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드라큘라가 20세기 미국 교외에 나타난다면?
고딕 소설의 상징을 미국 소도시에 이식한 현대적 공포의 정수
브램 스토커의 고전을 20세기 미국 교외를 무대로 하여 완벽하게 변주해 내며 공포 소설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살렘스 롯』이 새로운 디자인과 판형으로 출간되었다. 기념비적인 데뷔작 『캐리』로 성공을 거둔 후라 공포 소설 작가로 낙인찍히지 않을까 하는 관계자의 우려가 있었음에도, 킹이 흔쾌히 그 꼬리표를 받아들이며 두 번째 출간작으로 선택한 작품이다. 킹은 ‘20세기 미국에 드라큘라가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그때까지만 해도 유럽의 고성이나 외딴 저택에 붙박여 있는 듯했던 흡혈귀라는 존재를 1970년대 미국의 쇠락해 가는 마을에 이식함으로써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에 스며든 어둠을 포착해 낸다. 낯선 존재이면서도 현대적 배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초자연적 괴물의 압도적인 힘도 능숙하게 묘사되지만, 폐쇄적인 마을에서 전염병처럼 확산되어 가는 불안이야말로 공포 소설의 진가를 보여 주는 부분이다. 트라우마가 된 유년 시절의 기억, 해체되어 가는 공동체, 악에 대항하려는 무력한 자들의 연대라는 서사 구조에서 킹의 또 다른 대표작인 『그것』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살렘스 롯』은 1979년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의 토브 후퍼 감독이 드라마로 만든 이래 최근까지도 거듭 리메이크되며 반세기에 걸쳐 생명력을 이어 가고 있다.
고등학교에서 선택 과목으로 ‘판타지와 SF’를 가르칠 때 다룬 소설 중 하나가 『드라큘라』였다. 나온 지 그토록 오래된 작품이 여전히 생생히 살아 있는지 새삼 놀랐다. 아이들도 좋아했고, 나 역시 흥미로웠다. 어느 날 저녁을 먹으며 ‘만약 드라큘라가 20세기 미국에 나타난다면 어떨까?’라고 무심코 툭 내뱉자,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파크 애비뉴에서 노란 택시에 치여 죽겠지.” 대화는 그렇게 끝났지만 이후 그 생각은 몇 날 며칠 동안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생각해 보니 아내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 전설적인 백작이 뉴욕 같은 대도시로 온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만약 그가 아주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 마을에 나타난다면 어떨까? 나는 그 답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졌고, 그래서 쓰게 된 책이 『살렘스 롯』이다.―스티븐 킹 공식 홈페이지에서
오래된 흉가가 자리 잡은 마을,
초대받지 않은 자가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2년 전 심각한 사고를 겪어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작가 벤 미어스는 신작을 구상한다는 명목으로 어린 시절에 잠시 살았던 메인주의 작은 마을 ‘살렘스 롯’으로 돌아온다. 한적하고 평화로운 풍경이 여전한 가운데, 과거에 벤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 오래된 흉가 ‘마스턴 저택’ 역시 마을 전체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변함없이 서 있었다. 귀환한 벤이 마을 주민들과 안면을 틀 무렵, 공교롭게 마스턴 저택에도 스트레이커와 발로라는 외지인이 입주하며 마을에 기이한 사건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어린아이가 실종되고, 원인을 설명할 수 없는 죽음이 잇따르며, 밤이면 알 수 없는 방문자가 창문을 두드린다. 고등학교 교사 매트와 함께 기현상의 정체를 파악하려 하던 벤은 마을을 뒤덮는 어둠의 근원이 마스턴 저택에 있음을 알고, 조력자들과 함께 이에 맞서려 한다.
“마을은 어둠을 잘 알고 있었다.”
여러 인물의 시점이 교차되며 진행되는 『살렘스 롯』에서 특이할 만한 점은 ‘롯’, 즉 마을의 시점에서도 서사가 전개된다는 점이다. 마을이란 공간 자체가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내부에 있는 인간 군상을 조망하면서 그들이 감추고 있는 ‘작은 악’과 시시각각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낱낱이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마을은 당신의 것이고, 당신은 마을의 것이며, 그 둘은 죽은 자같이 북쪽 들판의 비석들처럼 나란히 잠든다. 이곳은 생명은 없고 나날이 느린 죽음만이 있을 뿐이어서, 마을에 악이 덮칠 때면 그 일은 거의 예정된 것, 혹은 달콤하고 마취된 듯이 보일 정도다. 흡사 마을에 악이 다가오고 형태를 갖추는 일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2권 12쪽) 무너져 가는 공동체의 민낯을 샅샅이 훑으며 기괴한 경외감을 선사하는 이러한 시선이야말로 외부에서 온 흡혈귀보다도 더욱 두려움을 자극한다. 평범하고 친숙했던 일상의 공간과 사람이 한순간에 낯설게 변모할 수 있다는 불안이야말로 현대인의 근원적 공포가 아닐까. 20대 후반의 나이에 이런 밀도의 장편 소설을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타고난 이야기꾼인 스티븐 킹의 천재성을 짐작하게 한다.
■줄거리
작가 벤 미어스는 신작을 쓰기 위해 어린 시절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 ‘살렘스 롯’으로 돌아온다. 때마침 외곽에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흉가인 마스턴 저택에 정체불명의 외지인이 입주하면서 이변이 벌어지기 시작한다.