가 기록하기로 작정하고, 장례 노동자가 되어 목도하고 경청하고 만지며, 시선과 인식을 벼려가며 끈질기게 죽음 이후를 탐구했다.
저자는 많은 장례 산업 노동자들의 목소리와 노동을 통해 점차 산업화되어 가는 장례 문화 속 ‘빈부’ ‘성평등 ‘가부장적 혈연 중심’의 의제를 추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운동 현장에서 치러진 사회장과 마을 사람들이나 친지들이 주관한 공동체장례, 생전장례식 등 “다른 장례들”을 찾아간다. 나아가 퀴어, 이주노동자, 산업재해, 사회적 참사, 팬데믹으로 인한 사망, 거리와 시설 속 죽음, 자살, 고독사, 공영장례, 반려동물 장례 등 다양한 현장과 의제를 쫓아가면서, 소외되고 배제된 죽음들 혹은 소외와 배제를 디딤돌 삼아 전통과 고정관념에 적극적으로 균열과 변혁을 만들고 있는 대안적 장례들을 섭렵하고 있다. 더불어 시신을 ‘바다로, 들로, 바람 속으로’ 보내는 장례 등 타국의 의미 깊은 장례들도 소개한다.
죽음과 장례에 관한 혁신적이고 탁월한 시선이 벼려낸 사유와 기록은 죽음과 애도라는 흔한 현장 속까지 ‘사회적 성원권’이라는 의제를 붙들고 들어와, 궁극적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삶과 돌봄과 사회가 어떤 것인지에 관한 독자들의 질문을 확장하게 한다. 죽은 자와는 이미 무관해져버린 ‘죽은 다음’에 관한 희정 작가의 치밀하고 냉철한 기록이 산 자들 사이에서 거듭 읽히고 토론되며 참고가 이어지기를 뜨겁게 권하는 이유다.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



죽음에 관한 말들이 범람하는 시대다. 하나하나의 죽음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점점 희미해지는 시대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희정은 장례지도사, 의전 관리사, 수의 제작자 등 죽음 곁에서 일하는 이들을 취재하고, 이 시대에 죽음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 그들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죽음까지 제대로 들여다보아야 삶이 지워지지 않는다는 역설에 도달한다. 죽음의 불평등으로부터 삶의 불평등을 샅샅이 살피는 작업은 삶과 죽음이 모두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게 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입말이 책을 덮을 때쯤에는 “산 사람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묵직한 질문으로 변모한다.
이 책을 읽고 삶뿐 아니라 죽음에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관계하는지 알게 되었다. 희정은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죽음의 지형도를 ‘장례’라는 스펙트럼으로 들여다본다. 예식이 시장 논리에 맞추어 상품으로 취급되고 서로 돕는다는 의미인 ‘상조(相助)’가 상조업이 되는 시대, 그는 생애주기의 많은 순간에 편리의 외피를 쓴 외주(外注)를 경험할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에게 장례식장은 감정 노동과 돌봄 노동이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곳이자 혈연과 정상가족, 가부장제 프레임에 포함되지 못하는 삶과 죽음을 헤아리는 곳이기도 하다. 죽음이 끝이 아니고 끝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죽은 사람의 장례를 산 사람이 치르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을 각성하게 한다.
사회적 죽음이 금세 잊혀도, 애도의 매뉴얼이 새로이 등장해도, 장법(葬法)이 바뀌고 절차가 간소화되고 장례의 성격이 변화해도 ‘죽음’ 자체의 아득함은 여전하다. 체계적인 산업과 양질의 서비스가 품지 못하는 어떤 것이 있으니 말이다. 책 속의 귀한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죽음을 둘러싼 일은 마음을 쓰는 일, 마음이 없으면 하지 못하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수의를 짓고 염을 하고 상여를 메고 노래를 부르고 묘를 쓰고 화장을 하고 칠성판에 몸을 뉘어 고인의 기분을 헤아리는 일은 모두 애도를 전하는 일이다. 삶과 죽음을 높이어 귀하게 여기는 일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사람이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을 가리킨다. 생로병사의 ‘생로병’이 삶 쪽에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얼마나 신산한지 짐작게 해준다. 죽음을 통해 무수한 삶을 조명하는 이 책은 누가 있었는지와 누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길어 올린다. 죽음을 잘 치러내면서 역설적으로 잘 살고 싶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죽음을 얘기할 때조차 희정의 글은 삶 쪽에, 사람 곁에 있으니 말이다. 그에게는 사람이 현장이다. 없음에서 있었음을 떠올리는 일, 희정은 지금껏 누구보다 성실하게 이 작업을 해왔다. 삶을 소외시키지 않는 ‘있음’으로, 죽음에서 소외당하지 않는 ‘있었음’으로.
오은, 시인



