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소개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완벽히 읽을 수 있다면, 그 사랑은 계속될까?"
160년 전, 조지 엘리엇은 이 위험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질문은 인스타그램과 틱톡의 시대인 2024년에 더욱 날카롭게 다가온다. 『벗겨진 베일』은 타인의 마음을 읽고 미래를 볼 수 있는 남자의 이야기다. 겉보기엔 초자연적 판타지 같지만, 사실은 현대인의 초상화에 가깝다.
주인공 래티머는 스무 살이 넘어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된다. 타인의 생각이 그의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처음엔 신기했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그에게 이 능력은 창작의 영감을 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곧 지옥이 시작된다. 사람들의 겉모습 뒤에 감춰진 추악한 내면, 이기심과 위선, 질투와 경멸이 낱낱이 드러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속으로는 그를 비웃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 그에게 버사라는 여인이 나타난다. 신기하게도 그녀는 래티머가 유일하게 마음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다. 이 '불투명함'이 그를 매혹시킨다. 우리는 모르는 것에 끌린다. 수수께끼를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래티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그는 버사와의 미래를 미리 보게 된다. 결혼 후의 파국, 서로를 증오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그럼에도 그는 그 운명을 향해 걸어간다. 왜일까?
왜 지금 『벗겨진 베일』인가
이 소설이 쓰인 1859년은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된 해다. 과학이 신을 대체하기 시작한 시대, 인간의 마음도 과학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한 시대였다. 조지 엘리엇은 이런 시대정신에 의문을 던진다. 정말 모든 것을 알아야만 할까? 마음의 신비를 모두 벗겨내면 우리는 더 행복해질까?
2024년을 사는 우리에게 이 질문은 더욱 절실하다. 소셜 미디어는 타인의 일상을 실시간으로 들여다보게 한다. 빅데이터는 우리의 취향과 행동을 예측한다. 인공지능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안다고 주장한다. 래티머의 초능력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더 행복한가?
아니다. 오히려 더 외롭고 불안하다. 연결은 많아졌지만 이해는 줄어들었다. 정보는 넘치지만 지혜는 부족하다. 조지 엘리엇은 160년 전에 이미 이런 역설을 예견했다. 『벗겨진 베일』은 SF가 아니라 예언서였던 셈이다.
조지 엘리엇 하면 『미들마치』를 떠올린다. 19세기 영국 문학의 정점으로 평가받는 대작이다. 그런 그녀가 초자연적 중편소설을 썼다는 것은 의외다. 문학계도 당황했다. 리얼리즘의 대가가 왜 갑자기 판타지를 쓴 걸까?
하지만 이것은 일탈이 아니라 심화였다. 엘리엇은 늘 인간 내면의 도덕적 갈등을 그렸다. 『벗겨진 베일』에서는 그 탐구가 더 깊어진다. 의식의 경계를 넘어, 무의식과 직관의 영역까지 파고든다. 초자연적 설정은 이를 위한 장치일 뿐이다. 마치 현대 SF가 미래를 통해 현재를 비판하듯, 엘리엇은 초능력을 통해 인간 본성의 핵심을 해부한다.
이런 실험성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철학과 심리학과 문학을 하나로 엮는다. 엔터테인먼트적 재미와 철학적 깊이를 동시에 갖췄다. 스릴러처럼 읽히지만, 읽고 나면 오래도록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조지 엘리엇의 최대 강점은 심리 묘사다. 그녀는 '영국의 첫 번째 심리 소설가'로 불린다. 인물의 내면을 해부하듯 그려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벗겨진 베일』에서 이 능력은 극대화된다. 래티머가 타인의 마음을 읽는 장면들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정확하다.
"겉으로는 친절한 그들의 내면에 숨겨진 중간적인 경박함, 억눌린 이기심, 모든 유치함의 혼돈, 비열함, 모호하고 변덕스러운 기억들..." 이런 묘사를 읽다 보면, 엘리엇이 정말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19세기 인물들의 위선을 까발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보편적 인간 본성을 그린 것이다. 우리도 겉과 속이 다르다. 친절한 척하며 속으로는 경멸한다. 사랑한다 말하며 실은 계산한다. 엘리엇은 이런 이중성을 냉정하지만 연민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 소설의 백미는 래티머와 버사의 관계다. 래티머는 왜 버사에게 끌렸을까?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실제의 버사'가 아닌 '상상 속의 버사'를 사랑한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랑의 비밀이다. 우리는 상대방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환상을 사랑한다. 그래서 "눈에 콩깍지가 씐다"고 하지 않나. 시간이 지나면 콩깍지가 벗겨진다. 환상이 깨지고 실체가 드러난다. 그때 진짜 사랑이 시작될 수도 있고, 파국이 올 수도 있다.
래티머의 비극은 그가 너무 일찍, 너무 많이 봤다는 것이다. 미래의 파국을 미리 봤으면서도 피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향해 걸어간다. 이것은 그리스 비극을 연상시킨다. 운명을 안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다. 때로는 아는 것이 운명을 고정시킨다.
이 책만의 특별함
시중에 조지 엘리엇의 작품은 많다. 하지만 『벗겨진 베일』의 제대로 된 번역본은 찾기 어렵다. 더구나 현대 독자가 읽기 쉬운 의역본은 더욱 그렇다. 이 책은 그 갈증을 해소한다.
19세기 영문학은 장벽이 높다. 문장이 길고 복잡하다. 당시의 사회상을 모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다. 이 책은 그런 장벽을 낮췄다. 원작의 정신은 그대로 살리되, 문장은 간결하게 다듬었다.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했지만, 고전의 품격은 잃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책에는 깊이 있는 '작품 해설'이 포함되어 있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 철학적 함의, 현대적 의미까지 상세히 풀어낸다. 소설을 읽는 즐거움과 함께 지적 만족감까지 누릴 수 있다. 대학생, 직장인, 문학 애호가, 심지어 중고등학생까지 각자의 수준에서 즐길 수 있도록 구성했다.
우리는 '투명성의 시대'에 산다. 모든 것이 공개되고 공유된다. 프라이버시는 구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모든 베일을 벗겨내면 우리는 더 자유로워질까? 더 행복해질까?
『벗겨진 베일』은 묻는다. "당신은 정말로 모든 것을 알고 싶습니까?" 당신의 연인이, 친구가, 가족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낱낱이 알고 싶은가? 당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미리 보고 싶은가?
대부분은 망설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 모르는 것에도 가치가 있다. 신비와 비밀이 있어야 관계가 지속된다. 불확실성이 있어야 희망이 가능하다. 엘리엇은 160년 전에 이 진리를 꿰뚫어봤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한다고 호들갑 떠는 시대, 빅데이터가 모든 것을 예측한다고 주장하는 시대. 바로 지금이야말로 『벗겨진 베일』을 읽을 때다. 이 책은 단순한 고전이 아니다. 가장 현대적인 소설이다. 가장 미래적인 경고다.
타인의 마음을 읽는 남자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것이 문학의 마법이다. 조지 엘리엇은 그 마법의 대가다. 『벗겨진 베일』은 그녀가 우리에게 남긴 특별한 선물이다.
지금, 이 베일을 벗겨보시라. 단, 조심스럽게.
* 이 책은 수익금의 일부를 어린이재단에 기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