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신화와 오해로 뒤범벅된 미술 세계를 팩트로 재검토하고
폭넓은 역사적 시야로 미술사의 온도를 따뜻하게 높인다”
-양정무(미술사학자, 한예종 교수, 《난처한 미술 이야기》 저자)
‘최초’, ‘원조’, ‘천재’의 신화 너머…
섬세하고 입체적인 ‘두 번째 해석’
‘고흐는 생전에 그림을 하나도 못 팔았다?’ ‘고갱에게 타히티는 원시의 파라다이스였다?’ ‘이탈리아 출신 다빈치가 프랑스 국왕의 품에 안겨 죽었다?’… 한 번쯤 들어봤고 그렇게 믿어왔던 ‘신화’들을 과감하면서도 섬세하게 재해석하는 미술교양서 《두 번째 미술사》가 출간됐다. 미술문화의 대중 확산에 활발하게 기여하며 2023년부터 2년 연속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을 받은 미술사학자 박재연 아주대 교수의 저서다. 우리가 배워온 익숙하고 단정적인 미술사를 새롭게 검토하고 새 시대의 관점에서 ‘끊임없이 다시 읽혀야 할’ 예술가와 작품의 가능성을 탐구해온 박 교수는, 세간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들이 어떤 시대적 맥락에서 태어났으며 어떤 사회문화적 상황이 이 믿음을 지탱해왔는지 35가지 질문을 통해 살펴본다.
‘거장’과 ‘천재’, ‘최초’와 ‘원조’, ‘남성’과 ‘권력자’ 중심의 서사를 깨고 예술이 언제나 ‘개인의 창작을 넘어선다’는 데서 《두 번째 미술사》는 출발한다. 루벤스의 수많은 작품들이 조수와 제자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오늘날 기준으로는 대작(代作)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당대 상황을 살펴보면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베르트 모리조는 인상주의 미학을 정립한 핵심 인물이었지만 ‘거장’ 에두아르 마네의 제수씨 또는 모델이라는 설명 아래 독립적인 화가로서의 정체성은 오랫동안 가려졌다. 지금은 유수의 영화와 광고, 앨범 커버 등에 인용되고 변주되어 모르는 사람이 없는 <비너스의 탄생>은 보티첼리의 스타일이 ‘아마추어적’이라는 이유로 400년간이나 미술사에서 밀려났다. 역사는 ‘공평’하지 않다. 어떤 이름은 어떤 이유로 지워지고 어떤 작품은 또 어떤 이유로 재발견된다. 《두 번째 미술사》는 작가와 작품을 둘러싼 신화를 해체하며 거장과 명작 뒤에 가려진 사회적 조건과 제도의 힘에 주목한다. 예술가 개인의 재능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선택과 망각의 메커니즘을 친절한 언어와 폭넓은 시선으로 따라가며, 궁극적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술 세계에 ‘미완의 이야기’들이 존재함을 말한다.
“왜 그런 이야기들이 생겨났고 지금까지 이어져왔는지 차분히 살펴보고, 우리가 왜 특정 이야기를 더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지 그 바탕에 놓인 문화적 욕망과 기억의 힘도 함께 탐구하고자 했다. 결국 이 책은 미술사 자체를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바라보려는 작은 시도이기도 하다.” _프롤로그 중에서
미술사의 모든 작품은 선택되고, 오해되었다가
마침내 되돌아온다
정설에 대한 의심과 ‘팩트체크’는 옳고 그름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기존의 미술사를 부정하려는 것도 아니다. 당연하게 믿어온 이야기를 조금 비틀어, ‘왜’ 그렇게 믿게 되었는지 당대의 맥락을 탐색하고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찾아 예술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기 위함이다. 1장에서는 ‘거장’이라는 무게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사실들, 한 명의 예술가를 역사가 거장으로 각인하기까지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내막을 드러낸다. 타히티를 예술적 낙원으로 이상화했지만 사실은 전혀 이상적이지 않았던 타히티 생활로 자살까지 시도했던 고갱, 특유의 상업성과 ‘튀는’ 행동으로 ‘아비다 달러스Avida Dollars(달러에 굶주린 자)’라는 별명이 붙었던 살바도르 달리가 개미핥기와 함께 파리 시내를 산책한 배경 등을 실었다. 2장은 루벤스, 미켈란젤로, 로댕 등 ‘브랜드화’된 예술가 뒤의 협업과 진위 여부, 시장 논리를 짚는다. 렘브란트가 직접 남긴 서명이 있어도 모두 렘브란트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 처음엔 ‘사소하고 평범했던’ <만종>이 프랑스의 ‘국민 그림’이 되기까지의 스토리가 담겨 있다. 3장은 역사가 망각했던 이들이 복원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17세기 사망 후 거의 잊힌 채 사라졌다가 20세기에 재발견되면서 ‘뜻밖의’ 이미지가 덧씌워진 드 라 투르, 추상미술의 원조라 불리는 칸딘스키보다 수년 앞서 완전한 추상 그림을 그려낸 힐마 아프 클린트를 불러낸다. 4장은 작품 대상의 선택과 연출에서 드러나는 의미를 파헤친다. 코뿔소를 본 적 없는데 생생하게 재현해낸 뒤러, 자신의 작업실을 시대 군상들의 거대한 무대로 탈바꿈시킨 쿠르베 등을 통해 예술가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독자적인 언어, 시각적 철학을 들여다본다.