■ 책 속에서

내가 알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죽고 싶지 않다는 사람도, 죽고 싶다는 사람도, 다가오는 그 시간 앞에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이 떠난 후 남겨질 사람, 자신이 떠나도 소식조차 모를 사람, 내 죽음이 폐를 끼칠 사람, 내 장례를 치러줄 사람, 내 장례식에 올 사람… 인생의 마지막에 떠올리는 건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사람은 말기 암을 선고받고도 다음 날 출근을 하고, 메일을 열어 거래처와 일정 조율을 하고, 장을 보고 밥을 하고, 주말에는 요양원을 찾아간다. 혼자 살아가는 사람은 없으니까. 유언이라는 걸 남기고 마지막 인사를 준비한다. 내가 죽음에 관해 아는 유일한 한 가지는, 혼자 죽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처음 입관을 지켜본 이는 여든이 훌쩍 넘은 남자 노인이었다. 그때 나는 장례지도사 실습생 신분(염습과 입관 참관이 허락된다)이었다. 안치대에 누운 그를 보며 안타까울 정도로 마른 몸이라 생각했는데, 그 뒤로 보게 되는 노인 대부분이 그랬다. 살아내는 데 연료로 써버린 듯 근육과 살이 말라붙어 있었다. 배가 없어 가슴뼈 아래가 가파르게 기울어진 데다가, 팔이건 무릎이건 한 군데 이상 굽어 있었다. 나는 사람이 시체로 나타났다는 사실보다 늙은 몸으로 등장한 데 더 놀랐다. 나이 듦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벗은 몸. 나는 나이 듦도 모른 채 죽음에 대해 알고자 했던 것이다. 고인의 몸에서 욕창 밴드를 떼어내며 죽는 일보다 늙는 일에 대해 먼저 배웠다.

시신은 당연하게도 부패가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다. 이럴 때 시신을 물로 씻으려고 하면 피부가 다 쓸려나간다. 탈지면으로 온몸을 감싸고 기다려야 한다. 대규모 작업이라 장례지도사 서너 명이 동원됐다. 문제는 얼굴. 다른 곳은 한지로 감쌀 수라도 있지, 얼굴은 입관 때 가족에게 보여야 했다. 사라진 눈을 만들고, 부서진 코를 세우고, 눈썹마저 한 올 한 올 새로 그렸다. 피부색을 돌리는 일은 시신 메이크업을 담당하고 있는, 그의 아내이자 동료인 고정순이 담당했다.

장례업에 젊은 여성들의 유입이 크게 늘었다. 상조회사가 많아지면서 장례업 분위기가 달라진 까닭도 있지만, 장례의 성격이 가문의 의례에서 가족 행사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 주요한 이유일 테다. 사람들은 장법을 잘 아는 호상을 필요로 하기보다 가족 행사를 매끄럽게 진행해줄 ‘플래너’를 원했다(실제로 ‘웨딩 플래너’처럼 ‘엔딩 플래너’라는 명칭을 홍보에 사용하는 상조회사도 있다).

