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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균열내기 상세페이지

나를 균열내기

뒤라스, 카뮈, 에르노를 지나 다만 내가 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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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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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00원
출간 정보
  • 2026.07.13 전자책 출간
  • 2026.06.15 종이책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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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 EPUB
  • 약 8.1만 자
  • 23.1MB
지원 환경
  • PC뷰어
  • PAPER
ISBN
9791172134532
UCI
-
나를 균열내기

작품 정보

책 소개

★백은선 시인 강력 추천★
★작가·프랑스문학 번역가 신유진 신작★

“존재의 재발견과 존재의 새로운 발명은 어떻게 사람을 파고드는가.
그걸 세계의 비밀이라 부를 수 있다면,
신유진은 비밀에 멜로디를 붙이는 사람인 것만 같다.”
―백은선, 시인

“뒤라스의 감각과 욕망·카뮈의 부조리와 실존·
에르노의 자기 해부와 기억의 서사, 사강, 페렉, 페나크, 쿤데라…”

문학으로 흔들리고 부서지고 다시 시작하는 삶

산문 《몽 카페》, 소설 《페른베》의 작가이자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한국에서 가장 많이 번역한 프랑스 문학 번역가 신유진의 신작 《나를 균열내기》가 출간됐다. 작가는 마르그리트 뒤라스, 알베르 카뮈, 아니 에르노, 조르주 페렉 등 프랑스 작가들의 문장과 삶을 따라가며 문학을 읽는 행위가 삶을 새롭게 감각하고, 자신을 다시 구성하는 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한 사람이 끝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무엇을 부수고 다시 세울 수 있는지 함께 탐색한다.
작가는 또한 한 작가의 삶과 문학을 이루는 저변에는 저마다의 강렬한 이미지와 질문이 놓여 있음을 발견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에게는 파 수프가, 아니 에르노에게는 오디세우스의 서사가, 알베르 카뮈에게는 이방인이, 조르주 페렉에게는 장소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에게는 적어가, 카미유 로랑스에게는 거울 등이 있었다. 작가는 이 사소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단서들을 따라가며 한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삶에 부여된 조건들을 응시하고 더 깊은 진실에 다가가는지 읽어낸다.
책은 1부 ‘균열의 발견’, 2부 ‘해체와 붕괴’, 3부 ‘유예의 순간’, 4부 ‘자아의 재구성’이라는 네 개의 큰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과 생에서 길어 올린 장면들을 우리의 삶 위에 포개어놓으며 독자 스스로 자신을 이루는 것들을 인식하고 해체한 뒤 낯선 감각 속에 빠뜨려 다시 자신에게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본문 각 장의 말미에는 작가별 작품세계를 색다르게 느낄 수 있는 부록이 마련되어 있다. 뒤라스의 ‘파 수프 레시피’, 사강의 ‘고독을 입는 기술’, 페나크의 ‘몸 번역 노트’ 등 각각 다른 형식의 부록을 통해 책을 읽는 이들이 작가들의 내면 세계를 좀 더 입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프랑스어에서 알파벳 H는 ‘아쉬’라고 발음한다. 내 업이 ‘아쉬(H, 엘렌 식수가 말하는 글쓰기라는 의미에서)’라고 말하면, 프랑스인들은 내게 무엇을 찍어 부술 것인지 물을 것이다. (…) H는 소리가 없지만, 그것이 내리찍어 갈라지고 깨지는 순간에는 반드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쩍, 쨍그랑, 우지끈 같은 균열의 음. 혹은 ‘나’라는 세계의 껍질이 쪼개지는 소리, ‘나’라고 믿었던 막이 부서지는 소리. 나는 이 책에 그런 소리를 받아 적고 싶었다. 그 균열의 음이 뭐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읽고 쓰는 일만이 나의 막을 부수고 나를 건져 올리는 일이라는 것을 믿을 뿐이다.”
“삶이란 무언가를 끊임없이 채워넣고 쌓아 올리는 축적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들을 깎아내어 투명해지는 과정이다”

