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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박훈 교수님의 이 책은 메이지 유신의 배경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당시의 경제적인 발전에서 소외된 계층은 도리어 16세기 이전의 지배계층이었던 사무라이 계층으로 그들은 상인 계층 중심으로 이루어진 경제적 발전에 참여할 길이 없었다 합니다. 그들의 연봉은 미곡으로 지불되었으나 미곡의 실질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면서 사무라이 계층은 가난과 궁핍에 시달리게 되었다 합니다. 특히 숫자적으로 많은 하위 계급의 사무라이 계층에서 그 상황은 심각했고, 계급이 높다 해도 자신들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상인 계층에 많은 빚을 지게 되어 실질적으로 힘의 균형에서 역전을 당하게 되었다 합니다. 에도 시대의 200년의 평화는 당시 일본에서는 낯선 것이었습니다. 사무라이 계층은 특히나 이런 평화에 적응을 하기가 힘들었다 합니다. 이러한 때에 비로소 유학이 퍼져가기 시작했는데, 왕을 중심에 놓고 사대부들이 왕에게 자유로이 의견을 개진하는 형태의 사대부 정치에 대해 사무라이 계층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중국과 조선의 체제를 비로소 이해하고 자신을 ‘사대부’와 같이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200년의 평화 기간 동안 할 일이 없어진 사무라이들이 스스로 할 일을 찾게되었다고나 할까요. 이전의 병영체제에서는 상명하복의 문화가 지배적이었다면, 유학이 퍼져나가면서 한국의 상소와 같은 ‘상서’의 붐이 일어나게 됩니다. 정치/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유학으로 무장한 전국의 하급 사무라이들이 ‘상서’를 통해 지방 정부와 중앙 정부에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에 이전보다 더 강하게 몰려오고 있던 서구의 물결은 당시 일본에게 점증하는 위기 의식과 함께 많은 토론 거리를 안겨 주었습니다. 이전 부터 교류를 지속하고 있었던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일본은 당시 세계가 돌아가는 상황을 동아시아의 그 어느 나라보다도 정확하고 빠르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개항의 결정적 계기가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선의 출현이었다고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놀란 것은 일본이 사실 네덜란드를 통해서 그 흑선의 출현 자체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제독의 이름까지도 알고 있었다네요. ‘충격’은 몰랐던 일이 일어난 ‘깜짝쇼’ 때문이 아니라, 가설적이었던 위기의식이 현실화되었다는 점에서의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조선은 그 ‘가설적 위기의식’의 내용이 달랐던 거지요. 국내의 경제/문화적 변화와 국외로부터의 외교/국방의 변화가 맞물려 일본 사회 전체가 정치적으로 각성한 듯이 보일 정도로 당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주장을 내놓고 서로 토론을 합니다. 이러한 의견 중에는 ‘쇄국’이라는 것도 있었으나, 조선에서의 ‘쇄국’과 달랐습니다. 조선의 ‘쇄국’은 철지난 주자학을 중심으로 ‘소중화’를 지키자는 정신 승리의 차원이었다면, 일본의 ‘쇄국’은 스스로를 지키고 힘을 보존하자는 실질적인 측면이 더 강했습니다. 그러기에 ‘쇄국’이 아니라 적극적인 개항을 통해서 부국강병의 길을 가는 것이 더 실질적이라는 판단이 서면 언제든지 ‘쇄국’에서 개항으로 돌아설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유학을 뒤늦게 받아들인 탓도 있어서겠지만, 유학을 정치/사회 구조에 대한 도구로 생각을 했지, 지켜야할 정신적인 이념체계로 보지 않았기에, 유학의 사대부 중심의 정치 사상을 서구 민주주의와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었다 합니다. 특히 사무라이 계층이 이러한 전환에 강력한 지지세력이 되었던 것이지요. 메이지 유신을 이전에 배우면서 신기했던 것은 큰 전쟁이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작은 전투는 있었지만, 토요토미 히데요시 이전의 전국 시대가 재현되지는 않았습니다. 이점에 대해 저자는 몇가지 요인을 얘기합니다. 여러 챕터에 걸쳐서 전개된 요인을 생각나는 대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막부 스스로 정치 체제를 오래 전부터 개혁해오고 있었다 합니다. 저자는 전세계의 여러 혁명이나 그에 준하는 혁명적 개혁의 사례 중에서 당시의 에도 막부만큼 개혁 자체에 대한 수용 의지와 실천 사례가 있었던 경우는 없었다 합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이 끝까지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은, 막부의 성격 자체가 병영 국가 체제에 더 맞는 구조였다 합니다. 막부의 수장인 쇼군은 실질적으로 국내 정치의 정책 결정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고, 토쿠가와 가문의 운영 책임자가 정치적 결정을 주관하는 형식이었다 합니다. 전쟁의 기억으로 인해 대가문의 참여를 많이 배제하고 견제하였다 합니다. 이런 기이한 모습의 정치 체제로 인해 도리어 막부는 당시의 경제적 사회적 변화에 대해 방임하는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었고, 이것이 시장의 발전을 촉진하는 결과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셋째, 막부측의 현명한 판단이 있었습니다. 결국 막부의 정치적 한계로 인해 서남쪽의 지방 정권과 충돌이 일어나게 되고, 막부 토벌군과 막부군과의 전투가 시작됩니다. 에도 총공격을 앞둔 어느 날 막부와 막부토벌군은 협상을 통해 막부를 해소하고 정권을 완전히 천황에게 돌려주기로 합의를 했다 합니다. 가쓰 가이슈라는 인물이 막부 쪽에 있었는데, 이 사람은 당시 막부 토벌군 측의 사카모토 료마의 스승이었다 합니다. 막부 토벌군 측의 사이고 다카모리하고도 이전에 만났던 적이 있었다 합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그 만남 이후로 가쓰 가이슈를 놀라운 인물로 생각하고 존경했다고 합니다. 두 놀라운 인물로서 막부 대표 가쓰 가이슈와 막부 토벌군 대표 사이고 다카모리가 만나, 대규모의 전투 없이 막부의 해체를 이루어 냅니다. 무슨 영화의 한 장면도 아니고. 가쓰 가이슈는 세상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막부 스스로를 위해 끝까지 싸우기 보다는 일본 전체를 위한 결정을 내린 것이라 합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것을 인정해 준 것이지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전개과정은 무슨 영화와도 같습니다. 사카모토 료마와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그 이름을 들었고, 많이 궁금했습니다만, 깊이 읽어볼 기회는 없었습니다. 이번에 가쓰 가이슈라는 인물도 알게 되었네요.
조선의 몰락을 과도한 유교화에서 찾는 관점들이 있는데, 오히려 메이지유신 성공의 바탕에 유학이 있음을 논증한 부분이 매우 신선했습니다. 메이지유신의 배경에 대해 알고싶은 분들이 꼭 보셨스면 해요.
유럽의 '근대'를 우월한 것으로 상정하고 동아시아의 '근세' 연구에 '근대적' 기준을 소급 적용해 바라보는 연구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는 저자의 식견이 탁월하다.
일본 근대사의 권위자가 쓴 국내에서 몇 안되는 메이지 유신 개설서. 대중서이지만 학술적 깊이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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