가까운 이의 임종 직후, 당신은 장례식장이나 상조 서비스를 가입해둔 상조회사의 팀장에게 연락하게 될 것이다. 다들 그러니까. 팀장인 장례지도사는 임종한 장소의 주소를 묻고 운구할 차를 보내겠다고 한 뒤, 당신에게 과제를 내줄 것이다. 사망진단서를 발급받으라고.
사망진단서 없이는 장례를 시작할 수 없다. 예전에는 사망의 증거로 코에 솜을 올려 숨이 멈췄음을 확인하고, 고인이 생전 입던 옷을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 그의 이름을 세 번 불러도 혼이 돌아오지 않으면 운명했다고 봤지만 지금은 가당치 않다. 생과 사를 결정하는 주도권이 의료진에게 있다. 의사에게서 사망진단을 받아야 한다. 고인이 병원에서 돌아가셨다면 병원 원무과로 가자. 담당의가 발급한 사망진단서를 원무과 직원이 교부해줄 것이다. 경황이 없어도 이것은 기억하자. 여러 장을 발급받아야 한다. 장례식장 빈소를 잡을 때도, 화장할 때도, 심지어 가족과 친척이 회사로부터 장례 휴가를 받으려고 해도 증명 서류가 필요하다.

당신은 장례지도사나 상담실장을 앞에 두고 조문객의 수를 예측해 빈소를 정한다. 장례 음식의 종류와 수량을 맞추고, 의전관리사의 수, 제단 꽃장식의 가격, 수의의 종류를 정하고, 상복은 몇 벌을 대여할 것이며, 관과 봉안함(유골함)은 무엇을 쓸 것이며, 입관 시 관에 생화를 넣을지 종이꽃만 넣을지도 선택해야 한다. 아직 반도 정하지 않았다. 고인을 운구하는 차량을 리무진으로 할 것인지, 버스로 할 것인지까지 가야 어느 정도 끝이 보인다. 상조 회사의 경우, 선택의 편의를 위해 패키지도 제시한다. 280만 원 구성, 360만 원 구성, 430만 원 구성….

코로나19 대유행이 지나고도 이때의 기억은 사람들에게 각인됐다. 작은 빈소, 적은 문상객, 간소한 절차는 더는 불효로 상징되거나 초라하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가능한 것으로 학습됐다. 모두 작은 장례에 익숙해졌다. 장례식장 직원들 사이에선 걱정하는 소리가 나왔다. 발 빠른 장례식장은 가족장에 맞는 작은 빈소를 새로 마련했다. 상조회사 역시 무빈소나 가족장 상품을 만들어 내놓고 있다. 그렇다 해도 빈소가 작다는 건 조문객이 적다는 것이고, 이에 대해 업계 내부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장례식장의 주 수익원이 음식 장사이기 때문이다.

고객과 눈을 맞출 때는 활짝 웃어서는 안 된다. 무표정도 안 된다. 여기는 슬픈 곳이니 슬픈 표정은 더욱 안 된다. 장례식장과 서비스직, 그 경계에 표정과 몸짓과 눈빛을 놓아야 한다. 어렵다.
뛰면 안 되지만 느리게 걸어서도 안 된다. 구부정하게 어깨를 말고 있어도 안 되고 어깨를 편다고 뒷짐을 져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손을 앞으로 모으고 있어서도 안 된다. “손을 앞으로 모으면 사람이 부를 때 굼떠져. 바로 움직이지 못해.” 그렇다면 손을 어쩌란 말인가. ‘언니들’ 손을 지켜본다. 한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닦고 옮기고 나르고 정리한다. 그러다가 저쪽에서 기웃, 찾는 기색만 보여도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라며 상체를 앞으로 민다.

화장장이 제대로 운영되려면 뒤편에서 도구와 시설을 점검하고 관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같이 울어주고 손을 맞잡아주는 것만큼이나 필요한 일이다. 장례 절차가 삐걱거릴수록 사별자들은 더 많은 눈물을 쏟는다.