균열·해체와 붕괴·유예·재구성
문학은 나를 설명하는 것을 넘어 삶을 다시 쓰는 힘

1부 ‘균열의 발견’에서는 ‘고독’ ‘부조리’ ‘침묵’ ‘내면의 여백’처럼 한 사람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감각들을 살펴본다. 대표적으로 사랑과 관계의 파국을 외면하지 않고 기울어진 세계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뒤라스의 문학 속 여성상과 삶의 끝없는 고통 속에서도 태양 아래 부조리를 정면으로 마주하고자 했던 카뮈의 문학을 들여다본다. 또한 나 자신과 타자를 감쌀 만큼 온기가 가득했던 사강의 포근한 스웨터와, 낯선 곳에서 익명의 존재가 되기 위해 안개가 되기를 선택했던 그르니에의 이미지들을 따라 문학이 익숙한 삶의 표면 아래 감춰진 질문들을 어떻게 드러내는지 보여준다.
2부 ‘해체와 붕괴’에서는 아고타 크리스토프, 아니 에르노와 에두아르 루이, 다니엘 페나크, 가엘 파유를 통해 ‘언어’ ‘계급’ ‘몸’ ‘기억’의 문제를 탐구한다. 크리스토프가 이민자로서 겪은 적어와 모어 사이의 긴장, 어린 시절로부터 비롯된 세계와 현재 세계가 한 사람 안에서 충돌하는 에르노의 세월의 기록, 몸에 새겨진 시간을 촘촘히 새긴 페나크의 일기, 르완다 집단 학살을 잊지 않고자 저항하는 파유의 기억은 우리가 ‘나’라고 믿어온 정체성이 결코 단단한 하나가 아님을 드러낸다. 작가는 자아가 무너지는 순간을 실패가 아니라 자신을 다시 읽기 위한 출발점으로 바라본다.

“자신이 속했던 세계의 말투와 몸짓, 취향이 낯설어지고, 새로 배운 것들은 완전히 그의 것이 되지 않는다. 한 사람의 몸 안에서 두 개의 세계가 서로를 밀어내며 수치심과 혼란을 일으킨다. 아비투스의 충돌이다. 아니 에르노는 이 경험을 사적인 고백에 머물게 하지 않고 사회적·역사적 맥락 안에서 해석한다. 그의 ‘나’는 결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삶을 통과한 목소리이면서 동시에 같은 조건을 살아온 익명의 다수와 연결된 존재다.”

3부 ‘유예의 순간’에서는 밀란 쿤데라, 레일라 슬리마니, 장 뤽 라가르스, 카멜 다우드를 지나며 ‘창작’ ‘욕망’ ‘실패’ ‘응답’의 문제를 다룬다. 쿤데라의 소설을 쓰는 일, 슬라마니의 글을 통해 내 안의 불씨를 확인하는 일, 라가르스의 실패와 동행하는 일, 다우드의 이미 쓰인 고전의 침묵에 다시 말을 거는 일은 모두 쉽게 결론에 도착하지 않는 유예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무너진 자아가 흔들림과 질문 속에 머물며 다른 가능성을 준비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4부 ‘자아의 재구성’에서는 조르주 페렉, 엘렌 식수, 카미유 로랑스, 바바라 몰리나르를 통해 ‘나’라는 거울을 깨고 타자를 품으며 삶을 다시 쓰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이 되는 과정을 따라간다. 페렉이 응시하는 보통 이하의 사물들, 식수의 여성 명사들, 로랑스의 오토픽션 실험실, 몰리나르의 악몽과 매혹의 기록은 모두 부서진 자아를 다시 조립하는 방식이 된다. 이 마지막 여정에서 문학은 ‘나’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롭게 구성하는 힘이 된다.

“쿤데라의 무기는 ‘아이러니’이다. 구조가 세운 의미를 끊임없이 흔드는 것. 그의 마지막 작품, 《무의미의 축제》에서 작가는 무의미한 대화, 농담, 상상으로 본질적인 것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평소에 거의 인식하지 않는 신체 부위, ‘배꼽’으로 삶의 근원을 묻는다. 철학이나 신화가 아닌 배꼽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작고 우습지만,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근원이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아닌가.”