5장은 다양한 목적으로 예술을 ‘도왔던’ 이들, 후원자에 대한 이야기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라는 두 거장을 함께 기용한 교황 율리우스 2세를 통해 권력과 예술이 얽히는 한 가지 모델을 본다. 또 나폴레옹에게 그림값을 원하는 만큼 받지 못하자 제국의 권위를 위한 대형 프로젝트를 끝내 완수하지 않은 다비드에게서 예술과 돈, 자존심과 이해관계가 뒤엉킨 줄다리기를 엿볼 수 있다. 6장에서는 작품의 제목이 왜 문제적인지 살펴본다. <터키탕>, <절규> 같은 제목에서 어떤 오해, 또는 상상력이 발생하는지, ‘흑인 여인’에서 ‘마들렌’으로 초상화의 이름이 바뀌기까지 어떤 곡절이 있었으며 이것이 작품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보여준다. 7장은 명작을 전시·보관하는 것을 넘어 명작을 명작으로 ‘완성’시키는 미술관의 역할을 조명한다. 모네의 거대한 <수련 연작>을 걸기 위해 전시실 자체를 대대적으로 개조한 오랑주리 미술관, 제2차 세계대전 중 <모나리자> 등 주요 작품들을 암호로 표시하고 온갖 극적인 일화를 거쳐 외딴 시골로 ‘대피’시킨 루브르 박물관의 노력은 우리가 지금 특정한 작품을 ‘역사적’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데에 권위를 부여한 이들의 역할을 보여준다.
“카라바조가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그의 천재성만은 아니었다. (…) 이 점이야말로 예술이 언제나 순수한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았음을, 때로는 전략적으로 정치적으로 소비되어왔음을 알려주는 한 단면일지도 모른다.”
역사를 경유해 현재를 겨냥하는 미술 이야기
두 번째, 세 번째… ‘버전’을 높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다시 쓰이다
과거를 되짚는 《두 번째 미술사》의 시선은 역사를 경유해 현재를 겨냥한다. 글로벌 경매에서 매번 경이적인 낙찰가가 쏟아지고, 초대형 블록버스터 전시는 작품보다 ‘인증샷’과 ‘굿즈’를 소비하게 만들며, 시시각각 진화하는 AI가 생성한 이미지들이 전통 미술의 권위와 경계를 시험한다. 격동 속에서 우리는 다시금 묻게 된다. 예술의 가치는 어디서 오는가? 무엇이 작품을 ‘명작’으로 만드는가? 《두 번째 미술사》가 건네는 메시지는 이 질문에 대한 오래된 답이자 여전히 유효한 힌트다.
자신과 자신의 작업을 일종의 ‘브랜드’로 구축한 최초의 예술가 중 하나였던 루벤스의 화실은 집단 창작 모델의 출발이다. 오늘날의 스튜디오 창작 시스템, 작가 브랜드, 디지털 시대 NFT 아트(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해 디지털 예술 작품에 원본성과 소유권을 증명하는 고유한 인증서를 부여하는 예술 형태)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는 셈이다. 공간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설계되었다는 점에서 오랑주리 미술관의 〈수련 연작〉 전시는 오늘날 ‘몰입형 미술’의 선구적 사례, 즉 공간부터 관객 경험까지 ‘작품화’하는 초대형 전시 흐름의 원형이다. 진위 논란이 끊임없던 17세기 렘브란트의 회화는 21세기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통해 아예 재생산되기도 했다. 2016년 프로젝트 ‘넥스트 렘브란트(The Next Rembrandt)’는 전 세계에 흩어진 렘브란트 회화 300여 점을 AI에게 화풍·구도·명암·인물묘사까지 학습시켜 ‘렘브란트라면 그렸을 법한 새로운 작품’을 완성한 실험으로 ‘렘브란트다움’이 무엇인가를 되묻는 도발이었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함께 기용해 ‘공존’하게 한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정치적 후원의 정교함을 보여준 모델로 오늘날 국가나 기업이 예술가를 후원할 때 유효한 접근이 될 수 있다. 모리조의 사망진단서에 적힌 ‘무직’이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여전히 제도와 시장에서 ‘소수’라는 이유로 소외되는 여성 또는 비주류 작가들이 있음을 환기한다.