묘지는 인구가 밀집한 도시와 갈등을 빚는 골칫거리가 되었다. 한국에서 죽은 자의 땅 묘지와 산 자의 땅 도시의 긴장 관계는 산 자의 승리로 귀결된다. 강남 개발이 한창이던 1970년 서울시는 서울의 시립묘지를 폐쇄하고, 한강 이남의 8개 공동묘지의 분묘들을 이장하기 시작한다. 묘지가 있던 자리엔 아파트가 들어섰다. 길은 고속도로가 되고, 산은 터널이 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묘가 이장되거나 무연고 묘로 분리되어 사라졌다. 이로 인해 이장이 급증해 풍수지리 전문가들도 성황을 누렸다고 한다. 하지만 영광은 잠시였다. 사람들은 풍수지리적 입지가 아닌 교통과 일자리를 찾아 모여들었다. 묘지는 사라지고, 사람들은 이제 봉안당 명당 자리를 노린다.

“솔직히 관이 무겁지도 않아요. 그거 이고 산에 오르는 것도 아니고요.”
매장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관을 드는 거리는 입관실에서 장례식장 앞에 세워진 운구 버스까지이다. 그 짧은 거리마저 남성만이 관에 손을 댄다. 생각해보면, 정수기 물통을 남자가 드는 세상에선 관도 남자가 든다. ‘회사에서 정수기 물통을 갈 때 왜 꼭 남자가 들어야 하느냐’는 ‘역차별’ 논란이 생기는 세상에선 특정 성별이 관을 드는 일에도 불협이 생겨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본인 무덤 위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화강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무덤은 단단한 벽과 바닥이 되어주었고, 유골함이 자리했던 광중은 아궁이 역할을 했다. 비석이 지천에 널려 있어 자재 걱정이 없었다. 다만 죄책감과 두려움이 따라올 뿐이었다. 비석의 이름을 페인트로 덧칠해 그 흔적을 지워보았지만, 그 이후 수십 년간 아미동에는 기모노를 입은 일본 귀신과 도깨비불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 죽은 이의 자리에 산 사람의 자리를 만든, 불편하고도 체념적인 공존이 귀신 이야기가 되어 돌아왔다. 대를 잇는 빈곤이야말로 사건·사고를 불러오기 좋은 조건이었는데도, 어떤 집에 우환이 닥치면 마을 사람들은 그 자리가 어느 무덤 자리였는지를 떠올렸다. 1990년대, 아미동 주민들은 남은 묘석들을 모아 5층 석탑을 세우고 천도재를 지낸다. 이후로 사고가 줄었다고 했다. 실제 줄어든 것은 마을 사람들의 불편한 마음일 거라 짐작해본다.

임신부들은 차가운 수술대에 누워, 노인들은 요양 시설 병실에 누워 자신의 것이 아니면서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몸에 절망한다. 장례에는 ‘엔딩 플래너’가 등장하게 되었다. A 패키지, B 패키지, C 패키지를 내밀며 세트 상품을 고르듯 장례를 준비하라고 한다. 소비자가 된 사별자가 그 순간에 해야 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다. 울음과 회한 가득한 장례식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사별자가 해야 하는 일이 상품 선택과 문상객 맞이뿐이라는 것도 쉽게 수긍되진 않는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생산품(노동)에서만 소외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애에서 소외되고 있다. 나는 내 죽음에서 소외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죽음 역시 사회적인 것이라, 애도는 사회의 규율과 질서 안에 존재한다. 누구에게 살아갈 수 있는 자원을 배분할 것인가. 국가적으로는 공적 지원 제도가 작동하는 문제다. 누구를 죽일 것인가도 통치의 기술이고, 누구를 살릴 것인가도 권력이 행하는 일이다. 이 분류는 ‘죽음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말을 뒤집고 죽음의 위계를 만든다. 사회가 애도(의 비용)를 감수하지 않는 죽음이 생겨난다. 가난한 이의 죽음, 시설에서 사는 이의 죽음, 사회가 ‘온전하다’고 보지 않는 몸을 지닌 이들의 죽음, 그리고 연고 없는 자의 죽음. 장례와 애도 절차가 생략되어도 괜찮다고 용인하는 죽음들이다. ‘없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없는 사람은 없다.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던 사람”만 있을 뿐이다.