“그는 승리와 해방의 언어가 아닌, 가장 가까운 이들 앞에서도 실패하는 언어를 선택한다. 하지만 이 실패는 단순히 포기의 선언이나 무력함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어긋난 관계와 선택에 대해 최소한의 책임을 지려는 시도이며, 지나간 시간을 무효로 만들지 않으려는 몸짓에 가깝다. (…) 그의 인물들은 계속해서 실패하며 그저 끝을 유예할 뿐이다. 실패하지만 계속하는 것, 저 멀리 끝이 보이지만 가능한 한 돌아가는 것, 불이 꺼질 테지만 여기 무대에 남아 있는 것, 생을 조금 더 살아보는 것. 이것이 ‘죽음’이라는 결말을 필연적으로 안고 사는 존재들이 할 수 있는 가장 근사한 사랑이 아닐까.”

《나를 균열내기》는 작가들의 문장을 해석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 문장들이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어떻게 다시 살아 움직일 수 있는지 응시한다. 그러므로 이 책이 말하는 ‘균열’은 파괴가 아니라 가능성에 가깝다.
이 책이 끝내 도착하는 곳은 완성된 자아나 선명한 해답이 아니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내가 나라고 믿어온 것들’이 어떤 언어와 기억, 몸의 감각, 계급의 흔적, 수치심과 욕망, 실패와 침묵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들여다보게 한다. 내가 쓰는 말은 어디에서 왔는지, 나를 부끄럽게 만든 감각은 누구의 기준에서 비롯된 것인지, 오래 붙들어 온 기억과 욕망은 지금의 나를 어떻게 살게 하는지 묻는다. 그리고 그중 무엇을 덜어내고 무엇을 붙들며 무엇에 새 이름을 붙일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이때 문학을 읽는 일은 뒤라스의 파 수프 재료들처럼 단순한 이해나 위로를 넘어 자기 삶을 이루는 재료들을 다시 살피는 일이 된다. 《나를 균열내기》는 문학 읽기를 통해 불필요한 것들을 깎아내고 투명해지는 과정을 거쳐 자기 삶을 다시 선택하게 하는 여정으로 독자들을 이끌어줄 것이다.

“몰리나르가 그랬듯이 악몽에서 나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그 꿈속에서 무언가를 길어 올릴 수 있다면, 이미 나는 그 악몽에서 벗어난 것이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공포와 매혹을 온전히 수락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어쩌면 그 이야기는 나를 통과하여, 또 나와 한 몸이 되어 어떤 ‘있음’을 증명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되돌아가려는 본성과 싸워 이기는 일이 쓰는 자의 몫이니까. 어째서 이러한 수고가 필요한지를 묻는다면, 몰리나르의 말로 답을 대신하겠다. 다만, 내가 되기 위해.”

추천의 말

세계는 매끈하지 않다. 사건과 현상은 교묘히 덧대어져 있기도 하고 벌어진 채 공허하게 입 벌리고 있기도 하다. 그 틈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작가라 오래전부터 믿어왔다. 이 세계가 만들어낸 틈을 응시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언어 속에는 벌어진 상처처럼 틈새가 있다. 무엇으로도 그것을 다 매울 수는 없겠지만, 그 응시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 문학이라면, 문학 속에서 만나는 것이 미처 알지 못했던 나 자신을 다시 한번 타자로서 겪어내는 일이라면, 문학이라는 거울 속 눈 코 입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오히려 스스로를 떠나는 일이 그것이라면, 존재의 재발견과 존재의 새로운 발명은 어떻게 사람을 파고드는가. 신유진은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걸 세계의 비밀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는 비밀에 멜로디를 붙이는 사람인 것만 같다.
그렇게 문학의 길고 긴 터널을 지나 다시 나에게로 당도하는 여정. ‘자기되기’를 통해 재탄생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그가 번역을 통해, 글쓰기를 통해 걷고 있는 경로가 아닐까.
―백은선, 시인

본문 중에서

“프랑스어에서 알파벳 H는 ‘아쉬’라고 발음한다. 내 업이 ‘아쉬(H, 엘렌 식수가 말하는 글쓰기라는 의미에서)’라고 말하면, 프랑스인들은 내게 무엇을 찍어 부술 것인지 물을 것이다. (…) H는 소리가 없지만, 그것이 내리찍어 갈라지고 깨지는 순간에는 반드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쩍, 쨍그랑, 우지끈 같은 균열의 음. 혹은 ‘나’라는 세계의 껍질이 쪼개지는 소리, ‘나’라고 믿었던 막이 부서지는 소리. 나는 이 책에 그런 소리를 받아 적고 싶었다. 그 균열의 음이 뭐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읽고 쓰는 일만이 나의 막을 부수고 나를 건져 올리는 일이라는 것을 믿을 뿐이다.”

