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위한다면 지갑을 찢어라』는 삶으로 설교하는 목사 김동호의 페이스북 담벼락에 남겨진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예수님이 가슴 아파하시는 일에 자기 가슴을 찢게 되고, 가슴만 찢는 것을 넘어 실제로 자기 지갑을 찢는 작은 실천이 훈련이 되고, 나눔의 훈련이 생활이 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저자가 깨닫고 감동하고 신나 하던 하나님의 말씀을 오롯이 전해준다.
<책속으로 추가>
<197-198쪽 중에서>
막내 손녀 국희가 요즘 집에 와 있다. 국희는 이제 막 돌이 지났다. 하루하루 재롱과 재간이 늘어 가족들을 얼마나 즐겁게 하는지 모른다. 얼마 전 식구들과 함께 귤을 먹고 있었다. 귤을 들고 있는 국희에게 입을 벌려 “아~” 하면 인심도 좋게 귤을 하나씩 내 입에 넣어 주는데, 손에 귤이 다 떨어질 때까지 계속 “아~” 하는데도 계속 입에 넣어 주었다.
그러다가 아이 손에 귤이 다 없어진 줄 모르고 나는 또 입을 벌리고 “아~” 했다. 그랬더니 우리 국희가 자기 입 속에 있던 귤을 꺼내 내 입에 넣어 주는 것 아닌가! 그날 나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귤을 먹었다.
고아원에서 섬기시는 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이들이 자꾸 쌓아 둔 이불 사이에 먹을 것을 숨겨 놓는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 사실을 잊어버려서 음식이 그곳에서 썩는 경우가 있단다. 버림받고 충분히 사랑을 받지 못하면 늘 불안하기 때문에 자기 것을 남과 나누기 힘들어하고 남는 것조차 감추어 둔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참 아팠다. 그 아이들은 세상에 자기와 자기 몫을 지켜 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무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국희는 요즘 온 가족에게 무지막지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고 있다. 그랬더니 자기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게 조금도 어렵지 않았고 남이 달라니(물론 내가 남은 아니지만) 자기 입속에 있는 것까지 꺼내 주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는 하나님의 무지막지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이다. 참으로 무지막지한 사랑이다. 그런데도 가끔 보면 우리는 꼭 고아처럼 산다.
<200-201쪽 중에서>
추수감사절 설교 때 우리 목사들이 잘 쓰는 예화가 하나 있다. 우산 장수 아들과 짚신 장수 아들을 둔 어느 어머니의 이야기다. 비가 오면 짚신 장수 아들을 생각하며 염려하고, 햇빛이 나면 우산 장수 아들을 생각하며 염려한다는 것이다. 우리 목사들은 햇빛이 나면 짚신 장수 아들을 생각하고 감사하고, 비가 오면 우산 장수 아들을 생각하고 감사해야 한다고 설교한다. 나도 그렇게 설교했다.
생각해 보니 그 예화는 잘못됐다. 햇빛이 날 때 짚신 장수 아들 생각하고 감사하고, 비가 올 때 우산 장수 아들 생각하고 감사하는 어머니가 있다면 그건 생모가 아니다. 세상에 그런 엄마는 없다. 비가 오면 짚신 장수 아들 걱정하고, 해가 뜨면 우산 장수 아들 걱정하는 것이 세상 모든 엄마의 공통점이다. 세상의 모든 엄마는 그래서 늘 걱정이다. 그게 엄마의 마음이고 그게 엄마의 사랑이다.
그 엄마의 마음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가난한 자에게 가 있다. 약한 자들에게, 억눌린 자들에게 가 있다.
하나님은 이제 부자가 된 우리 한국도 사랑하시고, 어떻게 손을 대기가 어려울 만큼 가난한 아프리카 말라위 구물리라도 사랑하신다. 하나님에게는 우리도 아들이고, 구물리라도 아들이다. 지금 하나님의 마음은 구물리라에 가 있다. 우리가 철이 든 아들이라면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하나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구물리라 우리가 힘껏 도와서 잘 살게 할게요.” 우리 함께 하나님께 효도하는 철든 아들딸이 되어 보지 않겠는가?
<219-220쪽 중에서>
충동에 못 이겨 일을 저지르고 그 일이 주는 중압감 때문에 잠도 깊이 못 잘 때가 많다. 오늘도 자다 깨니 새벽 3시다. 가끔 이런 나에게 내가 묻는다. ‘넌 왜 밤낮 그러냐?’ 그러면 나는 나도 모르게 대답한다. ‘그래도 재밌잖아!’
맞다. 그래도 재밌다. 하나님이 주시는 부담은 지기 전까지만 무겁고 막상 지면 언제나 감당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신 모양이다. 쉽고 가벼울 뿐만 아니라 재밌다. 재미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기막힌 기쁨이 있다.
<256-257쪽 중에서>
산에 가 보면 많은 사람이 다녀서 생긴 길이 있다. 1970년 1월 1일 친구들과 송구영신 예배를 드린 후 설악산엘 갔다. 1월 1일 밤을 백담사 산장에서 자고 2일 새벽 장수대로 넘어가는 산행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만 산속에서 길을 잃었다. 내설악 겨울산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다행히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길을 찾아 내려올 수 있었다. 아마 10분만 늦었어도 지금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날 나는 길이 생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길은 생명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내가 생명이다”라고도 말씀하셨다. 맞다. 예수님은 길이시고, 그러므로 생명이시다.
길은 한두 번 다닌다고 생기지 않는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밟고 다녀야 겨우 길이 생긴다. 길이 닦였다가도 얼마 동안 또 밟고 다니지 않으면 길이 없어지고 만다. 믿음의 길도 마찬가지다. 은혜 한 번 받고 감동 받았다고 길이 닦이는 것이 아니다. 듣고 또 듣고 순종하고 또 순종하는 일을 반복해야 겨우 조금씩 길이 닦이는 것이다. 그리고 넓혀지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쉽게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것 같다. 그래서 평생 예수를 믿어도 예수님께 길이 들지 않는다. 예수의 길이 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