내 장례를 치러줄 사람이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런 순간에도 사회가 나를 잊지 않고 장례를 치러줄 거라는 믿음을 만들고 싶은 거예요. 연대감이죠. 위패 하나 드는 게 큰일은 아니지만, 사회적 메시지를 계속 내는 거죠. 당신의 장례를 함께 책임지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혼자가 아니고 당신 혼자가 아니고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인기척을 끊임없이 내는 거예요. 그 인기척이 저에겐 위패를 드는 거고요.

세상의 정답은 단순하다. 여자와 남자. 어른과 아이. 부자와 빈자. 인간과 동물. 세상이 반으로 갈려 있다. 남자는 바지를 입고, 여자는 치마를 입는다. 남자는 (제사를) 주관하고 여자는 (조문객을) 돌본다. 시험의 출제 의도는 시험장에 입성하지 못하거나 앞서 탈락한 이들에 의해 포착된다. 세상이 정답이라 인정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자신에게 닥쳐올 일을 미리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장례는 결혼이나 돌잔치처럼 피할 수 있는 의례도 아니다. 타인의 장례건 나의 장례건, 장례는 분명 인생에 들이닥친다.

동물 장례가 ‘사람의 일’로 치러지기에 슬픈 걸까. 모르겠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지 못하는 장례란 슬픈 일임이 분명하다. 그가 어떤 동물이었는지, 아니 어떤 삶이었는지 말할 수 없는 일도 분명 슬프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 어떤 삶이었는지 말하려면, 그에 앞서 삶을 살아야 한다. 비인간동물이 그들답게 살아갈 수 있을 때, 그들의 장례도 그들답지 않을까.

애도(받을 자)의 자격을 묻는 세상에서, 변희수 하사의 죽음을 애도의 위치에 놓은 것은 타인들이 보내는 안부 인사였다고 생각한다. 변희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변희수에게 보내는 안부 인사. “사회적으로 애도할 죽음인가?”라는 질문에 자격이 아닌 연대와 관계로 답하는 법을 나는 그의 죽음 이후에 배웠다. 그건 어쩌면, 백 년의 시간을 건너온 동지장이 아닐까 한다.

《돌봄 선언》의 저자 더 케어 컬렉티브는 “돌봄 문제는 가족이나 친척 같은 아주 가까운 관계의 친밀함에만 연관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분야와 전문성, 인종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회 구성원 누구라도 무차별적 돌봄의 몸짓을 실천하는” 행위가 필요하다. 나는 그의 ‘난잡한 돌봄’ 개념을 이별 의례에 가져오고 싶다. 누구라도 무차별적 애도의 몸짓을 실천하는 일이 필요하다.
쪽방촌 주민이 이주노동자의 장례를 찾듯, 무연고자의 빈소에서 마을 독서 모임 회원들이 나타나듯, 그 행위가 우리를 우리로 만나게 할 거라 믿는다. 나는 내 죽음마저 선택하고 결정하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그건 혼자 알아서, 어느 날 언제 갈지를 정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다. 나의 죽음을 준비하고 싶다는 바람이다. 살아갈수록 ‘나’라는 명칭이 1인칭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님을 알게 된다. 나는 나를 만들어온 토대와 관계 속에서 규정되고, 장례는 우리가 생전 만들어온 유대와 관계, 정치와 가치관을 드러내고 재생산하는 장이다. 그러니 나를 나로서 만들어온 것들을 살펴 이별할 준비를 하고 싶다. 그 준비를 완수하고 싶다.

살아갈수록 ‘나’라는 명칭이 1인칭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님을 알게 된다. 나는 나를 만들어온 토대와 관계 속에서 규정되고, 장례는 우리가 생전 만들어온 유대와 관계, 정치와 가치관을 드러내고 재생산하는 장이다. 그러니 나를 나로서 만들어온 것들을 살펴 이별할 준비를 하고 싶다. 그 준비를 완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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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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