우리는 흔히 ‘고독’을 ‘외로움’이라는 감정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뒤라스의 문학에서 그것은 감정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다. 한바탕 쓸려나간 뒤 남은 상태. 텅 빈 것은 아니다. 간조의 해변을 떠올려보자. 거기에는 발자국, 해초, 깨진 조개. 수많은 잔해가 있다. 아직 무엇이 될지 모르는 것들이 거기 분명히 있다. 뒤라스의 말을 빌리면 그것들은 ‘이미 있는 것’이고, 글쓰기는 그것을 ‘해독’하는 일이다. 발현이나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이 아닌 이미 있는 것의 해독. 무엇을, 어떻게 해독할까.

뫼르소가 느꼈던 무력감은 내가 프랑스 남부에서 느꼈던 그것이었을까. 그가 장례식이 끝난 후 다시 해변의 태양 아래에 서 있었을 때, 강렬한 빛이 뫼르소의 눈을 찌르고 그의 몸이 열기로 뒤덮였을 때, 나는 방아쇠를 당긴 그를 몇 번이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누르는 그 무거운 빛을 그렇게라도 거두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나를 짓누르는 것들을 거두고 싶은 것처럼. 사실은 태양을 쏘고 싶었을 것이다. 아무 의도도, 의지도 없이 나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그 거대하고 무심한 존재를. 하지만 그의 총구는 엉뚱한 사람을 향했다. 한 아랍인이 쓰러졌다. 뫼르소의 부조리는 그렇게 완성됐다. 나의 부조리도 그렇게 선명해졌다.

당신이 진짜 좋아했던 옷이 블랙 미니 드레스가 아니라, 포근한 스웨터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 당신의 충만한 고독을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고 고백하고 싶어진다. 지성이란 타인에게 열등감을 주지 않고, 타자를 이해하고 감싸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던 당신의 말을 곱씹으면, 당신이 쓴 모든 글이 스웨터처럼 느껴진다고 전하고 싶어진다. 그러고 보면 스웨터란 얼마나 문학적인 옷인가. 나 자신과 타자를 감쌀 만큼 온기를 가진 옷. 사강의 책 몇 권을 스웨터처럼 입었던 날들을 기억한다.

아침에 눈을 떠 이 삶이 지루하고 버겁다고 느낄 때, 나는 그르니에의 비밀과 침묵을 생각한다. 내 삶을 천천히 둘러보며, 다 말해지지 않은 존재의 여백을 찾는다. 빛이 너무 강하면 사물의 윤곽이 뭉개지듯, 모든 것을 발설하고 전시하고 나면 삶의 본질이 사라진다. 어쩌면 내게 필요한 것은 지중해의 선명한 빛보다 브르타뉴의 안개 혹은 나 자신에게조차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내면의 캄캄한 방일지도 모른다. 투명하게 비워둔 마음에 안개가 차오를 때, 나는 그곳에 간직해야 할 것들을 가만히 넣어두고 싶다. 그 방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오롯이 나만의 기쁨과 슬픔이 될 수 있도록.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싸움은 고집스러웠다. 그는 한 번도 적어에 복종한 적이 없다. 모방과 흉내 내기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정복한 것도 아니다. 끝까지 프랑스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지는 못했으니까. 대신 그는 그 불완전한 언어를 감추지 않고 썼다. 그의 문장은 짧고 묘사는 부연 없이 간결하다. 복잡한 감정 표현도 생략되고 좁은 어휘로 이루어진 단순한 문장들이 이어진다. 독자는 그의 파편적인 언어에서 전쟁 중에 맨몸으로 살아남는 인물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왜곡된 기억과 쉽게 부서지는 진실 속에서 고립된다. 그의 건조한 문장과 비어 있는 행간은 그가 ‘적어’에 내어주지 않는 마지막 영토였을 것이다.

《몸의 일기》의 마지막 장에는 보잘것없어진 몸이 남아 있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몸이 아닐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으로 생을 끝마친다고 생각하면 인간은 비극적 운명을 타고난 것만 같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시간을 겪고 통과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삶이 우리에게 내준 숙제이자 선물은 이 시간을 온전히 경험해보는 일이 아닐까. 몸을 가진 존재로서, 몸으로 시간을 통과하면서. 그렇게 생각하면 서서히 저물어가는 이 몸도 아쉽지만은 않다. 이 몸으로 경험한 모든 것이 내가 살아낸 삶일 테니까.