《두 번째 미술사》의 독자는 오늘의 풍경과 혼란을 읽는 언어를 쥐게 된다. 미술사는 과거의 박제가 아니며 모든 작품은 시대의 욕망, 시장의 논리, 제도의 압력, 후원자의 요구 속에서 선택되고 잊혔다가 다시 소환된다. 이 사실을 이해하면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모든 예술의 현상도 마찬가지임을, 예술의 가치와 권위에는 그러한 맥락이 개입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미술사는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로 ‘버전’을 높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다시 쓰이고 있다.
“특히 모리조가 즐겨 다룬 거울, 창, 레이스, 드레스, 햇살 같은 소재는 오늘날 젠더적 시선과 시각성의 문제를 탐구하는 연구자들에게도 깊은 영감을 주고 있다. (…) 한 예술가의 명성과 위치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누가 무엇을 그리고, 누가 그것을 가치 있게 여겼는지를 되묻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본문 중에서
요한나는 고흐의 작품을 유럽 각지의 전시에 출품하며 그의 신화를 의도적으로 만들어갔고, 이러한 노력은 20세기 초 모더니즘 미술의 흐름과 맞물리며 고흐를 ‘잊힌 거장’에서 ‘현대미술의 선구자’로 끌어올렸다.
고갱의 삶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다. (…) 프랑스 정부의 소액 지원과 함께 어렵게 떠났으나, 현지 생활은 곧 생계난으로 이어졌다. 결국 그는 식민 당국의 공사 현장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으며, 프랑스의 지인들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 “물감 살 돈, 빵을 살 돈이라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서명 이후 미켈란젤로는 다시는 어떤 작품에도 이름을 새기지 않았다. 조르조 바사리는 《미술가 열전》에서 미켈란젤로가 〈피에타〉의 서명에 대해 후회했고, 그 후로는 겸양을 지키기로 맹세했다고 전한다.
사망진단서에조차 그녀의 직업은 ‘무직’으로 기재되었고, 사후에도 모리조의 이름은 오랫동안 미술사 교과서에서 실종되어 있었다. 그녀의 작품은 일부 수집가들에게만 남아 있었고, 전시나 연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에두아르 마네의 제수씨’ 혹은 ‘그의 모델’이라는 설명 아래, 독립적인 화가로서의 정체성은 가려진 채 오랫동안 잊혔다.
‘최초’라는 타이틀에는 주석이 붙어야 한다. 추상회화의 계보를 칸딘스키로 시작한다면, 그 서사의 균형을 위해 힐마 아프 클린트를 함께 불러야 한다. 그녀는 자신만의 언어로 추상을 개척했지만, 유럽 미술계의 변방이었던 스웨덴에서 활동했고 스스로 작품 발표를 미뤘기 때문에 주류 미술사의 시야에서 오랫동안 벗어나 있었다.
아르테미시아는 고통스러운 성폭행 재판을 치른 직후 첫 번째 유디트 그림을 제작했다. 재판 과정에서 그녀는 신빙성을 위해 고문을 견뎌야 했고 가해자는 실형을 면했다. 이 잔혹한 기억이 그녀의 내면에 깊은 흔적을 남긴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는 그 이상의 것이다.
바사리의 기록에는 사실과 어긋나는 부분이 많다. 그는 다빈치의 나이조차 실제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 75세로 잘못 기재했고, 다빈치가 성모 마리아에 집착했으며 말년에 심하게 손을 떨었다는 근거 없는 진술도 남겼다. 바사리는 위대한 예술가의 전기를 사실 그대로 적기보다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길 좋아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전형적인 작가였다.
골리앗의 잘린 머리는 카라바조 본인의 자화상이다. “내 목숨(머리)을 당신께 바치니 구해달라”는 암시로 해석된다. 실제로 시피오네 추기경은 막강한 영향력으로 교황인 삼촌을 움직여 카라바조를 사면시키는 절차를 진행한다.
이러한 갈등은 단순한 계약상의 오해가 아니라, 예술가와 권력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보상의 기준에 관한 문제였다. 다비드는 이로 인해 나머지 두 작품, 〈파리 시청에서의 환영식〉과 〈옹립식〉을 끝내 제작하지 않았다.
브누아는 이 마들렌의 개성을 그림에 담아내고자 했지만 당시 살롱전 출품작 설명에서는 모델의 실명을 공개하지 않고 “한 흑인 여성”으로 뭉뚱그려 소개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의 관습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흑인에 대한 익명화와 타자화를 반영한 결정이기도 했다.
높이 2.75미터, 무게 3톤에 달하는 대형 대리석 조각을 옮기기 위해 조자르와 직원들은 박물관 내부 53개의 계단을 따라 별도의 경사로를 설치했고, 조각이 흔들리지 않도록 고무 패드와 삼베를 수십 겹 덧댔다. 이 긴장감 어린 작업을 지켜본 한 학예사는 “니케가 아니라 우리에게야말로 날개가 필요했다”고 회고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