파유는 음악이 자신을 구했고, 글쓰기가 자신을 치유했다고 고백했다. 구원은 봉인된 기억과 감정을 꺼내며 이뤄지고, 치유는 그것들을 이해하고, 형식을 만들어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때 가능해진다. 슬램과 랩에서 소설까지, 파유의 이 여정은 혼혈, 이민자, 전쟁 난민, 경계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려는 과정이기도 했다. (…) 그러나 이 과정에서 파유는 하나의 질문을 끊임없이 마주한다.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일과 타인의 고통을 대신 말하는 일, 그 둘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쿤데라의 무기는 ‘아이러니’이다. 구조가 세운 의미를 끊임없이 흔드는 것. 그의 마지막 작품, 《무의미의 축제》에서 작가는 무의미한 대화, 농담, 상상으로 본질적인 것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평소에 거의 인식하지 않는 신체 부위, ‘배꼽’으로 삶의 근원을 묻는다. 철학이나 신화가 아닌 배꼽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작고 우습지만,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근원이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아닌가.

우리가 적당히 안락한 현실 속에서 미지근한 온도로 살아가는 것이 누군가 치열하게 건네준 불씨를 꺼트리는 것이라면, 지금 이 책장을 넘기는 행위는 마땅히 그 불씨를 다시 키우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슬리마니의 불은 세계의 어둠을 가차 없이 비추고, 그 안에는 솔직한 만큼 폭력적인 진실이 있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문명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준 이중적 선물이었듯, 슬리마니의 불도 다르지 않다. 진실과 고통은 언제나 함께한다. 그러니 마지막 질문은 하나다. 당신은 이 불을 가져가겠는가.

그는 승리와 해방의 언어가 아닌, 가장 가까운 이들 앞에서도 실패하는 언어를 선택한다. 하지만 이 실패는 단순히 포기의 선언이나 무력함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어긋난 관계와 선택에 대해 최소한의 책임을 지려는 시도이며, 지나간 시간을 무효로 만들지 않으려는 몸짓에 가깝다. (…) 그의 인물들은 계속해서 실패하며 그저 끝을 유예할 뿐이다. 실패하지만 계속하는 것, 저 멀리 끝이 보이지만 가능한 한 돌아가는 것, 불이 꺼질 테지만 여기 무대에 남아 있는 것, 생을 조금 더 살아보는 것. 이것이 ‘죽음’이라는 결말을 필연적으로 안고 사는 존재들이 할 수 있는 가장 근사한 사랑이 아닐까.

숲을 헤치며, 페렉은 묻는다. 사물의 목록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존재는 그만큼 더 선명해지고 있는지 아니면 그 속에 파묻혀 지워지고 있는지. 이 욕망의 숲에서 벗어나기 위해 페렉이 제안하는 방법은 그것들을 다시 제대로 응시함으로써 감각을 되찾는 것이다. 욕망의 대상으로서 공간을 훑는 게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서 사물과 공간을 낱낱이 기록하는 행위. 여기서부터 그의 독창적인 철학인 ‘보통 이하의 것’에 대한 탐구가 시작된다.

몰리나르가 그랬듯이 악몽에서 나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그 꿈속에서 무언가를 길어 올릴 수 있다면, 이미 나는 그 악몽에서 벗어난 것이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공포와 매혹을 온전히 수락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어쩌면 그 이야기는 나를 통과하여, 또 나와 한 몸이 되어 어떤 ‘있음’을 증명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되돌아가려는 본성과 싸워 이기는 일이 쓰는 자의 몫이니까. 어째서 이러한 수고가 필요한지를 묻는다면, 몰리나르의 말로 답을 대신하겠다. 다만, 내가 되기 위해.

작가 소개

작가, 번역가.
파리 8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다. 소설 《페른베》, 산문집 《창문 너머 어렴풋이》 《상처 없는 계절》 《열다섯 번의 낮》 《열다섯 번의 밤》 등을 지었고, 아니 에르노의 《세월》 《빈 옷장》 《남자의 자리》, 에르베 기베르의 《연민의 기록》,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세상의 발견》 등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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